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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 주보
제 437 호 2026년 5월 31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11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2장 1절-11절
오전설교
참된 신앙 고백
조도희 담임목사 | 마태복음 16장 16절-18절
오후설교
목회자를 대하는 성도의 책임
조도희 담임목사 | 히브리서 13장 7절
수요설교
후회의 반면교사에게 배우라
조경재 | 창세기 25장 29절-34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11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2장 1절-11절
본문 말씀
1 그러므로 이 사람아, 판단하는 네가 누구일지라도 변명하지 못할 것은 네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 스스로를 정죄함이니, 이는 판단하는 네가 똑같은 일들을 하기 때문이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진리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1 그러므로 이 사람아, 판단하는 네가 누구일지라도 변명하지 못할 것은 네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 스스로를 정죄함이니, 이는 판단하는 네가 똑같은 일들을 하기 때문이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진리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1절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7:1)

그들은 진리를 듣는 것을 싫어한다.

잃어버린 사람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할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술수를 다 쓴다.

사람들은 1절의 이 부분을 사용해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죄를 지적하거나 죄를 설교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사람이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변명일 뿐이다.

그러나 책망받는 모든 것이 빛에 의하여 드러나니 무엇이든지 드러나게 하는 것은 빛이니라.”(5:13)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들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들을 판단해야 한다.

그는 땅의 소금”(5:13)이 되어야 한다.

그는 누룩을 억제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3:16) 보존하여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처럼말해야한다(벧전 4:11).

이방인의 결말은 완전한 정죄이다(1).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며(1), 또한 하나님께 의해 진리대로”(2) 정죄를 받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일들 때문에 정죄받는다.

어떤 이방인도 자기 죄에 대해 변명할 구실이 전혀 없다.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판단하면서도 같은 일을 행하는 이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아니면 네가 그분의 선하심이 너를 회개하도록 인도하심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용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무시하는 것이냐?

 

이 사람아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모든 방식(4)은 결국 그 사람을 회개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도 좋은 것들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태양을 악인과 선인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비를 내리심이라.”(5:45)

지나간 때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이 자기들의 길로 가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그분은 자신을 증거 없이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이는 그분이 선을 행하시고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비와 풍요한 계절을 주시며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셨음이니라.”(14:16-17)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베푸시는 일반적인 복들을 통해 잃어버린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선하심을 나타내 오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4)은 특별히 하나님의 용납하시는 관용오래 참으심을 가리킨다.

,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사람을 당장 심판하실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죄인의 어리석음을 오래 참으신다.

그 죄인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선하게 대해 오셨는지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다루시지는 않는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것을 허락하시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⑴그리스도인을 하늘의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⑵하나님의 약속들이 확실하다는 것을 믿는 자에게 증명하시기 위해서이다.

⑶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⑷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자리에 두시기 위해서이다.

⑸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시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여러 이유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

 

5 다만 너의 완고함과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계시될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을 뿐이로다.

6 그분께서는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리니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하시고

8 다투고 진리에 복종하지 아니하며 불의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분개와 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혼에게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이방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이방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기 때문이라.

 

5절부터 11절까지는 그리스도 이전, 곧 노아 이후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이방인들이 놓여 있던 행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구약 시대 내내 이방인들을 지켜보시면서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셨다.

구약 시대에는 어떤 이방인이 옳은 일을 행하고, 계속해서 옳은 일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이방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⑴사도행전 13:42-48

⑵사도행전 10

⑶누가복음 7:3-5

이방인은 자신의 양심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빛 아래에 있다.

그가 자신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빛에 올바르게 반응할 때, 주께서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이방인이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고, 양심을 더럽히며, 양심을 거슬러 죄를 짓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빛을 거부할 때, 주께서는 그를 지옥으로 보내신다(로마서2:8-9).

이 두 가지 원칙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밝힌다(“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기 때문이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기 때문이라.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나올 때마다 그 문맥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은 동일하다.

모두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이며,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삶의 다른 측면들에 있어서는 민족들과 인종들에 대한 구별이 존재한다.

 
오전설교

참된 신앙 고백

조도희 담임목사
마태복음 16장 16절-18절
본문 말씀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너에게 나타낸 것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니라. 18 나도 너에게 말하노니, 너는 베드로라. 그리고 이 반석 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은 인자인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16:13) 그리고 이어서 더 중요한 질문을 던지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15)이 질문은 단순한 종교적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한 사람의 인생과 영원을 결정하는 질문이다. 신앙 고백은 내가 누구를 믿는지, 무엇을 붙들고 사는지, 어디에 인생의 기초를 두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선언이다. 잘못된 신앙 고백은 잘못된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참된 신앙 고백은 사람을 흔들리지 않게 만든다. 참된 신앙 고백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만든다. 환경이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이 떠나가도 흔들리지 않는다. 박해가 와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교회는 다니지만 무엇을 믿는지 분명하지 않다. 입술로는 예수님을 말하지만 삶의 기초는 세상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막연한 종교 생활이 아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는가?”이다. 참된 신앙 고백은 참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권위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참된 신앙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 이 질문은 지금도 모든 사람 앞에 놓여 있는 질문이다. 예수님은 단지 역사 속 인물이 아니다. 단지 위대한 종교 창시자가 아니다. 단지 사랑과 희생을 가르친 종교 지도자도 아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이시다. 참된 신앙 고백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하늘로부터 온 고백이었다. 하늘의 증거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는 뜻이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을 선언하는 말이다. 곧 아들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분으로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의 삶은 모두 변했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시어 물로 침례를 주라고 하신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리니, 그가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라.’고 하시기에, 내가 보았고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노라.”고 하니라.”(1:34, 침례인 요한의 고백) “랍비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주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이다.”(1:49, 나다나엘의 고백) 마르다는 눈물 가운데서도 말했다. “나는 주께서 세상에 오실 그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나이다.”(11:27, 마르다의 고백)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절망의 순간에도 그녀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믿음은 환경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의심 많던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무릎 꿇고 외쳤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20:28)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다. 참된 신앙은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1:8),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4), “나의 하나님께서”(고후12:21),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노니”(1:3), “그러나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광 가운데서 그의 풍요함을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4:19), “나의 기도에 항상 너를 말하며,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1:4) 바울에게 예수님은 단순한 교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분은 실제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다. 감옥에서도, 박해 속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바울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마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만 마귀는 구원받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믿음이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이 고백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처녀에게서 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이시다. 그분은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참된 신앙 고백은 단순한 종교적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거는 믿음이다.

 

참된 신앙 고백은 참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권위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참된 신앙 고백은 나의 성경을 고백하는 것이다(17).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너에게 나타낸 것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은 즉시 말씀하셨다. “이를 너에게 나타낸 것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니라.” 참된 신앙 고백은 인간의 연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이다.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신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해 왔다. 에덴동산에서 처음 던진 말도 이것이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더냐?”(3:1) 마귀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고, 특히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변개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현대 역본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보혈과 처녀 탄생과 구원의 확실성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계열 사본에 근거한 현대 역본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를 약화시킨다. 킹제임스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반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같은 표현을 강하게 증거한다. 그러나 많은 변개된 역본들은 ”(Lord), “그리스도”(Christ),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등의 표현을 삭제하거나 축소하는 경우가 있다.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디모데전서 3:16) 여기서 중요한 차이는 무엇인가? 킹제임스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현대 역본들은 (He)”라고 바꾸어 예수님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표현을 흐리게 만든다. 누가 육신으로 나타났는가?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변개된 본문은 모호하게 만든다.

현대 역본들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약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요셉과 주의 모친이 그 아기에 관한 것을 듣고 이상히 여기더라.”(누가복음 2:33) 다른 변개된 성경들은 그의 부모가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요셉은 법적인 보호자였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쌓이면 결국 예수님의 초자연적 탄생을 흐리게 만든다.

현대 역본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구절들을 삭제하거나 괄호 처리한다.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심이라.”(요한일서 5:7) 이 구절은 삼위일체를 가장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이것이 단순한 번역 문제가 아니라 교리적 공격이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변개하면 결국 예수님도 변개된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 서적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꾸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바꾸는 것이다. 다른 성경, 다른 영,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은 결국 다른 구원을 만든다. 바울은 경고했다. “만일 누가 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또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은 또 다른 영을 받거나 너희가 영접하지 않은 또 다른 복음을 전파하면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11:4)

오늘날 교회들이 약해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 대한 절대 권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성경을 의심하면 예수님도 의심하게 된다. 성경을 변개하면 교리도 변개된다. 성경을 사람의 판단 아래 두면 결국 하나님보다 인간 이성이 높아지게 된다.

참된 신앙 고백은 나의 성경을 붙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4:35) 참된 신앙은 성경을 판단하지 않고, 반대로 성경 앞에 자신을 굴복시킨다. 참된 신앙 고백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나의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 최종 권위이다.”, “나는 사람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래서 참된 신앙 고백은 결국 나의 성경을 고백하는 신앙이다. 당신에게는 한글킹제임스성경이 당신의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 최종권위인가?

 

참된 신앙 고백은 참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권위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참된 신앙 고백은 나의 교회를 고백하는 것이다(18).나도 너에게 말하노니, 너는 베드로라. 그리고 이 반석 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신앙 고백이 먼저였고, 교회는 그 다음이었다. 교회는 사람의 조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 고백 위에 세워졌다. 참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며, 참된 신앙은 반드시 교회로 이어진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지 않으셨다. “너희의 교회를 세우리라.” “베드로의 교회를 세우리라.” “종교 조직을 세우리라.”오직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목사도 아니다. 교단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의 머리이시다. 교회는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주님의 소유이다. 그래서 참된 신앙 고백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다.” “이 교회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다. 본문에서 이 반석 위에라는 말씀은 베드로 개인 자체보다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에 초점이 있다. 교회의 기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는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음이니, 이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전3:11) 사람 중심의 교회는 흔들린다. 전통 중심의 교회도 무너진다. 감정 중심의 교회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교회가 강한 이유는 사람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기초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문해야 한다. 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의 지체인가?

참된 신앙 고백은 교회에 헌신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을 홀로 두지 않으셨다.

사도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지역교회 안으로 모았다. 성도는 혼자 믿음을 유지하도록 부르심 받은 존재가 아니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말씀을 배우고, 함께 주의 만찬에 참여하며, 함께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 받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말한다. “예수님은 믿지만 교회는 필요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도 사랑한다. 머리를 사랑하면서 몸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를 완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 고백은 결국 이렇게 고백한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나의 최종 권위이다.” “교회는 내가 헌신해야 할 주님의 몸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그의 인생을 바꾸었고, 그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 사람들의 대답이 아니라 나의 고백이 중요하다. 참된 신앙 고백은 입술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되고, 성경을 향한 순종이 되며, 교회를 향한 헌신으로 나타난다. 오늘 우리의 고백도 베드로의 고백이어야 한다.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오후설교

목회자를 대하는 성도의 책임

조도희 담임목사
히브리서 13장 7절
본문 말씀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들려주고 너희를 다스리던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행실의 결과를 관찰하여 그들의 믿음을 따르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영적 삶을 강건하게 하시고, 여러분을 성숙한 성도로 성장시키기 위해 목회자를 교회에 보내셨다. 목회자는 여러분을 격려하고, 영적으로 먹이며, 인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가르치도록 보내심 받은 사람이다. 만일 그가 마땅히 해야 할 대로 주님과 동행한다면,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될 것이며, 교회와 여러분 각자의 신앙생활에 큰 복이 될 것이다. 목회자로서 책임이 있는 것처럼, 성도들도 그를 향한 책임이 있으며, 그것을 반드시 감당해야 한다.

 

성도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회자를 기억하고, 존중하며, 믿음으로 따르는 것이다. 첫 번째로 성도의 책임은 목회자를 기억하는 것이다.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들려주고 너희를 다스리던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행실의 결과를 관찰하여 그들의 믿음을 따르라.”

목회자를 기억하는 것은 목회자를 배려하는 것이다. 목회자를 향해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선 목회자의 시간을 배려하라. 기도할 시간을 주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시간을 주라. 그리고 그를 격려하는 말을 아끼지 말라. 너무 많은 교회들이 목회자가 짊어진 짐을 잊고 살아간다. 그리고 너무 적은 사람들만이 그 짐이 실제로 얼마나 무거운지 이해한다. 목회자는 여러분의 짐을 자신의 어깨에 메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여러분을 위해 영적 싸움을 싸울 것이다. 여러분의 목회자를 배려하라! 목회자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복 주실 것이다.

목회자를 기억하는 것은 목회자가 감당하는 현실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많은 경우 그의 짐이 여러분의 짐보다 더 무겁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신의 짐만 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짐도 함께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를 생각할 때마다, 또 그들과 함께할 때마다 친절을 보이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의 친구가 되려는 여러분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이것은 또한 기도로 짐을 나누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부르심이다. 여러분이 목회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는 지속적이고 진실한 기도의 선물이다. 목회자는 지금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명을 시작하고 있다. 지역교회의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큰 책임이다. 그에게는 성도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의 곁에 서서 기도로 그의 손을 붙들어 주어야 한다. 아론과 훌이 모세 곁에 서서 그의 손을 붙들어 주었을 때, 모세는 모든 백성을 섬길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자기 시간을 희생하며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 목회자가 더 나은 주의 종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여러분이 목회자를 위해 기도한다면, 결국 그 유익은 여러분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사역에 능력을 더하실 것이고, 그를 사용하여 교회와 가정과 여러분의 삶을 먹이고 인도하며 복 주실 것이다. 물론 여러분은 목회자의 물질적 필요도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골방으로 들어가 그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희생을 귀하게 받으신다.

모든 일을 목회자 혼자 떠맡게 하면 큰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기도와 말씀 선포에 있다(6:1-7). 그러므로 성도는 목회자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바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까지 모두 목회자에게 짐 지워서는 안 된다. 사역이 바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짐을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

 

성도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회자를 기억하고, 존중하며, 믿음으로 따르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도의 책임은 목회자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다.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들려주고 너희를 다스리던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행실의 결과를 관찰하여 그들의 믿음을 따르라.”

다스린다(rule)”라는 말은 지도력과 관계된 표현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직분에 두신 권위를 말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의 권위에 대해 어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어떤 설교자들이 목회자의 직분을 남용해 왔기 때문이다(벧전 5:1-4).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목회자는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도력과 권위를 맡기신 위치에 세우신 사람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에 의해 세워졌다는 의미이다. 목회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것은 질서와 위치를 말한다. 자연은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머리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만일 어떤 동물이 머리가 둘 달린 채 태어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기형이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에도 머리는 하나뿐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5:23).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 안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하며, 그 질서 가운데 하나는 지역교회 안에 지도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지도자가 바로 목회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인도하는 그 권위를 목회자의 직분에 두셨다. 여성 누구에게 맡기신 것도 아니다. 그 권위를 목사의 직분에 두셨다. 이 교회에는 오직 한 명의 영적 지도자가 있어야 하며, 그 지도자는 하나님의 사람인 목회자이어야 한다. 여러분의 책임은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가 주님을 따르는 한, 여러분도 그를 따라야 한다. 그에게는 인도할 사명이 주어졌고, 여러분에게는 따르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목사를 머리로 하는 독재 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여러분을 하나님의 완전한 뜻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려 할 때, 그는 존중받는 순종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을 맞추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다.

목회자는 이제 여러분 위에 영적 권위를 가진 위치에 세워졌다. 그는 교회 안에서 존중받고 귀히 여김 받아야 할 직분 안에 세워졌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훈계하는 사람들을 알아서 그들의 하는 일로 인하여 사랑으로 그들을 극진히 존경하라. 너희는 서로 화목하라.”(살전 5:12-13). “극진히 존중하라는 말은 최고의 존경으로 대하라는 의미이다. 물론 존경은 억지로 요구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설교와 행실이 일치함을 성도들이 입증하는 시간이 지나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직분 자체에는 이미 일정한 존중이 따라야 한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목회자는 자신이 전하는 설교와 감당하는 사역을 통해 여러분의 존경을 얻게 될 것이다. 목회자로 존경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도 그를 목회자로 대하도록 훈련하라.

교회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 선포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며, 선포된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말씀이 꿀처럼 달콤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칼처럼 여러분을 찌를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오든지 기억하라. 그 말씀은 여러분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보내심 받은 사람의 마음과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여러분을 먹이고 인도하도록 보내심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전하는 말씀을 따르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태도를 반드시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성도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회자를 기억하고, 존중하며, 믿음으로 따르는 것이다. 세 번째로 성도의 책임은 목회자의 믿음을 따르는 것이다.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들려주고 너희를 다스리던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행실의 결과를 관찰하여 그들의 믿음을 따르라.”

그들의 믿음을 따르라어떤 사람을 따르기 전에 먼저 그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목회자를 비판하거나 판단하라는 뜻이 아니다. 사실 어느 누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부족함과 연약함은 발견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교회가 자기 목회자의 삶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이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신앙의 확신들을 보아야 한다. 그가 여러분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도 이해해야 한다.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순종하며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혼들을 위해 깨어 있기를 자기들이 마땅히 설명해야 할 것처럼 하느니라. 그들로 기쁨으로 하게 하고 슬픔으로 하지 않게 하라. 이는 그것이 너희에게 유익이 없음이라.”(13:17). 그의 확신이 얼마나 깊은지 보라. 그의 하나님과의 동행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보라.

그가 얼마나 헌신된 삶을 사는지 보라. 그의 삶을 특징짓는 충성됨을 보라. 교회와 주님을 향한 그의 부담을 보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라. 그는 따라갈 만한 사람이며, 이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마땅한 존중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그의 삶이 여러분 자신의 신앙생활에 본이 되게 하라.

그들의 믿음을 따르라목회자의 삶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여러분 자신의 신앙생활을 위한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를 판단하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다. 허물을 찾아 비판하기 위해 그의 삶을 살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삶 속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그의 헌신과 믿음과 섬김의 본을 따라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사람을 지나치게 높이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권면이었다. 바울은 세 번이나 성도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들이 되라.”(고전 4:16, 고전 11:1, 3:17)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과 바르게 동행하고 있으며,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목회자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도전을 받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의 책임은 하나님의 사람 뒤에 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크게 존귀하게 여기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목회자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 주셨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사람, 여러분을 사랑할 사람,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해 줄 사람, 여러분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사람, 충성스럽게 여러분을 섬길 사람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다.

교회는 관람석이 아니라 전쟁터이다. 성도는 손님이 아니라 동역자이다. 교회가 하나 되어 목회자와 함께 복음의 짐을 질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강하게 세우신다. 목회자를 비평하는 교회는 약해지고, 목회자와 함께 싸우는 교회는 강해진다.

 
수요설교

후회의 반면교사에게 배우라

조경재
창세기 25장 29절-34절
본문 말씀
29 야곱이 죽을 끓였는데,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 몹시 지친지라, 30 에서가 야곱에게 말하기를 “내가 몹시 지쳤기에 부탁하노니 그 붉은 죽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이름을 에돔이라 부르더라. 31 야곱이 말하기를 “오늘 형의 장자권을 내게 팔라.”하니, 32 에서가 말하기를 “보라, 내가 죽을 지경인데, 이 장자권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하니, 33 야곱이 말하기를 “오늘 내게 맹세하라.” 하니, 그가 야곱에게 맹세하였더라. 그가 자기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았더라. 34 그리고 나서 야곱이 에서에게 빵과 팥죽을 주었더니, 그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자기 길을 갔더라. 이같이 에서가 자기의 장자권을 경시하였더라.

가장 비싼 값을 치르고 먹은 식사가 기억나는가? 그 맛이 가격만큼 만족스러웠다면 후회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돈 주고 먹을 바에는 차라리..’라는 소감이 남았다면 후회스러운 식사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모수 서울의 디너 한 끼 가격은 42만원이다. 미식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의 르 상크(Le Cinq)’식당의 가격은 한 끼에 620유로, 우리나라 환율로 약 110만원이다. 한 끼의 식사 가격치고 너무 비싸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정도 가치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기꺼이 돈을 투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식사의 가격은 얼마일까? 아마 워렌버핏과의 점심식사를 꼽을 수 있겠다. 올 해 5월에 경매에 나온 그와의 식사가격은 한화로 약 135억에 팔렸다. 천문학적인 가격을 지불한 이들은 나름대로 오랜 고민 후 그 정도 돈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온 인류의 역사 가운데, 단연코 가장 비싼 값을 치루고 밥을 사 먹은 인물이 있다. 그리고 그는 그 결정에 대해 매우 후회했다. 바로 본문의 후회의 인물, 에서이다. 그는 순간의 제단에 영원을 바친 대표적인 인물이다. 순간의 유익은 금방 사라져버렸지만, 후회는 영원히 남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 후회의 반면교사를 통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후회는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 후회를 남기는 결정을 왜 내리게 되는가의 과정과 그 결말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I 후회의 반면교사에게 배우라. 후회가 남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배우라.

야곱은 형이 가진 장자권을 탐내고 있었다. 여기서 에서가 가지고 있었던 장자권”, 출생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그 특별한 권리가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자. 장자권은 1.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권리가 있다. 그 복에는 팔레스타인 땅의 유업도 포함되어 있다(12:1~4). 2. 두 분깃을 받을 권리다(21:17 ). 3.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에서가 포함될 수 있었다(3:15). 그러나 그는 이것이 가져다 줄 복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이 그리 큰 유익을 준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장자권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당장의 유익을 줄 수 없기에 무시하고 경시했다. 야곱은 반면 이 장자권의 가치를 알고 이를 원했다. 그래서 팥죽을 끓여 형에게 주기 전, 장자권을 대가로 요구한 것이다. 이 때, 에서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보라, 내가 죽을 지경인데, 이 장자권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여기서 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죽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팥죽을 먹지 못하면, 빵을 섭취하지 않으면 죽을 수 도 있다고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장의 필요를 채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값을 치뤄도 좋다고 생각하는 육신적인 상태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에서가 당장 그 음식을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몇 끼를 굶는다고 절대 죽지 않는다.

에서는 장자권이 자신에게 지금 당장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장자권이 그에게 당장 밥을 차려주고, 돈을 주지는 않는다. 장자권은 모두 미래에 유업을 받을 시점에 유익이 될 뿐이다. 그래서 그는 당장 자신의 육신적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음식에 미래의 모든 복들을 바꿔버린다. 에서의 이 모습은 하나님과의 동행, 하나님의 선한 일들과 같은 영적인 일들이 나에게 유익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당장의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들에 희생시켜 버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지금 내가 죽을 지경인데, 내가 급해죽겠는데, 당장 파산당할 위기인데, 내가 세상에서 루저가 되기 직전인데, 지금 내가 미래에 받을 복들을 따질 때겠어?” 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내리는 모든 결정들이 에서의 후회의 결정인 것이다.

야곱은 매우 교활해보이고, 또 형의 모습을 변장해 복을 가로채는 모습을 읽을 때, 결코 야곱을 경건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야곱은 이 때 사기를 친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대가를 밝혔다. “나는 형의 장자권을 원한다. 이 음식을 먹고 싶거든 그것을 나에게 팔라.” 계약의 조건을 분명히 명시했다. 이 계약에 에서가 속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멀쩡한 의지로(단지 조금 배가 고픈 상태였지만) “거래를 한 것이다. 그 계약은 맹세로 확정되었다. 에서가 그 결정을 유보할 여지가 없게 똑똑한 야곱은 확실한 보험책을 마련한 것이다. 야곱이 맹세를 요구했을 때, 에서는 뭔가 쌔함을 느꼈어야 한다. 지금까지 반 장난식으로 말했을지라도, 동생이 진지하게 맹세하라고 했을때, ‘얘가 진심이구나, 정말로 내 장자권을 팔라고, 원하고 있구나느끼며 그 선택에 재고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에서는 맹세했고 자신의 장자권을 팥죽한 그릇과 빵조각에 팔고 말았다. 오늘날로 따지면 김밥 한줄과 라면 한그릇에 아버지로부터 받을 장자의 유산을 내어준 것보다 훨씬 더한 결정이었다. 단순히 물질적인 복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영원한 미래의 유업이 걸려있는 권리를 눈 앞에 음식에 내어준 것이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값을 주고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야 한다. 육신을 만족시키는 모든 죄, 사소한 불순종, 영적인 것보다 세상적인 것을 선택하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게으름과 여러 핑계로 변명하며 놓치는 것, 그 모든 결정들은 마치 에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영원한 것들로 순간적인 것들을 얻는 것이다. 순간의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리는 결정들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들로 사야함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들사람인 에서, 들은 세상을 예표한다. 세상에서 분주히 활동하다가 지쳐버린 상태일 때 훨씬 육신적인 결정을 내리기 쉽다.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사람,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육신적인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발적이고 즉흥적으로, 깊이 생각해보지않고, 가치판단을 제대로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내리는 모든 의사결정은 후회를 남긴다.

 

II 후회의 반면교사에게 배우라. 그 결정은 반드시 후회가 남음을 배우라.

그리고 나서 야곱이 에서에게 빵과 팥죽을 주었더니, 그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자기 길을 갔더라. 이같이 에서가 자기의 장자권을 경시하였더라.”(34) 장자권을 대가로 얻은 음식을 먹는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가 몹시 고픈 에서는 벌컥벌컥 팥죽을 들이키고 우적우적 빵을 씹어먹고 배를 채웠다. 금새 음식은 동이 났고 배부른 에서는 만족하며 자기 길을 갔다. 그는 그 당시에 후회하지 않았다. 먹고나자마자 후회했을 거였다면 애초에 그런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에서가 후회할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우리는 다다음장 27장의 긴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삭이 자신이 사랑한 장자, 에서에게 모든 복을 주려고 날을 정했을 때, 야곱이 리브카와 계략을 세워 그 복을 찬탈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의 장자권과 관련된 상황이므로, 에서가 사냥감을 찾기까지 시간을 더 소요되게 하셨고, 그 시간 동안 이삭은 야곱이 가져온 음식을 배불리 먹고, 에서인줄 알았던 야곱에게 모든 장자권이 포함된 복을 내려준다. 모든 것은 이뤄졌다. 쇼는 마쳤고 막을 내렸을 때, 에서는 그제야 들어와 복을 유업으로 받고자 한다. 이삭은 심하게 떨면서 모든 복은 처음에 왔던 이가 다 이미 받았다 말한다. 우리는 2734절을 주목해봐야 한다.

[에서가 그의 아비의 말을 듣고 대성통곡하며, 그의 아비에게 말하기를 오 내 아버지여, 내게도, 내게도 축복하소서.” 하니] 에서는 자신의 빼았긴 복에 대해 이제야 제대로 된 가치 판단을 내린다. 장자권은 너무나 가치있는 것이였다! 문제는 그가 그것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 그것이 지나가버린 다음에야 그것이 귀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야 뒤늦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불효를 후회하는 많은 자녀들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곁을 떠나야 뒤늦게 고통스러워하며 그를 그리워하는 이별한 사람들이 있고, 기회를 놓쳐버린 뒤에야 그 기회가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황금기회였음을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의 소중함을 바르게 판단하고 감사하며 그것을 소중히 대하는 삶을 산다면,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후회는 쓰라리다. 에서는 대성통곡한다. 다 큰 어른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오고 얼굴이 붉어지고 뱃 속 깊은 곳에서부터 흐느낌이 올라온다. 눈이 퉁퉁 붓고 눈물로 얼굴이 지저분해진다. 자신의 늙은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울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자신의 아우 야곱이 나쁜 사기를 쳐서 그런 것인가? 모든 것이 야곱과 그를 사랑한 엄마 리브카와, 이를 잘 분별하지 못한 늙은 아버지 이삭 때문에 일어난 일인가? 그래서 자신이 축복을 유업으로 얻지 못한 것인가? 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싶겠지만,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그 날의 기억이다. 자신이 한 그릇의 음식으로, 붉은 팥죽과 빵으로 장자권을 팔겠다고 맹세한 그 날이 기억나지 않았을리 없다. 결국 자신의 선택이었다. 이 모든 장자권과 축복과 유업을 잃어버리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에서는 야곱이 준 음식을 먹고 마셨다. 이미 유익을 취했다. 대가는 지불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후회할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 또한 얼마나 사소한 것들로, 사소한 욕심과 작은 정욕과 작은 불순종들에 영원한 것들로 대가를 치루고 있는지 모른다. 문제는 그것을 후회할 순간이 에서처럼 반드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신이 얼마나 작고 사소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영원하고 소중한 것을 값으로 지불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많은 후회를 하며 살아간다. 어떤 후회들은 이를 통해 더 나은 선택을 내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후회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결코 그런 후회를 남겨서는 안된다. 에서의 후회를 통해 반드시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유업과 복,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 그분께 쓰임받을 수 있는 기회, 영원히 존재하는 혼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후회를 남기면 안된다. 그것을 한낱 아무것도 아닌 팥죽 한그릇으로 바꾸라는 세상의 유혹에 절대로 굴해서는 안된다. 절대로 그 계약을 육신의 필요가 급하다고 하여 체결해서는 안된다.

 

III 후회의 반면교사에게 배우라. 순간의 제단에 영원을 바치지 말라. 그 후회는 영원히 남는다.

후회의 반면교사인 에서는 히브리서에서 다시 평가되고 있다. 믿음의 빛나는 영웅들이 11장에서 제시되고 12장에 들어서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따라야 할 본들이 총망라되고 결론이 지어진다. 그러나 그후 한 명의 실명이 거론되는데, 이 사람을 보고는 이 사람처럼 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즉 이 사람도 본보기는 본보기이나, 그 사람의 실패를 보고 교훈을 얻으라는 반면교사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12:16,17을 보자. “음행하는 자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없도록 하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후 그가 축복을 유업으로 받으려고 했을 때 거절당하였으며, 눈물로 간절히 구하였지만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는 눈물로 간절히 구하였지만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에서의 눈물이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못했다.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후회가 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않은 죄인에게 분명히 그 순간을 보여주실 것이다. 받은 전도지를 구겨서 땅에 버린 순간, 복음 전파자의 음성에 얼굴을 찌푸리며 지나가고 속으로 욕했던 순간, 길에서 들리는 거리설교자의 음성을 어리석다라고 혀를 차며 지나갔던 순간들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들이 그 순간을 얼마나 후회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후회를 하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후회는 순간의 제단에 영원을 바친 것에 대한 후회다.

에서가 한 그릇 음식에 장자권을 판 것을 우리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이 사건을 자세히 조명하는 까닭은 성경을 읽는 성도로 하여금 반드시 교훈을 얻으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에서의 이 말도 안된는 선택에 의아함을 느낄 수 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내리는 사람이 있지?’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 세상에는 이러한 에서와 같은 선택을 내리는 많은 이를 발견하신다. 에서가 먹고 마시고 자기 길을 간 것처럼, “우리도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으리라.”(고전15:32), (22:13) 말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온통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자산, 부동산에만 연연해 하는 수많은 에서들을 보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영원한 생명, 천년왕국과 영원에서 남을 유업과 상속에 문제에는 관심도 없고, 에서처럼 내가 죽을 지경인데 이 장자권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코웃음치는 수많은 이들이 있을 뿐이다.

에서는 순간의 제단에 영원을 희생시켰다. 한 그릇 음식에 장자권을 팔아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후회했다. 당신은 순간의 제단에 영원을 바치고 있지는 않은가? 순간의 유희와 만족, 재미, 쾌락을 위해 영원한 것들을 지불하고 있지는 않은가? 늙은 아버지 앞에서 목을 놓아 울고 있는 에서의 모습을 반드시 기억하라.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우리는 순간에 제단에 영원한 것을 바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순간, 사라져 버릴 이 세상을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포기하는 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얻기 위해 보이는 것들을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육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적인 것들을 포기해버리는 육신적인 사람이 아니고 영적인 것들을 위해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것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이 세상과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세속적인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청지기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후회 가운데 눈물로 맞는 이들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로 그분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유업을 받는 성도로 발견되어야 한다!

 

분명히 이 세상은, 육신은, 마귀는 순간의 것들을 제시하며 미래의 것들을 포기하라고 유혹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결과가 어떠한지 후회의 반면교사를 통해 배웠다. 누군가가 삶을 마칠 때, 그의 입에서 나는 아무 후회도 없다라는 고백이 나왔다면 그는 최상의 삶을 산 것이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고백을 누가 할 수 있는지 아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과 신실하게 동행한 자만이 남길 수 있다. 예수님을 영접한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분과 동행했던 삶을 후회하는 사람이 있을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과 동행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삶에서는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선물받은 최상의 삶이다. 혹 과거의 후회가 생각나는가? 그 일을 잊어버리라. 후회하는 것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 지나간 것들을 잊어버리고, 오늘 이 순간 결심하라. “나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후회할 일을 남기지 않겠노라결심하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고자 하시는 그 빛나는 유업을 단 1그램도, 1제곱센티미터도, 1명의 혼도 잃지 않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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