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역의 영광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말했다. 그 “보물”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다. 그리고 그 “질그릇”은 그 복음을 담고 있는 연약하고, 깨지기 쉽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종을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해서 고난이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통 없고, 쉽고, 아무 문제도 없는 삶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믿는 자가 산산이 부서지지 않은 채 얻어맞을 수 있고, 짓눌리면서도 깔려 죽지 않을 수 있으며, 날마다 죽음 가운데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본문은 우리에게 굴복하지 않고 고난당하는 법, 낙심하지 않고 섬기는 법, 그리고 현재의 환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준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를 신뢰하는 삶이다(8-9). “우리가 사면에서 고난을 당하여도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당혹스런 일을 당하여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아니하며 내던져져도 멸망하지 아니하며”
바울은 네 가지 대조를 제시하는데 각각은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를 선포한다. 첫째, 고난당하지만 괴로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면에서 고난을 당하여도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고난을 당한다”는 말에는 눌리고, 짜여지고, 사면이 막힌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바울은 그 압박이 “사면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삶의 한 구석에서 생긴 단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난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괴로워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한다. 그 뜻은 압박을 받았지만 짓눌려 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제한을 받았지만 망해 버린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에 의해 압박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에 의해 감옥에 갇히지는 않는다. 믿는 자는 벽이 점점 자신을 향해 좁혀 오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은혜가 역사할 공간을 남겨 두신다.
둘째, 당혹스런 일을 당하여도 절망하지 않는다. “당혹스런 일을 당하여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당혹스런 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확신이 없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했던 것은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는 앞길이 보이지 않는 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모르는 것과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일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 믿는 자는 혼란스러울 수는 있지만, 소망 없는 상태에 버려지지는 않는다. 그는 계획을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 계획을 세우신 분은 알고 있다.
셋째,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는다.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아니하며…” 바울은 원수들에게 쫓기고,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자주 학대를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미움으로 그를 대적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그의 곁에 서 계셨다. “버림받다”라는 말은 버려지고, 떠나지고, 홀로 남겨지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사람들은 나를 대적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13:5의 위로이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고난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뜻은 아니다.
넷째, 내던져져도 멸망하지 않는다. “내던져져도 멸망하지 아니하며”. 이 표현은 사람이 맞아서 쓰러지거나, 땅에 넘어지거나, 전투 가운데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울은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수없이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멸망하지 않았다.” 그는 넘어질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원수들은 그에게 상처를 줄 수는 있었지만 끝내 그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환경은 그를 낮출 수는 있었지만 그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놓을 수는 없었다. 대장장이는 쇠붙이를 불 속에 넣는다. 그리고 그것을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반복해서 내리친다. 평범한 눈에는 그것이 파괴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쇠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다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이다. 불길은 뜨거울 수 있고, 망치는 무거울 수 있으며, 내리치는 타격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파괴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를 빚어 가고 계신 것이다. 고난이 당신을 둘러쌀 때, 짐의 무게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당신의 짐을 측정하라. 당신은 고난당하고, 당혹스런 일을 당하고, 박해받고, 내던져질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짓눌리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버림받지 않으며, 멸망하지 않는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삶이다(10-15).
바울은 고난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는 무대로 본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니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항상 주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님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지니고 다닌다”는 말은 계속해서 짊어지고 다닌다는 뜻이다. 바울은 자기 몸 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를 따르는 데서 오는 흔적들과 고통들과 결과들을 지니고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고난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고난은 거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과 동일시되게 하였다. 종은 자기 주인보다 크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멸시를 받으셨다면, 그분의 제자들도 비난과 수치를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것은 너희를 미워하기 이전에 나를 미워한 것임을 알라.”(요한복음 15:18)
그 결과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한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나타나다”라는 말은 보이게 하다, 분명히 드러내다, 공개적으로 나타내 보인다는 뜻이다. 바울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는 배경이 되었다. 그의 환난은 부활의 생명이라는 다이아몬드가 더욱 밝게 빛나도록 받쳐 주는 검은 벨벳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약한 사람들, 고난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신다.
바울의 고난은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나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2) 그가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환난을 견디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는 사역의 중요한 원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한 종의 깨어짐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주신다. 말씀 앞에서 눈물 흘리는 설교자는 혼들을 먹일 수 있다. 고통 가운데 기도하는 부모는 가정을 강하게 세울 수 있다. 신실하게 고난당하는 믿는 자는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설교가 될 수 있다.
“역사하다”는 단어는 어떤 것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망은 바울의 고난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지만, 생명은 그의 사역을 통해 역사하고 있었다. 촛불은 자신이 타 들어감으로 빛을 낸다. 불꽃이 탈수록 초는 줄어들지만 방은 밝아진다. 바울의 사역도 그러하였다. 그는 소모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강건하게 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쏟아 붓고 있었지만 복음은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의 삶은 점점 소진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더욱 알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낭비가 아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의 고난은 나를 쓴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나는 단지 불편함에서 벗어나려고만 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 연약함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구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드러내는 삶이다.
믿음은 계속 말하게 하는 확신이 있다.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졌기에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노라.” 한 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믿으므로 말하노라.”(13) 믿음은 바울을 침묵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은 그로 하여금 말하게 만들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바울의 담대함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서 나왔다. 그는 고난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죽음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예수님을 살리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주 예수를 살리신 그분께서 예수를 통하여 우리도 살리시며 또 우리를 너희와 함께 나타내시리라는 것을 아노니”(14)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고난은 일시적이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사역은 가치가 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한다. “우리도 역시 믿으므로 말하노라.” 바울은 삶이 여유가 있고, 쉬웠기 때문에 설교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참되시기 때문에 설교하였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필수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환경이 좋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이 신실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입을 열게 한다. 믿음은 증언하게 한다. 믿음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내가 고난당할지라도 그리스도는 합당하신 분이다. 비록 내가 오해를 받을지라도 그리스도는 참되시다. 비록 내가 약할지라도 그리스도는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은 많은 사람의 감사를 통해 풍성한 은혜가 하나님의 영광에 넘치게 하려는 것이라.”(15)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사역을 더 큰 목적의 일부로 보았다. 그것은 은혜가 퍼져 나가고, 감사가 많아지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는 많은 사람의 감사를 낳고, 그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으로 올라간다. 사역의 목적은 종의 편안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믿게 되면 은혜가 퍼져 나간다. 은혜가 퍼져 나가면 감사가 일어난다. 감사가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그렇게 보았다. 그의 고통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은혜의 진보를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함을 통해 무엇을 하고 계실지 과소평가하지 말라. 당신의 인내가 누군가를 격려할 수 있다. 당신의 간증이 다른 믿는 자를 강하게 할 수 있다. 당신의 기도가 오랜 기다림 끝에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당신이 시험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서 있는 것이 당신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게 할 수도 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16-18).
이제 바울은 왜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지를 말해 준다. 겉사람은 쇠하여 간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 “겉 사람”은 육체와 이 땅의 삶을 가리킨다. 바울은 자기 몸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이, 고통, 환난, 수고, 그리고 고난은 몸에 흔적을 남긴다. 기력은 쇠한다. 건강은 변한다. 슬픔은 흔적을 남긴다. 겉 사람은 점점 쇠퇴해진다.
그러나 속사람은 새로워진다.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 “속 사람”은 믿는 자의 내적인 생명을 가리킨다. 곧 은혜로 강건하게 되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붙들림 받는 혼의 삶이다. 몸은 약해질 수 있지만, 날마다 내적인 새 힘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내일의 힘을 오늘 미리 다 주시지 않는다. 그분은 날마다 필요한 힘을 그날 그날 주신다.
영광에 비하면 환난은 가볍다.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라.”(17) 환난이 실제로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영광과 비교하여 환난을 가볍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잠시”라고 한 것도 고난 자체가 짧기 때문이 아니라, 평생의 고난조차 영원과 비교하면 잠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영광의 무게”에 대해 말한다. “영광의 비중”이다. “비중”이라는 말에는 무거움, 충만함, 실체, 중요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은 환난이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광은 훨씬 더 무게가 나갈 것이다. 지금은 고난이 길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광은 영원할 것이다. 지금은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광은 “훨씬 뛰어난” 영광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18) 바울은 현실을 무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보이는 현실을 보이지 않는 진리로 해석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들은 일시적이다. 고난, 고통, 연약함, 대적, 상실, 죽음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다. 그리스도, 부활, 영광, 하늘, 하나님의 약속들, 그리고 성도들의 유업은 영원한 것이다. 믿음은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자녀여, 당신의 환난은 실제이지만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당신의 고난은 고통스럽지만 영원하지 않다. 당신의 연약함은 눈에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은 바로 그 연약함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바라보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계속 신뢰하라. 연약함 가운데서도 계속 섬기라. 믿음으로 계속 말하라. 압박은 잠시뿐이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