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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 주보
제 436 호 2026년 5월 24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10 : 유대인들의 정죄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2장 1절–3장 8절
오전설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
조도희 담임목사 | 고린도후서 4장 8절-18절
오후설교
참된 부흥
조도희 담임목사 | 에스겔 37장 1절 – 14절
수요설교
벨리알의 아들들이 되지 말라
조도희 담임목사 | 사무엘상 2장 12절-17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10 : 유대인들의 정죄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2장 1절–3장 8절

주제: 하나님은 유대인도 이방인과 동일하게 정죄하시며 공의롭게 심판하신다.

이방인도, 유대인도 변명할 수 없다

1장 결론 : 이방인은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음에도 거부했다.

그래서 변명하지 못한다”(1:20)

2장 시작 : 유대인 역시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아니다.

네가 누구일지라도 변명하지 못할 것은”(2:1)

유대인의 특권은 면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외모나 신분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심판하신다.

 

I. 심판은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2:15)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이루어진다(2:2)

1. 유대인의 착각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하셨으니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2. 바울의 논증

남을 판단하는 자도 같은 죄를 범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회개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오히려 진노를 쌓는다.

3. 적용

오늘날도 동일한 두 가지 변명이 있다.

나는 착하게 사니까 괜찮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복 주셨으니 괜찮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구원의 기회이지 무죄 선언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사람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진리대로 이루어진다.

 

II. 심판은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그의 행위에 따라 이루어진다 (2:615)

그분께서는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리니”(2:6)

1. 유대인의 착각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이다.

율법을 가지고 있다.

2. 바울의 논증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가 문제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받은 빛에 따라 판단하신다.

유대인은 율법을 받았다.

이방인은 율법은 없지만 양심과 마음에 기록된 도덕법이 있다.

이 본문은 행위구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조건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원칙을 설명한다.

특권은 책임을 증가시키며, 지식은 순종을 요구한다.

 

III. 심판은 사람의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이루어진다 (2:1629)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있으리라.”(16)

1. 유대인의 착각

우리는 율법을 가졌다.

우리는 할례를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2. 바울의 논증

외적 종교는 내적 순종이 없으면 무가치하다.

할례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이다.

참된 유대인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내면적 유대인이다.

3. 유대인의 모순

율법을 가르치니 자신은 어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된다.

4. 복음의 요구

종교적 형식이 아니라 거듭나야 한다.

외적 의식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하다.

5. 심판의 날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대했는가?”

종교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며 복음만이 구원한다.

결론 :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로마서의 흐름

본문 대상 결론

1:1832 이방인 변명할 수 없음

2:13:8 유대인 변명할 수 없음

3장 온 인류 모두 죄 아래 있음

 

로마서 2장의 핵심 세 원칙

심판은 진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심판은 행위에 따라 이루어진다.

심판은 복음에 따라 이루어진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도 자신의 평가, 신분, 종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정죄에서 구원한다.

 

오전설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

조도희 담임목사
고린도후서 4장 8절-18절
본문 말씀
8 우리가 사면에서 고난을 당하여도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당혹스런 일을 당하여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아니하며 내던져져도 멸망하지 아니하며 10 항상 주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님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살아 있는 우리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라.

복음 사역의 영광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말했다. 보물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다. 그리고 그 질그릇은 그 복음을 담고 있는 연약하고, 깨지기 쉽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종을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해서 고난이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통 없고, 쉽고, 아무 문제도 없는 삶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믿는 자가 산산이 부서지지 않은 채 얻어맞을 수 있고, 짓눌리면서도 깔려 죽지 않을 수 있으며, 날마다 죽음 가운데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본문은 우리에게 굴복하지 않고 고난당하는 법, 낙심하지 않고 섬기는 법, 그리고 현재의 환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준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를 신뢰하는 삶이다(8-9).우리가 사면에서 고난을 당하여도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당혹스런 일을 당하여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아니하며 내던져져도 멸망하지 아니하며

바울은 네 가지 대조를 제시하는데 각각은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를 선포한다. 첫째, 고난당하지만 괴로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면에서 고난을 당하여도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고난을 당한다는 말에는 눌리고, 짜여지고, 사면이 막힌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바울은 그 압박이 사면에서왔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삶의 한 구석에서 생긴 단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난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괴로워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한다. 그 뜻은 압박을 받았지만 짓눌려 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제한을 받았지만 망해 버린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에 의해 압박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에 의해 감옥에 갇히지는 않는다. 믿는 자는 벽이 점점 자신을 향해 좁혀 오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은혜가 역사할 공간을 남겨 두신다.

둘째, 당혹스런 일을 당하여도 절망하지 않는다. 당혹스런 일을 당하여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당혹스런 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확신이 없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했던 것은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는 앞길이 보이지 않는 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모르는 것과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일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 믿는 자는 혼란스러울 수는 있지만, 소망 없는 상태에 버려지지는 않는다. 그는 계획을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 계획을 세우신 분은 알고 있다.

셋째,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는다.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아니하며…바울은 원수들에게 쫓기고,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자주 학대를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미움으로 그를 대적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그의 곁에 서 계셨다. “버림받다라는 말은 버려지고, 떠나지고, 홀로 남겨지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사람들은 나를 대적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13:5의 위로이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고난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뜻은 아니다.

넷째, 내던져져도 멸망하지 않는다. “내던져져도 멸망하지 아니하며”. 이 표현은 사람이 맞아서 쓰러지거나, 땅에 넘어지거나, 전투 가운데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울은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수없이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멸망하지 않았다.” 그는 넘어질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원수들은 그에게 상처를 줄 수는 있었지만 끝내 그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환경은 그를 낮출 수는 있었지만 그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놓을 수는 없었다. 대장장이는 쇠붙이를 불 속에 넣는다. 그리고 그것을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반복해서 내리친다. 평범한 눈에는 그것이 파괴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쇠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다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이다. 불길은 뜨거울 수 있고, 망치는 무거울 수 있으며, 내리치는 타격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파괴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를 빚어 가고 계신 것이다. 고난이 당신을 둘러쌀 때, 짐의 무게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당신의 짐을 측정하라. 당신은 고난당하고, 당혹스런 일을 당하고, 박해받고, 내던져질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짓눌리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버림받지 않으며, 멸망하지 않는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삶이다(10-15).

바울은 고난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는 무대로 본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니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항상 주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님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지니고 다닌다는 말은 계속해서 짊어지고 다닌다는 뜻이다. 바울은 자기 몸 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를 따르는 데서 오는 흔적들과 고통들과 결과들을 지니고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고난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고난은 거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과 동일시되게 하였다. 종은 자기 주인보다 크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멸시를 받으셨다면, 그분의 제자들도 비난과 수치를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것은 너희를 미워하기 이전에 나를 미워한 것임을 알라.”(요한복음 15:18)

그 결과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한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나타나다라는 말은 보이게 하다, 분명히 드러내다, 공개적으로 나타내 보인다는 뜻이다. 바울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는 배경이 되었다. 그의 환난은 부활의 생명이라는 다이아몬드가 더욱 밝게 빛나도록 받쳐 주는 검은 벨벳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약한 사람들, 고난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신다.

바울의 고난은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나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2) 그가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환난을 견디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는 사역의 중요한 원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한 종의 깨어짐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주신다. 말씀 앞에서 눈물 흘리는 설교자는 혼들을 먹일 수 있다. 고통 가운데 기도하는 부모는 가정을 강하게 세울 수 있다. 신실하게 고난당하는 믿는 자는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설교가 될 수 있다.

역사하다는 단어는 어떤 것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망은 바울의 고난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지만, 생명은 그의 사역을 통해 역사하고 있었다. 촛불은 자신이 타 들어감으로 빛을 낸다. 불꽃이 탈수록 초는 줄어들지만 방은 밝아진다. 바울의 사역도 그러하였다. 그는 소모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강건하게 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쏟아 붓고 있었지만 복음은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의 삶은 점점 소진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더욱 알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낭비가 아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의 고난은 나를 쓴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나는 단지 불편함에서 벗어나려고만 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 연약함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구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드러내는 삶이다.

믿음은 계속 말하게 하는 확신이 있다.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졌기에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노라.” 한 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믿으므로 말하노라.”(13) 믿음은 바울을 침묵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은 그로 하여금 말하게 만들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바울의 담대함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서 나왔다. 그는 고난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죽음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예수님을 살리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주 예수를 살리신 그분께서 예수를 통하여 우리도 살리시며 또 우리를 너희와 함께 나타내시리라는 것을 아노니”(14)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고난은 일시적이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사역은 가치가 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한다. “우리도 역시 믿으므로 말하노라.” 바울은 삶이 여유가 있고, 쉬웠기 때문에 설교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참되시기 때문에 설교하였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필수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환경이 좋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이 신실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입을 열게 한다. 믿음은 증언하게 한다. 믿음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내가 고난당할지라도 그리스도는 합당하신 분이다. 비록 내가 오해를 받을지라도 그리스도는 참되시다. 비록 내가 약할지라도 그리스도는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은 많은 사람의 감사를 통해 풍성한 은혜가 하나님의 영광에 넘치게 하려는 것이라.”(15)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사역을 더 큰 목적의 일부로 보았다. 그것은 은혜가 퍼져 나가고, 감사가 많아지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는 많은 사람의 감사를 낳고, 그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으로 올라간다. 사역의 목적은 종의 편안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믿게 되면 은혜가 퍼져 나간다. 은혜가 퍼져 나가면 감사가 일어난다. 감사가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그렇게 보았다. 그의 고통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은혜의 진보를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함을 통해 무엇을 하고 계실지 과소평가하지 말라. 당신의 인내가 누군가를 격려할 수 있다. 당신의 간증이 다른 믿는 자를 강하게 할 수 있다. 당신의 기도가 오랜 기다림 끝에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당신이 시험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서 있는 것이 당신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게 할 수도 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삶은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16-18).

이제 바울은 왜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지를 말해 준다. 겉사람은 쇠하여 간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 “겉 사람은 육체와 이 땅의 삶을 가리킨다. 바울은 자기 몸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이, 고통, 환난, 수고, 그리고 고난은 몸에 흔적을 남긴다. 기력은 쇠한다. 건강은 변한다. 슬픔은 흔적을 남긴다. 겉 사람은 점점 쇠퇴해진다.

그러나 속사람은 새로워진다.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 “속 사람은 믿는 자의 내적인 생명을 가리킨다. 곧 은혜로 강건하게 되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붙들림 받는 혼의 삶이다. 몸은 약해질 수 있지만, 날마다 내적인 새 힘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내일의 힘을 오늘 미리 다 주시지 않는다. 그분은 날마다 필요한 힘을 그날 그날 주신다.

영광에 비하면 환난은 가볍다.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라.”(17) 환난이 실제로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영광과 비교하여 환난을 가볍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잠시라고 한 것도 고난 자체가 짧기 때문이 아니라, 평생의 고난조차 영원과 비교하면 잠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영광의 무게에 대해 말한다. “영광의 비중이다. “비중이라는 말에는 무거움, 충만함, 실체, 중요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은 환난이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광은 훨씬 더 무게가 나갈 것이다. 지금은 고난이 길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광은 영원할 것이다. 지금은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광은 훨씬 뛰어난영광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18) 바울은 현실을 무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보이는 현실을 보이지 않는 진리로 해석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들은 일시적이다. 고난, 고통, 연약함, 대적, 상실, 죽음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다. 그리스도, 부활, 영광, 하늘, 하나님의 약속들, 그리고 성도들의 유업은 영원한 것이다. 믿음은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자녀여, 당신의 환난은 실제이지만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당신의 고난은 고통스럽지만 영원하지 않다. 당신의 연약함은 눈에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은 바로 그 연약함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바라보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계속 신뢰하라. 연약함 가운데서도 계속 섬기라. 믿음으로 계속 말하라. 압박은 잠시뿐이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하다.

 

오후설교

참된 부흥

조도희 담임목사
에스겔 37장 1절 – 14절
본문 말씀
1 주의 손이 내게 임하시어 주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셔서, 뼈로 가득 찬 골짜기 가운데에 나를 세우시고, 2 나를 그 사면에 지나가게 하셨는데, 보라, 그 열린 골짜기에는 심히 많은 뼈가 있더라. 보라, 그 뼈들이 심히 말랐더라. 3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였더니 4 다시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 그들에게 말하라. 오 너희 마른 뼈들아, 주의 말을 들으라. 5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숨이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에스겔 37장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생생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주의 영 안에서데리고 가셔서 뼈들로 가득한 골짜기 가운데 내려놓으신다. 그것들은 단지 약해진 몸이 아니라, 죽은 뼈들이다. 그 뼈들은 심히 말라있어서 인간적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고, 자연적으로도 다시 살아날 수 없으며, 눈에 보이는 어떤 소망도 없는 상태다. 이 환상은 직접적인 문맥에서 포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너졌고, 흩어졌으며, 소망이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복을 약속하신다.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어서 너희로 너희의 무덤들로부터 나오게 하여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리라.”(에스겔 37:12). 하나님은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곳에 새로움을 가져오실 수 있는 분이다.

 

참된 부흥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참된 부흥은 자신의 영적 황폐함을 깨달을 때 시작된다. 나를 그 사면에 지나가게 하셨는데, 보라, 그 열린 골짜기에는 심히 많은 뼈가 있더라. 보라, 그 뼈들이 심히 말랐더라.”(1-3).

그 골짜기에는 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생명이 없었으며, 말라 있었다. 이것은 완전한 절망의 모습이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상태를 보며 우리의 소망은 사라졌으며”(에스겔 37:11)라고 말했다.

인생에도 그런 시기가 있다. 골짜기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가정이 메마르게 느껴질 수 있다. 교회가 메마르게 느껴질 수 있다. 마음이 메마르게 느껴질 수 있다. 기도가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예배가 힘없이 느껴질 수 있다. 마음을 짓누르는 짐스러운 문제들이 마음의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있다.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마른 들판을 생각해 보라. 땅은 갈라지고, 잎은 시들며, 식물은 죽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사라진 것 같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문제는 생명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공급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의 영과 혼도 마찬가지다. 마른 뼈들은 인간적인 낙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당신이 보는 것만으로 상황을 판단하지 말라. 에스겔은 뼈들을 보았지만, 하나님은 군대를 보셨다. 당신은 실패와 연약함과 공허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로 그것을 살아나게 하실 것을 보신다. 부흥은 자신의 현 상태를 부정하는 사람에게 임하지 않는다. 죽음의 현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회복을 갈망하게 된다.

 

참된 부흥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일어난다(4-8).이 뼈들에게 예언하여 그들에게 말하라. 오 너희 마른 뼈들아, 주의 말을 들으라.”(4)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뼈들에게 설교하라고 명령하신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것은 어리석게 들린다. 뼈들은 들을 수 없고, 반응할 수도 없으며, 순종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주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보여준다. 생명은 에스겔의 성격이나 웅변이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포하게 하신 말씀을 통해 임했다.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10: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사용하여 죽은 죄인들을 깨우시고, 지친 성도들을 강하게 하시며, 낙심한 마음들을 소생시키신다.

설교자는 마치 뼈들로 가득한 골짜기에 말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특히 거리 설교자는 더욱 그렇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는 권면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것이 귀 막힌 사람들에게 떨어지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씨앗은 열매가 겉으로 나타나기 훨씬 전에 이미 땅속에서 역사하고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내 말도 그러하나니 그것은 내게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보내어 이루려 하는 일에서 번성할 것이니라.”(55:11)

부흥은 인간의 열심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된다. 말씀은 죽은 것을 흔들고 흩어진 것을 연결하신다. 진리를 계속 말하라. 성경을 계속 읽으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전파하라. 계속해서 말씀 아래에 자신을 두라. 메마름은 오락이나 감정이나 자기계발로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소생시키신다.

 

참된 부흥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영께서 생명을 불어넣으실 때 완성된다(9-14).

부흥은 온전한 회복을 이룬다. “그때에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바람에게 예언하라. 인자야, 예언하여 바람에게 말하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오 숨아,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살해된 자들 위에 숨을 넣어 주어 그들로 살아나게 하라.” 하시니라. 그래서 내가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예언하였더니 숨이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살아나 그들의 발로 서니 심히 큰 군대더라. 그때에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니라.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집이라. 보라,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사라졌으며 우리의 부분은 완전히 끊어졌도다.” 하느니라.”(9-11).

뼈들이 서로 맞추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그것들을 덮었다. 그러나 그들 속에 숨이 없더라.”(8) 그들은 형태는 있었지만 생명은 없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그림이다. 종교적인 형식과 모양은 있을 수 있지만 영적인 생명력은 없을 수 있다. 형태만으로는 부흥이 아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3:5)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3:7) 겉으로는 질서가 있을 수 있지만 내면에는 생명이 없을 수 있다. 활동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숨결은 없을 수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바람을 향해 예언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러자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살아나 그들의 발로 서니 심히 큰 군대더라.”(10).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께서 생명을 주시는 사역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2:7) 요한복음 3:8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분다고 말씀하시며 성령의 섭리적인 사역을 설명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

등불이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지고, 잘 닦여 있고, 올바른 자리에 놓여 있다 해도 전원이 없으면 빛을 낼 수 없다. 교회나 가정이나 개인의 삶도 형태와 일상은 갖출 수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영만이 살아 있는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 죽은 뼈들이 큰 군대로 살아난다. 겉모습의 상황만 나아지게 해 달라고 구하지 말고, 당신 안에 영적인 생명을 불어넣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라. 환경의 안정을 위한 기도만이 아니라, 마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

부흥은 온전한 소망을 이룬다. “내 영을 너희 안에 두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14)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의 의미를 설명하신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묻힌 것처럼 느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무덤을 여실 것이다. 그들은 끊어진 것처럼 느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데려오실 것이다. 그들은 소망이 없다고 느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신실하신 분임을 증명하실 것이다. 이 본문에서 반복되는 약속은 내가 하리라이다. “내가 너희의 무덤들을 열어서”(13) “내가 너희를 나오게 할 때”(13) “내 영을 너희 안에 두리니”(14) “내가 너희를 너희의 본토에 두리니”(14)

본문의 소망은 이스라엘의 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적인 은혜에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은 무덤에 들어가셨지만 승리하고 나오셨다.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1:25)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실 수 있다면,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다시 살리시고, 깨어진 것을 회복하시며,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실 수 있다.

당신의 골짜기가 아무리 깊다 하여도 하나님의 음성보다 크지 않다. 당신의 메마름이 아무리 심하다 하여도 하나님의 영보다 강하지 않다. 당신의 절망이 아무리 치명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보다 크지 않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바로 그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에 소망을 불어넣으실 수 있다.

 

에스겔은 마른 뼈들로 가득한 골짜기 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 서 있지 않았다. 주의 손이 그 위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뼈들이 흔들린다. 숨을 불어넣으실 때, 죽음이 패배당한다. 약속하실 때, 소망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른 뼈들을 주께 가져가라. 지친 마음을, 깨어진 꿈을, 식어버린 사랑을, 짐에 눌린 가정을, 낙심한 혼을 그분께 가져가라. 그분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내 영을 너희 안에 두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 위에 숨을 불어넣으실 때, 그 골짜기는 군대로 변한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마른 뼈 같은 인생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부흥의 하나님이시다.

 

수요설교

벨리알의 아들들이 되지 말라

조도희 담임목사
사무엘상 2장 12절-17절
본문 말씀
12 한편 엘리의 아들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라, 그들은 주를 알지 못하더라.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이 이러하니, 어떤 사람이 희생제를 드리면 고기가 삶아지는 동안 제사장의 종이 세 살 갈고리를 손에 들고 와서 14 그것을 철판이나 들통, 가마솥이나 솥 안으로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모두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더라. 그들이 실로에서 그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 그렇게 행하더라. 15 또한 그들이 기름을 태우기 전에 제사장의 종이 와서 제사드리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제사장을 위하여 구울 고기를 달라.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고기를 원하신다.” 하였으며, 16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종에게 말하기를 “사람들로 기름을 반드시 지금 태우도록 하고, 그 다음에 네 혼이 원하는 만큼 가져가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아니라. 당장 그것을 내게 달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강제로 빼앗아 가리라.” 하더라. 17 그러므로 이 젊은이들의 죄가 주 앞에 심히 컸으니, 이는 그들이 주께 드리는 제물을 멸시함이라.

사무엘상 2장은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한편에는 성막 안에서 섬기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엘리의 아들들이 있고(12), 다른 한편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주 앞에서 자라가는 사무엘이 있다(26). 문제는 위치가 아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이었지만 주를 알지 못하였다”(삼상 2:12). 성경은 그들을 향하여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제 엘리의 아들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라. 그들이 주를 알지 못하더라”(삼상 2:12)

벨리알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무가치하며 불법을 따르는 성향을 가리킨다(13:13, 고후 6:15). 히브리어 벨리알(Belial)은 무가치함, 악함, 불법, 멍에를 거부함(반역)을 의미한다. 어원적으로는 beli(없음) + ya‘al(유익, 가치) 쓸모없는 자”, “가치 없는 자라는 의미로서 벨리알의 아들들은 직역하면 무가치한 자들의 자식들또는 악과 반역의 성향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이 된다.

벨리알의 아들들은 우상숭배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 하나님에게서 백성을 떠나게 만드는 자들이다. “벨리알의 자식들인 어떤 사람들이 너희 가운데서 나가 그들의 성읍의 거민들을 끌어내서 말하기를 우리가 가서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기자.’ 한다. ” 하거든”(13:13)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벨리알의 자식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그를 멸시하여 그에게 아무 예물도 가져오지 않더라.”(삼상10:27) 신약에서는 벨리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성향까지 포함한다.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어찌 조화를 이루며 또한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떤 부분을 같이하겠느냐?”(고후6:15)

종교적 외형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다. 주를 알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고, 하나님을 무시하면 죄와 멸망의 길로 간다.

 

벨리알의 아들들이 되지 말라. 벨리알의 아들들은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무시한다(1217).

하나님을 무시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를 무시한다. 엘리의 아들들은 성막의 법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제사 규례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말씀보다 자기 욕심을 앞세웠다. 제물을 삶기도 전에 갈고리를 넣어 고기를 가져가고, 기름을 태우기도 전에 먼저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였다. 레위기 7:2934에 따르면 제사장의 몫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을 거부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무시하는 모습은 종교적 형태 안에서 나타난다. 말씀보다 전통을 우선한다. 순종보다 조직을 우선한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권위를 더 두려워한다. 교회 조직에 대한 충성이 하나님 충성으로 대체된다. 주를 안다고 하면서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면 이미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복종하는 것이 희생제물보다 낫고”(삼상 15:22)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또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치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15:89)

하나님을 무시하여 주께 드리는 경배를 멸시한다(17). “그러므로 이 젊은이들의 죄가 주 앞에 심히 컸으니, 이는 그들이 주께 드리는 제물을 멸시함이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결국 경배를 멸시하게 된다. 그들에게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헌신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악에서 떠난다.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다.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사람의 호감을 사는 사람인가? 나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가, 습관으로 드리는가? 하나님을 무시하면 결국 경배가 형식이 된다.

하나님을 무시하면 결국 죄에 빠지고 책망에도 돌이키지 않는다. 엘리의 아들들은 단지 제물 문제만 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막 문에서 섬기는 여인들과 음행하였다 엘리가 심히 늙었는데, 그가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중의 성막 문에 모인 여인들과 동침했다는 것을 듣고”(22). 하나님을 가볍게 여긴 결과 삶의 경계선이 무너졌다. 죄의 무서움은 한 번의 실패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마음에 있다. “그래도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음성에 경청하지 아니하였으니”(25)

사울과 다윗은 둘 다 죄를 지었으나 차이는 회개에서 드러났다. 다윗은 내가 주를 거역하여 죄를 지었노라.”(삼하 12:13)고 진심으로 뉘우쳤다. 그러나 사울은 입술로 고백하였으나 마음은 돌이키지 않았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께 청하오니, 내 백성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존중해 주시고 또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주 당신의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소서.(삼상 15:2430)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은 죄보다 죄가 드러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그러나 주를 아는 사람은 죄를 미워하고 돌이킨다.

 

벨리알의 아들들이 되지 말라. 벨리알의 아들들은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벨리알의 아들들이 된 원인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높였기 때문이다(2236).

엘리에게는 영적 권위를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엘리는 아들들의 잘못을 알았지만 책망도 했지만 심판하지는 않았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희생제물과 내 제물을 차 버리며, 네 자식들을 나보다 더 높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모든 제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 자신을 살찌우느냐?“(2930) 네가 어찌하여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귀히 여기느냐?”고 말씀하신다. 엘리의 죄는 자녀의 죄 자체가 아니라 죄를 방치한 것이었다. “내가 엘리의 집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을 그 날에 그에게 행하리니, 내가 시작하면 또한 끝을 내리라. 그가 알고 있는 죄악으로 인하여 그의 집을 영원히 심판하리라고 내가 그에게 말하였나니, 이는 그의 아들들이 스스로를 더럽혔으나 그가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음이라.”(삼상 3:12-13)

사랑은 방임이 아니다. 권위 없는 양육은 자녀를 망친다. 죄를 방치하는 영적 지도력은 교회를 병들게 한다. 영적 지도자의 역할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죄를 책망하며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견책하고 책망하며 권고하라.”(딤후 4:2) 죄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벨리알의 아들들이 되지 말라. 벨리알의 아들들은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주를 아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라간다.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면서 주와 사람들에게 모두 사랑을 받더라.”(26).

엘리의 아들들 이야기 사이에 성령께서는 사무엘을 보여 주신다. 벨리알의 길과 사무엘의 길은 다르다. 주를 아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주를 아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행하는 것이다. 주를 아는 것은 계속 자라가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정체되지 않는다.

 

엘리의 아들들은 성막 가까이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몰랐다. 사무엘은 어린아이였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라갔다. 주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말씀에 순종한다. 죄를 미워한다. 그리고 계속 자라간다. 그러나 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고 벨리알의 길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오늘 다시 주를 두려워하고, 말씀 앞에 서며, 사무엘처럼 주 앞에서 자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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