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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 주보
제 439 호 2026년 6월 14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13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2장 17절-29절
오전설교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이 되라
조도희 담임목사 | 요한계시록 1장 10절-18절
오후설교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되라
조도희 담임목사 | 디모데전서 4장 11절-16절
수요설교
무엇을 버릴 것인가?
강태영 형제 | 마가복음 8장 34절-38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13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2장 17절-29절
본문 말씀
17 보라,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그의 뜻을 알고 또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아 더 훌륭한 것들을 인정하여 19 네 스스로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형식을 갖춘 사람으로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내자요, 어두움 속에 있는 자들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들의 교사요, 어린 아기들의 선생이라고 자신하니

2:17 보라,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그의 뜻을 알고 또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아 더 훌륭한 것들을 인정하여

19 네 스스로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형식을 갖춘 사람으로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내자요, 어두움 속에 있는 자들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들의 교사요, 어린 아기들의 선생이라고 자신하니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안다고 자랑한다.

그는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며, 그것에 동의한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내자”, “”, “어리석은 자들의 교사”, “어린 아기들의 선생.”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성경에 대해 입술로만 존중을 표할 뿐이다.

랍비들은 구약성경인 율법과 선지서들을 공부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의 성경 해석에 대한 주석의 주석의 또 주석을 연구한다.

(토라(모세오경), 미쉬나, 탈무드, 중세 랍비 주석, 현대 랍비 주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탈무드는 엄청난 권위를 가진다.

그래서 실제로는 성경 본문보다 유명한 랍비가 어떻게 해석했는가가 더 중요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 위에 네 단계의 권위를 더 높여 놓은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메시아를 거부한 이후, 그분의 초림을 예언했던 성경 말씀들을 거부한 데 대한 변명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의 메시아 예언들을 재해석하여, 그것들이 더 이상 예언이 아니라고 만들어 버렸다.

①이사야 7:14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아하스 시대에 태어난 어떤 아이 (히스키야 혹은 다른 아이)로 본다.

②이사야 9:6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히스키야 왕이나 어떤 다른 선한왕이라고 해석한다.

③시편 22,

다윗 자신의 고난이라고 본다.

④이사야 53,

오늘날 표준적인 랍비적 가르침은 고난받는 종이 이스라엘 민족 자체이며, 그들이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 인도하기 위해 고난받고 있다는 것이다.

 

21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들을 미워하는 네가 신당 물건을 훔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위반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하는도다.

 

여기서의 핵심은, 단지 십계명을 가지고 있거나 심지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다고 해서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24,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하는도다.”

이방인들은 21-23절에서 유대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유대인들과 그들의 성경과 그들의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구약의 예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게 만들었을 때이다.

 

25 네가 율법을 지킨다면 할례가 정녕 유익하지만 네가 율법을 위반하는 자가 되면 네 할례가 무할례로 되느니라.

26 그러므로 만일 무할례자가 율법의 의를 지킨다면 그의 무할례를 할례로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법문과 할례로써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하지 않겠느냐?

28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체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법문에 있지 않은 것이라. 그들의 찬사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니라.

 

26 그러므로 만일 무할례자가 율법의 의를 지킨다면 그의 무할례를 할례로 여길 것이 아니냐?

유대인들을 할례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할례 그 자체는 아무것도아니다.

할례를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며 할례를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고전7:19)

할례는 단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다른 이방 민족들과 구별되었다는 육체적인 표시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는 그가 율법을 지킬 때에만 유익하다.

할례가 상징하는 언약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내 앞에서 행하라. 그리고 너는 완전하라.”(17:1)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이 언약의 조건을 어긴다면, 할례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네가 율법을 위반하는 자가 되면 네 할례가 무할례로 되느니라.”(25)

대부분의 경우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하신 말씀을 가져다가 신약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포피를 할례하고 더 이상 목을 굳게 하지 말라.”(10:16)

보라, 주가 말하노라. 그 날들이 오면 내가 할례받은 모든 자들을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과 더불어 벌하리니 곧 이집트와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멀리 떨어진 변경에 사는 모든 자들과 광야에 사는 자들이니 이는 이 모든 민족들이 할례받지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온 집도 마음에 할례받지 아니하였음이라.(9:25-26)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만일 어떤 유대인이 마귀처럼 산다면 주께서는 그 유대인을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같이 여기신다.

그러므로 만일 무할례자가 율법의 의를 지킨다면 그의 무할례를 할례로 여길 것이 아니냐?”(26)

율법을 어기는 유대인이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이방인이 하나님께서 자기 양심 속에 두신 법을 따른다면, 그 이방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약속하신 영적인 복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의 무할례를 할례로 여길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유대인 남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에게 본래 상태에는 없는 두 가지를 행하게 하셨다.

첫째로 그 남자들은 머리를 짧게 깎지 말아야 했다.

또 남자가 긴 머리를 하고 있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수치가 된다는 것을 본성 그 자체까지도 너희에게 가르치고 있지 아니하느냐?”(고전 11:14)

둘째는 할례였다.

또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법문과 할례로써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하지 않겠느냐?”(27)

유대인은 자기 혈통을 매우 자랑하고, 자기 언약들과 약속들을 매우 자랑하지만, 언젠가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이방인들] 이 세대[유대인들]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파로 회개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태복음 12:41)

심판 때에 남방의 여왕[이방인]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유대인들]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 여인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의 맨 끝에서 왔음이라.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태복음 12:42)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 때문에 이방인들에 의해, 모세에 의해(5:45-47), 아브라함에 의해(8:39-40, 53-58), 성경에 의해(5:38-40),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입에 의해(27:25) 심판받게 될 것이다.

 

28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체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법문에 있지 않은 것이라. 그들의 찬사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니라.

이 구절들은 두 종류의 유대인들을 구별하고 있다.

⑴첫째는 육체적인 유대인들이다.

그들의 민족은 율법과 구약성경 전체를 받았다(3:2).

그들은 주변의 모든 민족들로부터 육체적으로 구별되었고 카나안 땅을 받았다.

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회복되었고, 두 번째로 쫓겨났다가 또다시 두 번째로 회복되었다(11:11).

⑵둘째는 이방인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양심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아무도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전10:32)

하나님의 교회는 육체적인 민족이나 인종이 아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도 없고 종이나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으니 이는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3:27-28).

구원받을 때 성령께서 몸 안에 들어오시면, 내면에 할례를 행하신다.

또한 너희가 그의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 버린 것이라.”(골로새서 2:11)

로마서 2:29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로마서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골로새서 2장에 계시된 분명한 사실은, 신약에서의 내적인 할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위치의 결과이며, 그것은 결코 바뀔 수 없다는 점이다.

로마서 217절부터 29절까지는 신약적 교리의 의미로 적용될 수는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구약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로마서 2:29마음의 할례는 의지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포피를 할례하고 더 이상 목을 굳게 하지 말라.”(신명기 10:16)

 

마태복음 8:10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로마 백부장에 대하여 이스라엘에서는 이처럼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나니, 결코 없도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당시 어떤 유대인보다도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한 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주님께서는 그 백부장의 사건을 사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왕국의 자녀들은 바깥 흑암에 던져져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라.”(8:11-12).

그 왕국 안에는 아브라함과 함께 앉는이방인들도 있고, “바깥 흑암에 던져지는유대인들도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시대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면 아브라함의 일을 행하였으리라.”(8:39)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말씀하실 때, 엘리야 시대의 사르밧 과부와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이라는 두 구약의 예를 사용하시면서,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사례를 말씀하셨다(4:25-27).

그러므로 구약 시대 전체를 지나 그리스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다시 천년왕국에서도, 주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은 지옥으로 보내시고 순종하는 이방인들은 구원하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2:28-29에서 설명하고 있는 상황이다.

신약에서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분께 속하게 되면, 바울은 그 사람이 아브라함의 영적인 씨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으로 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알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들이니라.”(3:7, 29).

구약의 마음의 할례(10:16, 2:29)그리스도의 할례(2:11)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할례는 거듭남의 결과이며, 따라서 그것은 의지의 행위가 아니다(1:13).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결코 변할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치에 달려 있기 때문에(8:38-39), 그리스도의 할례는 영원한 것이다.

신약에서 당신의 신분(standing)은 당신의 상태(state)와 다를 수 있다.

 

오전설교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이 되라

조도희 담임목사
요한계시록 1장 10절-18절
본문 말씀
10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으며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내 뒤에서 들었는데 11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그러므로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스머나와 퍼가모와 두아티라와 사데와 필라델피아와 라오디케아에 보내라.” 하시더라 12 나에게 말씀하신 그 음성을 보려고 돌아서니 일곱 금촛대가 보이더라. 13 그 일곱 촛대 가운데에 인자 같은 이가 있는데 발까지 닿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으로 만든 띠를 둘렀더라. 14 그의 머리와 머리털은 눈처럼 희어서 양모처럼 하얗고, 그의 눈은 불꽃 같더라. 15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고,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가졌고 또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가진 칼이 나오며, 용모는 해가 그 맹렬한 기세로 비치는 것 같더라. 17 내가 그를 보자 죽은 것처럼 그의 발 앞에 엎드러지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나에게 말씀하시니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요, 18 나는 살아 있는 자며, 죽은 자였으나,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졌노라.

성경에 계시된 칭찬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칭찬은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에 대한 칭찬이다.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1:19)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거기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 때가 가까움이니라.”(1:3) 참된 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된 진리대로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이다. 성경에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 때 올바른 믿음이 형성된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가림막이 걷히고, 지금의 그리스도, 곧 부활하시고 통치하시며 영광 가운데 빛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요한에게 주어진 것은 감상적이고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에게 보여진 것은 주권자이신 그리스도의 위엄 있는 초상이었다. 이 본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에 답해 준다. “나는 어떻게 계시의 말씀의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은 그 말씀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는 사람이다(10-12).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으며 …요한은 당시 팟모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9). 그는 사람들에게서 격리되어 있었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마음에 자신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신다. 세상의 방해 요소들로부터 분리된 마음, 성령께 순복하는 마음, 예배로 거룩하게 구별된 마음. 이것은 마치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과 같다. 다이얼이 정확히 맞춰져 있지 않으면 신호가 왜곡된다. 요한의 마음은 하늘에 맞추어져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더 분명히 보기 원한다면, 영적인 민감함을 길러야 한다. 많은 성도들이 계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내 뒤에서 들었는데…” “나팔은 성경에서 권위와 선포,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징한다(출애굽기 19:16). 그리스도의 음성은 연약하거나 희미한 음성이 아니다. 그것은 무게와 권위를 지닌 음성이다.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자신이 보는 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명령하신다. 이 교회들은 소아시아에 실제로 존재했던 지역교회들이었지만, 동시에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의미도 지닌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권위가 있다.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 분명하다. 모호하거나 불확실하지 않다. 적용 가능하다.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삶에 관계된다. 당신은 성경을 나팔 소리처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하나의 제안 정도로 여기는가? 그리스도의 음성은 단순한 묵상이나 사색의 대상이 아니다. 그 음성은 반드시 응답을 요구한다.

나에게 말씀하신 그 음성을 보려고 돌아서니 일곱 금촛대가 보이더라. 그 일곱 촛대 가운데에 인자 같은 이가 있는데”(12-13) 그리스도께서는 촛대들(교회들) 가운데 서 계신다. 그분은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교회 가운데 임재하시며 모든 것을 살피시는 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떠나 계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교회 가운데 거니시며 그 모든 상태를 알고 계신다.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은 그 말씀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은 그 말씀에 계시고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이다(13-16).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 7:13에 나타나는 메시아적 칭호이다. “내가 밤에 환상들을 보았더니, 보라, 인자 같은 분이 하늘의 구름들과 함께 오셔서 옛날부터 계신 분께로 오시니 그들이 인자 같은 분을 그분 앞에 안내하였더라.” 이 칭호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분의 왕적 권위와 통치권을 강조한다. 그분은 사람이시지만 단순한 사람이 아니시며, 메시아요 만왕의 왕이시다.

발까지 닿는 옷을 입고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은 제사장과 같은 복장을 연상시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심을 보여 준다. 또한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다. “가슴에는 금으로 만든 띠를 둘렀더라.” 금띠는 존귀함과 권위를 상징한다. 그분은 섬기시는 제사장이실 뿐 아니라, 통치하시는 왕이시다.

그의 머리와 머리털은 눈처럼 희어서 양모처럼 하얗고이것은 순결함과 영원한 지혜를 상징한다. “내가 보았더니 보좌들이 넘어져 있고, 옛날부터 계신 분이 앉으셨는데, 그분의 옷은 눈같이 희고 그분의 머리털은 순전한 양모 같더라.”(다니엘 7:9). 그분은 죄가 전혀 없으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의 눈은 불꽃 같더라.” 그분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분은 우리의 행위뿐 아니라 우리의 동기와 생각까지도 보신다.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고놋은 성경에서 종종 심판을 상징한다.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 같은 발은 그분의 강함과 의로운 심판을 나타낸다. 그분의 심판은 완전하고 순결하며 결코 잘못되지 않는다.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그 음성은 압도적이며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다. 거센 폭포의 소리처럼 모든 다른 소리를 잠재우는 음성이다. 누구도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대항할 수 없다.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가졌고일곱 별은 교회의 천사들, 곧 목회자들이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종들을 친히 붙들고 계신다. 그들은 세상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 안전하게 있다.

또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가진 칼이 나오며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브리서 4:12). 그리스도께서는 무력이 아니라 진리로 정복하신다. 그분의 말씀은 거짓을 베어내고 죄를 드러내며 사람의 마음을 판단한다.

용모는 해가 그 맹렬한 기세로 비치는 것 같더라.” 그분의 얼굴은 눈부시고 찬란한 영광으로 빛난다. 한낮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죄 많은 인간은 그 영광을 감당할 수 없다. 한낮의 태양을 똑바로 바라본다고 상상해 보라. 눈은 그 빛을 견딜 수 없다.

요한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분의 영광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었다. 우리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지나치게 높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시야가 축소되면 교회도 축소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낮아지면 교회의 경외심도, 거룩함도, 능력도 함께 약해진다.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은 그 말씀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믿고 지키는 사람이다(17-20).

내가 그를 보자 죽은 것처럼 그의 발 앞에 엎드러지니,” 사랑받던 제자 요한은 그분 앞에서 두려움 가운데 무너져 내렸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걸었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분의 가슴에 기대었던 제자였다. 그러나 육신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을 가까이서 알았다는 사실이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마주하는 것과는 다르다. 요한은 영화롭게 되신 주님을 보자 그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은 자처럼 그 발 앞에 엎드러졌다. 참된 그리스도의 환상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가벼운 친숙함이 아니라 두려움과 경외심을 낳는다. 교만이 아니라 겸손을 낳는다.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난 사람들은 결코 자신을 높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약함과 죄됨을 깨닫고 겸손히 엎드렸다. 오늘날 많은 예배가 경외심을 잃어버린 이유는 참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단순히 친구나 도움을 주는 존재 정도로만 생각할 때, 예배는 가벼워지고 경건은 약해진다. 그러나 높고 영화로우신 주님을 바라볼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낮추고 그분을 경배하게 된다.

요한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진 것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영광의 주님을 올바르게 본 사람의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나에게 말씀하시니라.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는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위로의 선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마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죽은 자처럼 엎드린 요한에게도 주님은 가장 먼저 위로의 말씀을 건네신다.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 확실한 보증이 담겨 있다.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요”, 그분의 영원성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시작 이전에도 계셨고, 역사의 마지막에도 계신다. 그분은 시간의 흐름에 제한받지 않으시며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 세상의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인간의 생사화복이 바뀌어도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없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분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모든 시대의 주권자이시다.

나는 살아 있는 자며, 죽은 자였으나,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그분의 승리를 말한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패배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십자가는 그분의 승리를 드러낸 무대였다. 그분은 실제로 죽으셨지만 죽음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다. 사망을 정복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완전하다는 증거이다. 사탄도, 죄도, 죽음도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졌노라.”, 그분의 권세를 말한다. 열쇠는 통제권과 지배권을 상징한다. 열쇠를 가진 사람이 문을 열고 닫을 권한을 가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죽음이 최종 권세자가 아니다. 사망이 주권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주권자이시다. 사람은 죽음의 시간을 결정할 수 없지만, 죽음조차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는 두려운 심판주이시지만,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위로를 베푸시는 구주이시다. 요한을 두렵게 하셨던 바로 그 손이 요한 위에 얹혀졌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라면, 죽음을 다스리시는 분도 그리스도시라면, 영원을 주관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시라면,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통제하시는 것을 성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그분이 어떠하신 분으로 보고 있는가? 혹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만 그분을 생각하고 있는가? 당신은 그분의 임재와 거룩하심과 권능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후설교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되라

조도희 담임목사
디모데전서 4장 11절-16절
본문 말씀
11 이런 것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라. 12 아무도 너의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13 내가 갈 때까지 읽는 것과 권고하는 것과, 교리에 전념하라. 14 장로회에서 안수함으로써 예언에 따라 너에게 주어진 네 안에 있는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 15 이 일들을 묵상하고 이 일들에 전념하여 너의 진전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하라. 16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써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리라.

세상은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이용해 돈을 벌고, 어떤 사람은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명예를 높이고, 어떤 사람은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은 세우셨고, 그 바울을 통해 디모데를 세우셨고, 디모데를 통해 에베소 교회를 세우셨다. 오늘 본문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람이다(11-13).

이런 것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라.”(11)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라고 말한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본질은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진리이다. 교회를 세우는 본질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다.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감정은 잠시 사람을 움직인다. 그러나 진리는 사람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킨다. 성도들을 성장시키는 본질은 목사의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다. 말씀은 사람을 보호한다. 속임수와 술책으로 거짓 교리가 넘치는 세상이다. 그 결과 이리저리 흔들린다(4:14-15). 세움을 받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어린아이이다. 영적 싸움은 진리 전쟁이다.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말씀을 알아야 한다. 말씀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13절에서 바울은 3가지에 전념하라고 권면한다. “읽는 것과 권고하는 것과, 교리에 전념하라.”

우선 말씀으로 격려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설명하고 이해시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북돋워주는 것이 격려하는 것이다. 이 말의 근원이 성령 하나님을 의미한다. 자신이 떠날 것을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실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위로자이신 성령을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들을 가르치시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들을 기억나게 하시리라.”(14:26)

성령의 위로는 가르치시는 것이며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 위로자는 옆에 서서 돕는자, 격려하는 자이다. 어떻게 위로하시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고 그 말씀들을 잘 풀어서 격려하신다.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을 격려해야 한다. 일반적인 격려로는 안되고 말씀으로 격려해야 한다. 세상적인 격려는 다시 어려움이 오면 다시 주저앉는다. 격려하는 것은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고 삶 가운데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용기를 주고 도전하는 것이다. 그런 격려를 받은 사람은 스스로 일어서게 된다.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자녀를 격려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자녀가 말씀을 잘 이해하고 원리대로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여 도우라.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도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생명의 길을 달려갈 것이다. 이것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다. 교회는 사람을 격려하고 사람을 세우는 곳이다. 세상의 격려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하는 곳이다. 그 말씀의 원리대로 살아가도록 옆에서 돕는 곳이다. 자녀들에게 인내하였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해야 한다. 내게 맡겨 주신 자녀들, 성도들 인내로 말씀으로 격려한 결과 열매를 맺게 된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다가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죽는다. 그런 사람의 자녀라면 위축되고 풀이 죽고 쓴 뿌리가 내리며 자란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대단한 능력이 있다. 윤리적으로 탁월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성실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능력이 탁월하니 직장에서도 사업에서도 승승장구 진급하고 성공한다. 그런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병들어 시들어 죽는다. 특별히 그런 사람의 가족은 숨이 막혀 메말라 간다.

우리는 모두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정적이었던 사람이 그 사람을 만나면 긍정적으로 바뀐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던 사람이 그 사람과 함께 지내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바뀐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마음의 평화가 생긴다. 그리고 잠재되어 있던 재능이 실현되어 열매를 맺게 된다. 그 사람 곁에 있으면 인생의 풍성한 결실의 열매를 맺는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서는 참된 경배자를 찾으시고 추수할 일꾼을 찾으시고 하나님의 청지기를 찾으신다. 바로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사람을 세우고 싶다면 먼저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은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이다(12, 15)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12) 가르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더 많이 본다.

삶으로 본을 보여야 한다. 말에서, 행실에서, 사랑에서, 영에서, 믿음에서, 순결에서 본이 되라고 말씀한다. 사람은 돌봄을 통해 성장한다. 바울은 디모데를 단순히 가르치지 않았다. 그를 격려했고, 위로했고, 기도했고, 동역자로 삼았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그렇게 세우셨다. 사람은 강압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관심과 사랑 속에서 성장한다.

사람을 세우려면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이 일들을 묵상하고 이 일들에 전념하여 너의 진전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하라.”(15)고 말한다. 사람을 세우는 일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관심과 인내가 필요하다.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방법은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항상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던 것이다. 제자들과 삶을 함께 하였다. 요즈음은 모든 배움이 강의실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의로만은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강의를 통해서는 지식을 습득할 뿐이다. 모든 교육이 지식과 정보 전달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교육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삶을 함께 나눌 때 이루어진다. 가정을 통해 만들어지고, 교제를 통해 만들어진다. 참 교육에 삶 속에서 이루어짐을 아셨기에 항상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다.

요즈음 사람들은 삶을 함께 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터넷 강의를 통해 교육받을 수 있다. 정보, 지식의 전달에 치우쳐져 있다. 그 비극적인 결말을 이미 맛보고 있다. 박사 학위 받은 것과 인성은 전혀 상관이 없다. ‘역시 배운 사람은 달라.’ 이 말은 전혀 근거가 없다. 공부를 많이 하여 사회에서는 전문가가 되어 성공했을지 모르나 정작 가장 중요한 인간 관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품은 결코 강의로 형성되지 않는다. 진리는 강의를 통해서만 전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 결과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삶을 함께 하게 하기 위해 가정, 교회를 허락하셨다. 바로 모임이다.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는 것은 그리 바람직스럽지 않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은 영적 목표를 제시하는 사람이다 (14-16).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하라.”(16) 좋은 지도자는 현재만 보지 않는다. 미래를 보여 준다.

성장의 목표를 보여 준다. 14절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받은 은사를 사용하라고 말한다. “장로회에서 안수함으로써 예언에 따라 너에게 주어진 네 안에 있는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

모든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은 그 은사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성숙의 목표를 보여 준다. “이 일들을 묵상하고 이 일들에 전념하여 너의 진전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하라.”(15) 성도는 정체되어서는 안 된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한다. 진리를 배우는 것과 성장에는 만족이 없다. “실로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며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요 ... 내가 이미 이르렀다 함도 아니요, 이미 온전해졌다 함도 아니라. 다만 나는 붙잡으려고 좇아갈 뿐이라. 나 역시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혀 있노라.”(3:8, 12)

사명의 목표를 보여 준다.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써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리라.”(16) 바울은 디모데에게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사람을 세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세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우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람이다.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이다. 영적 목표를 제시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건물을 세우는 사람보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신다. 우리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주일학교에서, 삶의 현장에서, 한 사람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사랑으로 돌보며, 그리스도를 향한 목표를 제시하는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수요설교

무엇을 버릴 것인가?

강태영 형제
마가복음 8장 34절-38절
본문 말씀
34 주께서 무리를 제자들과 함께 불러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35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구하리라.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37 또 사람이 자기 혼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38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들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자기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고 하시더라.

세상에는 공짜처럼 보이는 광고가 많이 있다. 다음 예시를 보고 진짜 공짜처럼 느껴지는지 생각해 보라. ○○모바일 간편하게 개통하는 무료 유심 이벤트. 지금 바로 가입 시 누구나 유심 0. 이벤트 기간: 61~610. 참여방법: '유심 0원 신청하기' 버튼을 통해 가입 신청서 작성 후 개통 유심을 무료로 제공을 한다니 진짜 무료 같지만 실상은 해당 통신사에 가입하여 통신사 요금을 매달 지불해야 하니 진정한 무료는 아니다. 이것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 혜택을 얻었다 한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물건을 살 때는 물론이고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입은 경우, 그에 상응하는 답례를 하는 것은 도리다. 직장에서 평소에 나에게 못되게 하던 상사가 갑자기 잘해준다면 무언가 의도가 있는 것이다. 영적인 삶에도 공짜는 없다. 죄를 지었는데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신다. 복음을 거절한 사람은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고 더 사랑하고 싶다면 시간을 내어서 말씀과 기도로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양립이 가능해 보이는 경우도 있다. 겉으로는 선해 보이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잘 믿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속으로는 온갖 더러운 죄에 얽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징계하시거나 토해내시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지옥의 심판으로 다루실 것이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오늘 본문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거저먹기 식으로 따르고 싶다고 아무나 따를 수 없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소극적이다 하는 성도가 있다면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무엇을 마땅히 버려야 하는지 살펴보고 돌이키며 예수그리스도를 잘 따르고 있다면 계속 그 길을 유지해서 하나님께 더욱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그리스도인은 잃으면 얻는다

1,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8:34

교만은 마귀의 속성이며 인간은 그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으며 태어난다. 인간관계에서 대부분의 마찰은 교만함으로 일어난다.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음과 자신보다 잘나가거나 잘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잘나가면 분노하고 시기한다. 자기 자신의 삶이 중심이 되는, 본인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육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동일한 삶을 살게 된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나는 죄가 없는 의인이라 생각했다면 구원받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후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인정하며 그 사람의 삶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만을 드러내고 겸손함 가운데 주님만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어떠한 책임이 따른다 하더라도 심지어 어떠한 고통이 따른다 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과감하게 자신의 것을 버리는 사람이다. 8:19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 말씀하신다. 자신의 평온함을 추구하면서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겠는가?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과감히 자신의 게으르고자 하는 육신적 평온함 버려야 한다. 8:22 한 제자가 예수님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 지내게 하옵소서."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라." 말씀하신다. 인간의 입장에서 굉장히 섭섭할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천륜이(부모 자식 간의 도리)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나 그 인륜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진 천륜은 저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있으면 장례를 잘 치러야한다. 육신적인 일로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키지 말라는 뜻이다. 8:31에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 된다는 것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을 말리다가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 꾸짖음을 받는다. 제자들이 왕국을 기다리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베드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없이 왕국을 취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베드로의 제안은 광야의 시험 때의 마귀의 제안과 동일한 구조이다. 육신의 일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에서, 살아계신 주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돌이켜서는 안된다. 육신의 피곤함이 있다. 피곤하면 휴식을 취해서 기력을 회복하여 최상의 상태를 주님께 드리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해서 게으름으로 미루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경배 드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시간에 돈 조금 더 벌고자 뒷전으로 미루고 세상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정해진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면 열심히 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육신적인 것 모두 내어버려야 한다. 자신이 드러나고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것 모두 주님 앞에 굴복 시키고 항복 시켜서 우선순위를 주님께 드리야 한다. 그 사람은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헌신을 할 수 있다. 자신을 버리고 부인했다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말씀하신다.

35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구하리라.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죽는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죽을 각오를 가진 사람이다. 죽어서 지옥에 갈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자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영생을 주셨다. 아무것도 아닌 더러운 죄인인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으셨는데 그분께 드리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섬기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주님을 섬길 때 가장 큰방해가 되는 것은 자기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사탄이 욥을 정죄할 때 주님께 사람의 피부로 사람의 피부를 바꾸오니 정녕 사람이 자기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리이다." 말했다. 생명을 공격하면 두 손 다 들게 되는 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순교자들의 시대에 카톨릭 심문관들이 죽음을 걸고 협박하니 믿음을 버리고 믿음의 동료들을 밀고하여 넘겨준 자들이 있었다. 생명이 위협당하니 감춰왔던 위선을 드러낸 것이다.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는 영생에 비하면 이 짧은 생은 사랑할 가치가 없다. 내가 마시다가 흘린 작은 물방울은 바람 한점이면 금세 마른다. 이것이 우리 인생이다. 진리를 알아가기에 너무도 짧다. 바로 그 진리를 위해, 주님과 복음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는 것은 합당하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말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일과 복음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해 주신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칭찬과 상을 받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른데 방해되는 자신의 육신적인 일들 모두 하나님께 항복시켜 내어버려야 한다. 우선순위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

 

2, 세상을 버려야 한다. 8:36~37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은 다른 삶을 살아보지 못한 것이라 한다. 공통적으로 그들 각자의 삶에 미련을 갖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이뤘음에도 결국 죽음 앞에서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미련을 갖고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은 육신의 삶, 육신의 생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혼이 영원히 산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다.) 그 사람이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지옥을 선고받고 나서야 깨닫게 되겠지만 이미 그땐 늦었다. 세상을 얻는 것보다, 자신의 육신의 삶을 보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혼이 구원받는 것이다. 여러분 한 사람의 혼이 굉장히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의 혼을 구원해 주시고자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려주셨다. 한 사람의 혼이 지니는 물리적인 값은 얼마인가? 혼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대단히 귀중한 대상이다. 본문은 온 세상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혼이라고 말씀한다.
미국의 천체 물리학자 "그레그래플린" 교수는 "행성의 나이와 크기, 질량, 온도 등을 고려하여 행성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방정식을 만들었다. 이를 근거로 계산한 지구의 가치는 한화로 환산했을 때 '5447460조 원"이라고 한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인 화성은 1,820만 원으로 책정되었으며 금성은 17원 정도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다른 행성들의 가치가 지구의 가치보다 휠씬 적게 산정된 가장 큰 이유는 다른 행성들과 달리 지구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물, 특히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잘 조성되어 있는지가 그 행성의 가치 액수를 결정한 것이다.

성경에서 세상의 용례 중 하나는 물리적인 땅인 "지구"인데, 이러한 지구의 가치를 감안하면 한 사람의 혼의 가치는 5447460조원 이상이 된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해서 한 사람의 혼을 주님께로 이겨왔을 때 여러분의 하늘나라 계좌에는 최소 5447460조 원이 찍히게 된다. 빌 게이츠가 1초에 15만 원 정도 번다고 하는데 그걸 뛰어넘는다. 이보다 더 수지맞는 투자는 없다. 이것은 물리적인 한계를 지닌 수치일 뿐, 들림 받아 올라갔을 때 그 혼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의 돈 벌고 인간관계를 잘 형성하고 좋은 평판을 쌓는것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가치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돈 버는 것 삶이 안정되어 경배 드리고 구령하는 시간을 얻기 위해 열심히 벌어야 한다. 인간관계를 잘 형성해서 그 혼을 주님께로 이겨와야 한다. 좋은 평판을 잘 쌓고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내뿜어 본이 되어 혼을 이겨오기 적합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 외 자신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생의 자랑을 얻기 위해 세상을 얻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 시간을 혼을 이겨오는데 마땅히 투자하여 하늘의 계좌에 상급을 쌓아 진정한 부자가 되길 바란다.

 

3, 자신의 체면을 버려야 한다. 8:38

필자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경원 사거리에서 매주 금요일 퇴근 후 오후 1~15분에 시작하여 구령 시간을 갖는다. 하루는 매우 어려운 적이 있었다. 어떤 학생에게 전도지를 전달했는데 마치 똥 묻은 손을 피하는 것처럼 몸을 비틀어 피하는 것이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듯이 비웃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제일 힘든 것은 건너편에 카페가 있는데 거리 설교할 때 문이 열려있었는지 점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오더니 매우 혐오하는 표정으로 째려보고 문을 닫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구령 시간을 마치고 있었던 일과 힘들고 부끄러웠음을 하나님께 솔직히 말씀드렸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대신해서 온갖 모욕을 당하고 벌거벗는 수치도 당하고 온갖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지 않았느냐?' 이런 생각을 넣어주셨다. 필자는 그 즉시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사람들이 주는 시선, 손가락질, 수군거림, 모욕 등을 마땅히 감당하겠다 고백해 드렸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손가락질, 수군거림, 욕 그것들은 나를 향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혼을 이겨오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이 복음은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결국 그들의 시선은 나를 향했겠지만 자신들이 하나님을 향해 그런 악을 행하고 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함께하신다. 우리가 받는 모욕 주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계신 것이다. 어떤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아주 극진한 대우와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그 사실을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할 것이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그 사랑을 초월했다. 자신의 생명 기꺼이 내어놓으시고 십자가에서 흘린 핏값으로 우리의 죄의 종된 몸을 해방시켜주셨다. 그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로, 상속자로 입양시켜주셨다. 마땅히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고 십자가를 전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자를 하나님께서도 똑같이 부끄러워하신다. 우리가 그 부끄러움을 감당하고 자신의 체면 따위는 내려놓고 복음을 신실하게 전했을 때 훗날 하나님께서 "잘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칭찬하시며 영원히 썩지 않을 상을 수여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잃어야 얻는다.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버려야 한다.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자신의 육신을 드러내는 것, 세상을 사랑하는 것, 자신의 체면치레 마땅히 버려야 한다. 이것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쓰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아주 신실하게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매주 신실하게 경배 드리고 매주 올라오는 아름다운 구령 보고만 보더라도 얼마나 신실하게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여러분의 열매가 그 증거다.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가라. 그러나 아직 우선순위를 올바로 드리지 못해 미비한 길을 걷고 있는가?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한다. 신실하게 예수그리스도를 따른 길을 살다가 훗날 들림 받아 올라갔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신실한 종, 신실한 일꾼, 신실한 청지기라는 칭찬과 함께 많은 상급을 받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사랑하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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