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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 주보
제 435 호 2026년 5월 17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기도의 자세 - 야곱의 생존법
강태영 | 창세기 32장
오전설교
믿음에 선한 옛 길을 잊지 말라
손을권 | 예레미야 6장 16절
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용기
조경재 | 여호수아 14장 6절–14절
수요설교
잘 마치는 삶
조도희 담임목사 | 열왕기상 2장 1절-4절
오전성경공부

기도의 자세 - 야곱의 생존법

강태영
창세기 32장

창세기 32장에 유명한 사건이 하나 나온다. 바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승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야곱은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또한 자신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된다.

야곱은 태어났을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은 자, 찬탈자라 불린다.

야곱은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죽 한 그릇에 팔아 사게 되고(25:29~34) 자신의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이 받아야 할 복을 가로채게 된다.(27:1~40)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아버지 이삭이 죽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날에 야곱을 죽이리라 마음먹게 된다.(27:41)

이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의 어머니 리브카가 형의 화가 풀릴 때까지 자신의 오라비 라반의 집으로 도피할 것을 말한다.(27:42~45)

야곱은 에서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친족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돌아가고자 한다.(31:13) 

32장은 그 여정을 다루고 있다. 32장 야곱의 여정과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와 영적인 교훈을 공부하도록 하겠다.


야곱은 자신의 친족의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형 에서의 의중을 떠보고자, 알아보고자 심부름꾼들을 보낸다.

여기서 4절에 보면 당신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더불어 기거하며 거기에서 지금까지 머물렀나이다.

기거라는 말이 있다.

야곱이 라반의 땅에 기거하러 갔는가?

이것은 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좋은 말만 하는 것이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 기거가 아니라 도피를 한 것이다.

야곱은 심부름꾼을 통해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온다는 말에 몹시 두려워하여 나름의 계획을 세운다.

두 무리를 나누어 만약에 형이 한쪽을 치면 나머지는 도망하는 계획을 세웠다.

근데 거기서 계획이 끝이 아니라 한 번 더 (육신적) 기질을 발휘하는데 총 3부분으로 나누어 최전방은 자신의 두 여종과 그 자식들, 그 다음 전방은 자신이 덜 사랑하는 레아와 그녀의 자식들, 맨 후방은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요셉을 배치하였다.

전방 배치한 인원들은 총알받이이다.

형이 혹시나 최전방을 치면 본인은 도망하겠다는 생각이고 더 나아가는 레아까지 총알받이로 쓰겠다는 것이다.

야곱은 머리가 잘 돌아간다.

야곱의 처신은 육신적인 계획은 다 세우고 나서 마지막에 기도했다.

이것을 통해 배울수 있는 영적인 교훈은 이것은 성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과 대조되는 사람이 있다.

왕이 내게 말하기를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기에 내가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느헤미야 2:4)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 긴장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다음에 왕에게 대답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위기가 닥쳐왔다 하더라도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먼저 그분을 찾고 신뢰하는 성도를 도우신다.

야곱의 이런 행보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전형이다.

육신의 본질은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기 이전에 자신의 육신적 계획을 실행한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정답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는다.

야곱은 육신의 계획을 다 세워둔 다음에야 기도한다. (32:9~12)

 

9 야곱이 말하기를 오 내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네 고향 네 친족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를 잘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모든 진리의 가장 작은 것이라도 받을 가치가 없사온데,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으나, 지금은 두 무리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나의 형 에서의 손에서 나를 구하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혹 그가 와서 나와 처자들을 칠까 함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선을 베풀어, 네 씨가 많아서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 같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더라.

 

이제서야 하나님께 그분의 약속을 상기시켜 드린다.

자신의 불의함과 무가치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베푸심에 감사했다.

이것은 본받아야 할 기도의 좋은 자세이다.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고 지혜가 있고 부족함이 없다 생각한다면 왜 기도하겠는가?

자신의 불의함과 무가치함을 말씀드리며 기도하는 것은 정직하고 올바르게 기도한 것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모든 진리의 가장 작은 것이라도 받을 가치가 없사온데..." 10절의 야곱이 고백을 잘 한 것이다.
숨김없이 마음 그대로 쏟으며 기도한다.

이것이 정직한 기도이다.

야곱의 순서는 잘못됐지만 이 기도의 자세는 본받아야 한다.

야곱의 목적 바로 에서의 손에서 구해 달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을 상기시켜 드리고 자신은 무능력하며 무가치한 존재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높여 드리고 그 다음 간구를 했다.

하지만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지 않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나중에 가서야 하나님을 붙잡고 매달려야 했다.

야곱은 이렇게 기도하고도 불안해서 또 뇌물을 보내어 형의 화를 누그러뜨리려는 육신의 계획을 신뢰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은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결코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성도는 확신이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4:6, 7)

야곱은 선물을 먼저 보내고 그날 밤 아내들과 자식들을 얍복 여울을 건너게 했다.
그러나 야곱만은 여전히 북쪽에 남아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야곱이 하나님과 겨룬 지역이 브니엘이란 지역인데 이곳은 얍복강 북쪽을 지칭한다.
아내와 자식들은 건너보내고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다.
건너지 않은 것이다.
결국 다 에서에게 앞서 보내고 본인은 뒤로 혼자 빠져있는 것이다.
야곱의 비겁하고 연약한 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24 야곱이 홀로 남았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서 야곱과 날이 샐 때까지 맞붙어 싸우다가,

우리는 이 어떤 사람이 주의 천사임을 알 수 있다.

주의 천사는 하나님이시다.

천사는 왕하 19:35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앗시리아 대군 185천명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야곱은 하나님과 실제적인 씨름을 했다고 볼 수 없다.
야곱은 그 천사에게 매달려 기도, 간구 한 것이다.
야곱은 날이 샐 때까지 주님께 매달리며 어떻게든 주님의 축복을 간구하고 있다.
이는 야곱의 현재상태가 에서에 의해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주님께로 부터 축복을 받으면 그런 위기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25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을 치니,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이 그와 싸울 때에 위골되었더라.

안 그래도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자 매달리던 야곱은 자신의 넓적다리 우묵한 곳이 위골되는 고통을 겪자 더욱 죽기 살기로 매달리고 있다.
주님께 간구하는 것 외에는 별도리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런 야곱을 모른체하시면서 그냥 지나가시고자 하셨다.
야곱이 주님을 계속 붙잡자 야곱의 넓적다리 우묵한 곳을 쳐서 위골되게 하셨다.
위골은 뼈 속에 있던 힘줄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이 증상은 엄청난 고통을 유발시킨다.

그래서 야곱은 다리를 절뚝거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됐다.
그런데 어차피 축복하실 거 왜 이렇게 하셨는가?
주님께서는 야곱이 자신의 육신적인 계획과 생각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그의 육신을 치신 것이다.
야곱은 에서의 위협으로부터 나름대로 대처 할 36계 줄행랑 계획을 이미 세워두었다.
야곱은 속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지 않거나 문제가 생기면 적어도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이 위골된 이상 야곱은 비상시에 에서로 부터 도망칠 수도 없게 되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고서는 더이상 인생의 위기를 돌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복주시지 않는다면 도망칠 수도 없고 여지없이 죽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하나님께만 매달릴 수 있도록 극한의 상황까지 몰고 가셨다.
이처럼 육신이 위골되고 절뚝거릴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할 수 있다. 육신이 멀쩡하고 의지할 곳도 있다면 절실한 기도는 나오지 않는다.
기도가 응답받지 않을 때 나올 수 있는 신뢰할 자신만의 차선책, 플랜B 들을 하나님께서는 다 포기하게 만드셔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매달리게 하신다.
그럴 때 주님께서 일하실수 있다.
영광을 자신이 가로챌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공로로 돌릴 수 없게 만드신다.
그리스도인들도 때때로 복을 받을 때 까지 무기력한 매달림의 상태까지 가도록 부서져야 한다는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나는 너무 간절하고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빨리 안 주실 때가 있다.
이때 야곱처럼 육신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돌아봐야 한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러한 것 모두 내려놓고 포기하게 하셔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실 목적으로 기다리게 하신다.


26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날이 새니 나로 가게 하라.” 하니, 야곱이 말하기를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확정된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확정된 것이 아니다.
야곱은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축복을 받기 전에 다쳤음에도 여전히 기도로 분투하며 축복을 받으려고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확정을 해주시면 비로소 기도를 멈출 수 있다.
그전까진 계속 기도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야곱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피난길에 올랐을 때 아브라함과의 언약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야곱을 복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벌어진 일로 인해서 야곱을 다룰 필요가 있으셨기 때문에 기도에 바로 응답해 주시지 않으셨다.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정당하게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육신의 아버지를 속여서 복을 찬탈했다.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매달릴 때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 전까지 계속 기도하며 주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어떤 위기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주님께 가장 먼저 달려가서 주님께서 필요를 채워 주시고 해결해 주실 때까지 매달려야 한다.
그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한두 번 기도하고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27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니, 그가 말하기를 야곱이니이다.”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난데없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 질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을 통해 야곱이 이삭을 속여서 에서라고 답한 그 질문을 기억하게 하셨다.
이 질문을 통해서 야곱 자신이 하나님보시기에 얼마나 잘못되었고 불의한 자인지 시인하기 까지 기다리셨다.
야곱은 하나님께 거짓말 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인가 물으셨다면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간구해야 한다.
드디어 야곱은 정직하게 자신을 인정하게 된다.
"야곱이니이다." 이 대답은 결국 자신은 찬탈자 이며 불의한 자라는 것을 고백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이끄신 것이다.
이로써 야곱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진실을 고백하게 되고 그런 후에야 기도응답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쳤던 여러 잘못들과 하나님보시기에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들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계시기 때문에 다 고백해드려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야곱은 자신의 정직한 고백을 아뢴 이후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결코 자신을 감추거나 스스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되게 자신의 상태를 자백하며 육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는 가운데 정직하게 기도해야 한다.


28 그 사람이 말하기를 네 이름이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지 아니할 것이요, 이스라엘이라 불리리라. 이는 네가 통치자로서 하나님과 사람들과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하니,
29 야곱이 그에게 물어 말하기를 내가 간구하오니, 당신의 이름을 말해 주소서.” 하니, 그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며, 거기에서 야곱을 축복하더라.

야곱의 생애는 이름이 바뀌면서 완전히 전환됐다. 더이상 야곱의 과거를 묻지 않으신다. 마침내 이스라엘 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며 축복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씨를 그분의 백성이자 민족으로 확정하신 것이다. 에서의 위협이 완전히 해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창 32장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며 야곱은 하나님에 의해 바로 잡히며 끝까지 간구한대로 응답을 받아 축복을 누리게 됐다. 야곱의 연약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셨다. 복주시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바꿔주셨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으실 이유가 있으시겠는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주님만을 신뢰하며 정직함으로 나아간다면 복을 안주실 이유가 없다. 담대함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에 응답받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오전설교

믿음에 선한 옛 길을 잊지 말라

손을권
예레미야 6장 16절
본문 말씀
16 주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길에 서서 보고 옛 길, 그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 그곳으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들을 위하여 쉼을 얻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그곳으로 걸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은 유다가 멸망 직전 이던 시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624년경부터 활동한 선지자로 바빌론이 예루살렘 함락 전후까지 사역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남유다 왕국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세계 강대국들이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앗시리아는 쇠퇴하고 이집트가 영향력을 회복하려 했고 바빌론이 급부상하던 시기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강대국 사이에 낀 작은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했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외교술과 동맹만 의지했습니다. 겉으로는 국가가 유지되었지만 내부는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죄는 개인 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전체의 부패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멸망 직전에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다시 돌아서라는 하나님의 경고와 회복 초청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교회가 약해시고 성도들의 마음에 평안이 없는 이유는 믿음의 선한 옛길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한 옛길을 잊지 말라. 첫 번째로 길에 서서 보고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길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과거에는 옳고 그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이 진리인지 모호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럽고 각 사람이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니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시대입니다. 새로운 사상, 문화, 유행, 가치관, 정보, 성공, 자기중심의 길, 세속의 길이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길이 맞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새것이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길이 많다고 해서 모두 바른길은 아닙니다. 넓은 것이 반드시 생명의 길은 아닙니다. “사람의 길들은 주의 눈 앞에 있으니, 그가 사람의 모든 길들을 살펴보시느니라.”(5:21),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들이니라.”(14:12) 본문은 먼저 "길에서서 보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가던 길을 멈추어 서라는 뜻입니다. 지금 가던 길을 점검하라는 뜻입니다. 무작정 달려가지 말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영적 분별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의 남왕국은 멸망 직전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빠졌고 도덕은 무너졌고 거짓 선지자의 말을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멸망 직전의 유다왕국에 대해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경이롭고 무서운 일이 그 땅에서 행해지는도다. 선지자들은 거짓되이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그들의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5:30-31)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탐욕에 빠졌고 선지자로부터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거짓되이 행하기 때문이라.”(6:13)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서서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가는 길이 틀렸다고 경고하십니다. 자기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 길 끝이 생명인가 사망인가, 지금 선택이 옳은가 영적 통찰력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열심히 경청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들을 지켜 행하면,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너를 땅의 모든 민족들보다 높게 세우시리라.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경청하면, 이 모든 복들이 네게 임할 것이며 네게 미치리라.”(28:1-2) “그러나 만일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경청하지 아니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들과 그분의 규례들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치리라.”(28:15)

이러한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 속에서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갑니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달려갑니다, 인정받기 위해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남을 따라가기 위해서 열심히 달려갑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것의 끝은 어디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가? 구약에서의 "서서 보라"는 뜻은 심판 전에 주어진 회개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탕자는 먼 나라로 빨리 갔지만 그 길은 멸망의 길이었습니다. 요나는 타시스로 빨리 갔지만 그 길은 불순종의 길이었습니다. 롯은 소돔으로 눈에 보기에 좋은 곳으로 갔지만 그 길은 패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다시 돌이킴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의 대열에 다시 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길에 서서 보고라는 뜻은 복음 안에서의 믿음과 분별입니다. 믿음 안에서의 이러한 분별이 없다면 눈에 보기에 좋은 곳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멸망의 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길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신약은 그 길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14:6)

오늘날 이 시대에서 말하는 길은 더 이상 단순한 도덕적 길이나 규범이 아닙니다. 그 길은 한 인격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이 걸어가신 희생과 고난과 순종하신 십자가의 삶의 방식입니다. “내가 길이요라는 이 말씀은 "길을 가르쳐 주겠다"가 아니라 내가 곧 그 길이다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16:24)

자기 부인이란 자기 욕심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뜻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순종하는 삶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철저한 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순종하셨습니다. 죽음까지 하나님의 뜻에 맡기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편한 길이 아니라 순종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희생의 길입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입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섬겨야 합니다,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고난을 통과하는 길입니다. 오해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핍박이 있을 수도, 외로움도 있을 수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은 실패가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입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감수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죄를 끊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인기 있는 길도, 빠른 길도 아닙니다. 가장 확실한 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좁지만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14:6) 십자가의 길은 패배처럼 보이지만 결국 승리하는 길입니다. 죽음을 통과하여 생명으로 가는 길, 이 길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선한 옛길을 잊지말라. 두 번째로 옛길 선한 길을 물어 찾으라

하나님은 옛길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 찾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옛길은 낡은 길이 아닙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세워놓으신 변하지 않는 진리의 길입니다. 구약에서 옛길은 무엇을 말합니까? 율법과 언약과 명령들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율법은 작게는 십계명, 모세오경 넓게는 성경 전체를 말합니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은 언약들입니다. 또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말씀과 명령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율법과 언약들과 선지자들의 말씀과 명령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물어 찾는다는 것은 율법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언약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선한 옛길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길입니다, 아브라함이 걸었던 믿음의 길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길입니다. 순종의 길입니다. 노아가 걸었던 길입니다, 세상이 비웃어도 말씀대로 방주를 짓는 길입니다. 거룩한 길입니다. 요셉이 걸었던 길입니다, 유혹 앞에서도 죄를 거절하는 길입니다.

구약의 묻고 찾음이 외적 기준 회복이라면 오늘날 이시대의 찾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복음을 통해서 찾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므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를 제일 먼저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한 옛길은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세상 기준이 아니라 성경 기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적용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찾는다라는 것은 진리를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기준이 있습니다. 문화의 기준, 감정의 기준, 경험의 기준, 사회적 흐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찾는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 옳은 가를 알려줍니다. 그중 하나가 영적 분별력인 것입니다. 하나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이니, 그들은 그 말씀을 사용함으로 감각들을 단련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들이라.”(5:14)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모든 일에 말씀 중심으로 합니다. 진리에 민감하고,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세상 흐름을 무조건 따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선택합니다. 마지막 때에 가장 무서운 것은 전쟁만이 아닙니다. 영적 미혹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력한 미혹을 보내시어 거짓말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11-12)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건전한 교리들을 알려주십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딤후 4:3) 건전한 교리는 말씀 중심입니다. 사람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며, 인간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 중심입니다, 건전한 교리는 거룩을 강조합니다. 참된 교리는 죄를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건전한 교리는 십자가 중심입니다. 성경적 교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갑니다, 희생과 고난을 기억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깊이 공부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른 교리입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 죄인가를 알려줍니다. 세상적인 죄를 알려줍니다, “그들은 모든 불의, 음행, 사악, 탐욕, 악의로 가득 찼으며,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하며, 수군거리는 자들이요, 비방하는 자들이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요, 모욕을 주며, 교만하며, 자기 자랑만 하며, 악한 일들을 꾀하는 자들이요, 부모를 거역하며, 몰지각하며, 약속을 저버리며, 무정하며, 화해하지 아니하며, 무자비한 자들이라.”(1:29-31) 성경적인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16:9)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신약적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는 삶입니다. 모든 결정을 말씀 기준으로 합니다, 나아갈 방향들을 말씀으로 설정하며, 삶의 우선순위들을 말씀으로 정해야 합니다. 말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말씀은 자신의 죄를 드러내며, 숨겨진 동기를 드러내고, 마음을 드러냅니다.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말씀을 찾는다라는 것은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또한 말씀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찾아야 하며, 말씀을 찾을 때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은 혼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조명 속에서 이해됩니다, 성령님께서는 깨닫게 하시고, 적용하게 하시고, 확신을 주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그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리라. 그분은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엇이나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요, 또 너희에게 다가올 일들을 알려 주시리라.”(16:13) 성령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신약에서의 선한 옛길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삶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선한 옛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안에서 십자가의 삶으로 끝까지 걸어가는 길입니다. 구약에서는 옛길을 찾으라는 외침이었고, 신약에서는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계시합니다, 구약의 옛길은 율법과 순종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오늘날 신약 시대에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길입니다.(2:20, 고전 15:1-3)

 

믿음의 선한 옛길을 잊지말라. 세 번째는 보고, 찾았다면 그곳으로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찾으라고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로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는 것과 걷는 것은 다릅니다. 길은 알아도 걷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은 들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삶 전체의 방향입니다. 성경에서 걷는다는 표현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며, 삶의 방식, 선택, 습관, 인생 전체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곳으로 걸어가라는 명령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순종의 요구입니다.

구약에서 그곳으로 걸어가라는 것은 율법 중심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계명을 준수하고, 율례와 법도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르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삶의 길이었습니다. 그곳으로 걸어가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구약에서는 공동체적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구약에서는 개인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그 길로 걸어야 했습니다. 사회 정의 실현, 우상숭배 제거, 하나님 중심 국가를 유지해야 하는 공동체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우상숭배를 했고, 불의가 판을 쳤고, 종교는 형식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외쳤습니다, “그곳으로 걸어가라그러나 백성은 거부했습니다, 불순종의 결과는 심판과 멸망과 수치와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정녕, 우리가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도다. 우리가 우리의 하프들을 그곳 가운데 있는 버드나무들에 걸었나니 이는 거기서 우리를 포로로 끌고 간 자들이 우리에게 한 노래를 청하였고 우리를 황폐케 한 자들이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시온의 노래 중 한 곡을 우리에게 부르라.” 함이었더라. 우리가 타국 땅에서 어찌 주의 노래를 부르리요?“(137:1-4)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곳 그길로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진리를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변화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기도해야 하는 줄 압니다, 말씀을 읽고, 회개해야 하며, 용서해야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곳으로 걸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그곳으로 걸어가지 아니하리라.”(6:16) 이것이 멸망의 이유였습니다, 길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순종하지 않아서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의 부족으로 멸망하는도다.”(4:6) 오늘 이 시대에서는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말합니다, 장소도, 방향도 아닌, 인격과의 관계입니다. 어디로 걸어가야 합니까?

오늘날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걸어간다는 것은 매 순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이는 상황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결과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걸어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치관을 따르고 주님의 삶을 본받고 주님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걸어간다는 것은 주님의 제자로서 사는 삶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성령님과 함께 걷는 삶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혼자 걷게 하시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11:28, 30)

성령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힘이 되어 주십니다. 걸어간다는 말씀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 길은 편한 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순종해야 하며 희생과 사랑이 따라야 합니다. 선택의 순간마다 말씀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죄를 단절시키고 거룩함을 따라야 합니다, 작은 죄라도 타협하지 않고 거룩한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용서와 섬김과 희생의 길은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상황이 나빠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신뢰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중간에 멈추지 않고 낙심해도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백성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그곳으로 걸어가지 아니하리라.”(6:16) 아는 것과 걷는 것, 믿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길을 아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길을 찾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용서의 길로 걸어가라, 거룩함의 길로, 믿음의 길로, 좁은 길로 걸어가라. 이러한 옛 선한 길을 찾아 걸어가면 한 가지 약속을 해주십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11:29) 참된 안식은 돈에 있지 않습니다, 명예에도 세상 성공에도 있지 않습니다. 혼의 안식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웃어도 내면은 불안합니다. 많이 가져도 평안이 없고, 높이 올라가도 공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없는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이 있기 때문이며, 진리 안에서만 참된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세상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길에 서서 보고 옛 길, 그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 그곳으로 걸어가라.”(6:16) 이 부분에 한 부분이라도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다시 그 선한 옛길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기도 생활로, 거룩한 삶으로,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있는 십자가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혼의 쉼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후설교

흔들리지 않는 용기

조경재
여호수아 14장 6절–14절
본문 말씀
6 그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오니 크네스인 여푼네의 아들 칼렙이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주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카데스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을 아시나이다. 7 내가 마흔 살이었는데 주의 종 모세가 카데스바네아로부터 그 땅을 탐지하라고 나를 보냈을 때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나이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마음을 녹였으나 나는 온전히 주 나의 하나님을 따랐나이다. 9 모세가 그 날 맹세하여 말하기를 ‘네 발로 밟고 있는 그 땅은 반드시 너와 네 자손의 영원한 유업이 되리니 이는 네가 온전히 주 나의 하나님을 따랐음이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주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래로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동안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십오 년간을 나로 살게 하셨나이다. 이제 보소서, 오늘에 내가 팔십오 세니이다. 11 나는 모세가 그 날 나를 보내었을 때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강건하며 나의 힘이 그때처럼 지금도 강건하여 전쟁을 위하여 나가고 들어올 수 있나이다. 12 그러므로 이제 그 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 산을 나에게 주소서, 거기에는 아낙인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방벽을 둘렀다는 것을 당신도 그 날 들었거니와 만일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주께서 내게 말씀하신 대로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라.”하였더니 13 여호수아가 여푼네의 아들 칼렙을 축복하고 그에게 헤브론을 유업으로 주었더라. 14 그러므로 헤브론이 오늘까지 크네스인 여푼네의 아들 칼렙의 유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음이라.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다. 어린 아이는 무서운 것이 많다. 어른이 되면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그 대상이 달라질 뿐 오히려 더 많은 대상을 두려워한다. 사람의 시선과, 불안정한 미래, 막연한 두려움, 감당해야 하는 무거운 일들, 꼬여버린 인간관계 외에도 성인을 두렵게 만드는 수만 가지 것들이 있다. 병적인 공포를 느끼는 공포증의 대상은 수 십 가지를 넘어가고, 각자 개인적으로 독특하게 두려워하는 대상들을 따지면 이 세상은 공포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기에 대비하고, 저축하고, 준비하고, 가능한 많이 끌어 모으려 한다. 마귀는 이 점을 이용하여 이 세상을 공포와 두려움으로 통제한다. 사람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어 세상의 풍조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마음을 어둡게 한다. 그러므로 마귀에 대항하여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장 가까운 지금,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고 추운 것처럼, 이 세상은 진정한 선과 용기를 찾아 볼 수 없다. 오늘날 만큼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는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때는 없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용기를 가졌던 한 성경의 인물을 통해 그 용기의 근원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우리 또한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 40세에도, 45년이 지난 85세에도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는 용기로 약속된 유업을 쟁취한 믿음의 영웅 칼렙을 통해 우리도 용기와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용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 첫째로 그 용기는 사람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6~8).

칼렙은 정탐꾼으로 카나안 땅을 보았다. 거기서 튼튼한 백성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사는 아낙인들을 보았다. 같이 간 형제들은 그들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들이 그들 앞에 메뚜기와 같이 느껴지는 공포를 느꼈다(13:33). 그러나 칼렙은 오히려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4:9).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면 두렵다. 마치 거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함을 믿는 이는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다수의 편에 속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탐꾼들의 보고는 210으로 나뉘었다. 이 소수의 신실한 보고자들은 다수의 의견에 자신들의 소신을 맞추지 않았다. 자신들이 소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다수의 편에 서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을 걷지 않으면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과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소수로 살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 이 믿음이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을 걷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있음을 확신하는 이는 비록 다수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길을 걸어간다해도 동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 곧 절대적 다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점은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이 어디인가가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어디인가이다.

칼렙은 10명의 정탐꾼에 의해 동요된 모든 회중에게 미움과 배척을 받는 데 두려워하지 않았다.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대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말을 들은 회중이 칼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고 했음에도 그들은 믿음을 철회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별 상관이 없다. 항상 그의 관점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나님의 평가는 무엇인가에 달려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대중을 기쁘게 하려는 순간, 용기를 잃게 된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독특하게 살 수 있는 용기를 잃게 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나, 주를 신뢰하는 자는 누구나 안전하리라.”(잠언29:25)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믿는 자는 사람의 위협과 협박에도, 사람의 조롱과 조소에도 용기를 잃지 않는다. 사람들이 떠나가 홀로 있는다 해도, 거의 모든 이가 자신과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다해도,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 때문에 두렵고, 무섭고 용기를 잃고 있는가? 왠지 그 사람 앞에 서면 작아 보이고 위축되고 용기를 잃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더 능력이 있으시다. 더 크시고 더 두려우시며 더 위대하신 분이다. 그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진정으로 두려운 분을 내가 두려워하고 또 그분을 섬기고 있다면, 그리고 그분이 늘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면 결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용기는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 둘째로 그 용기는 기나긴 고난의 시간으로 흔들리지 않는다(9~11).

지속되는 고난은 사람을 결국 약하게 만든다. 아무리 강한 결심과 감정과 마음도, 오랜 시간 끝에 퇴색되고 약화되고 결국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시간이다. 마치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오랜 고난은 사람의 용기를 잃게 만든다. 대다수의 사람은 이 고난으로 인해 망가지고 소멸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그 고난의 시간에서 유일하게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백성의 열번이나 되는 불평의 결과로 광야의 40년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40년의 시간은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는 시간이었다. 어떤 목적지로 향해 가는 여정도 아니었고, 무언가를 찾는 시간도 아니었으며 땅을 정복하는 기간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순히 소멸, 20세 이상의 모든 이가 죽어 소멸되기 위해 아무 의미없는 방황을 했던 것이다. 고난의 시간이었다. 광야에서 지루한 시간의 흐름은 많은 이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칼렙에게는 이 40년의 방황의 시간도 용기를 잃게 하지 못했다. 45년 뒤의 칼렙의 고백이 그가 40살이었을 때의 고백처럼 얼마나 패기가 있는지 보라. “나는 모세가 그 날 나를 보내었을 때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강건하며 나의 힘이 그때처럼 지금도 강건하여 전쟁을 위하여 나가고 들어올 수 있나이다.” 고난의 시간은 그의 믿음을 꺾지 못했다. 광야에서의 방황이 그의 용기를 잃게 하지 못했다. 그의 열정도, 그의 강건함도, 그의 패기도 그 어떤 것도 빼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긴 고난의 시간에도 용기를 잃지 않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다. 그는 유업을 약속받았다(9).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에 그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이는 마치 이 광야를 방황하는 이들과 같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죽기까지 남은 하루 하루를 더 의미있고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다. 그 너머의 목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생만을 잘 살다가 가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바랄 유업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약속된 유업이 있다. 이 고난의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약속된 유업이 있기에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이생이 전부라면 우리는 매우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가오는 세상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을 통해 이를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우리는 그 믿음을 붙들고 살아가기에 이 생에서의 고난의 시간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다.

고난의 여정을 걷고 있는가? 계속되는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가?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고 있는가? 그래서 용기가 점점 사그라들고 있는가? 성도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대의 시간은 의미없지 않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하루는 결코 헛되지 않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시며, 그분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최상이 아니라, 그분의 관점에서 최상의 때에 일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며 살아가고 있다면 용기를 잃지 말라. 고난의 시간이 길어질 수록, 약속된 유업이 더욱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라.

 

흔들리지 않는 용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으로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 용기는 현실을 초월하며, 환경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12~14).

칼렙은 그 산을 나에게 주소서, 그 산에서 거인을 쫓아낼 수 있나이다고 말한다. 아주 용기가 있는 담대한 고백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객관적인 5가지 문제가 있다. 1. 거기에는 거인이 산다. 일반인이 거인을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격투기에서도 자신보다 높은 체급의 상대와 싸워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2. 그 성읍은 크다. 전투가 매우 광범위하게 벌어질 것이고 장기간의 점령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자칫 큰 희생을 치룸에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할 수 있다. 3. 방벽이 둘려있다.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했던가. 마치 여리코 성이 연상된다. 정복자의 입장에서 견고하게 둘려있는 방벽만큼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4.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40세의 칼렙이 정탐했던 내용에서 그 백성은 튼튼하다고 알 수 있다(13:28). 거인뿐만 아니라 한 명 한 명 상대하기가 녹록지 않다. 5. 이 자신있는 고백을 하는 이의 나이가 85세다. 이 사람보다 더 나이가 많은 이는 여호수아밖에 없다. 다른 모든 이들은 이미 광야에서 쓰러져 죽었다. 백성 가운데 장로로서 고문의 역할을 해야 할 이가, 전쟁에 나가서 싸우고 돌아오겠다고 하니,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는 말도 안되는 것이다. 최고 전성기의 여호수아와 칼렙이 도전해도 힘든 것을 85세의 노인이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니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칼렙의 용기의 근원이 나온다. 그가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악조건에서도 그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지 나온다. “만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주께서 내게 말씀하신 대로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이다.”(12) 그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도 같은 상황에서, 용기를 잃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었다. 초지일관, 칼렙은 이 믿음에서 떠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불가능한 것은 없다. 차지하지 못할 것은 없다. 승리하지 못할 전쟁은 없다. 이 믿음은 사도 바울의 고백과도 유사하다. “내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그의 용기에는 결코 자신의 힘, 능력, 건강, 재산, 지혜, 연륜, 인맥, 자원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의 담대함과 용기는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이것이 전부였다. 이 용기는 바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강건하고 담대하라. 무서워 말고 낙심치 말라. 이는 주 네 하나님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함이라.”(1:9)

현재 용기를 잃고 있는가? 상황이 사면초가이고 빠져나올 길이 보이지 않는가? 나를 지속적으로 두렵게 하는 사람이 있고, 특정한 상황이 되면 용기를 지속적으로 잃고 있는가?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불만족스러운 시간이 지속되는가?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은 셀 수 없다. 모든 것이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든 것을 뒤바꾸고 극복하고 승리케하는 한가지 조건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장 강할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믿을 때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몰려올때, 용기를 잃을 것 같을 때, 이 한 가지 사실 만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수요설교

잘 마치는 삶

조도희 담임목사
열왕기상 2장 1절-4절
본문 말씀
1 이제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자,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당부하여 말하기를 2 “내가 세상의 모든 자들의 길로 가노라. 그러므로 너는 강한 사람이 되고 스스로 남자답게 보이라. 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주 너의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그분의 길에서 행하고, 그분의 규례들과 그분의 계명들과 그분의 명령들과 그분의 증거들을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네가 번영하리니, 네가 어떤 곳으로 돌이키든지 그러하리라. 4 주께서 나에 관하여 말씀하신 그분의 말씀을 계속 지키시리니,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들의 길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들의 마음을 다하고 그들의 혼을 다하여 내 앞에서 진실되이 행하면, (그가 말씀하셨으니,) 이스라엘의 보좌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의 삶에는 위대한 성공들도 있었고 비극적인 실패들도 있었다. 다윗과 골리앗, 다윗과 밧세바, 이 두 장면을 보면, 다윗은 전쟁터에서는 성공했지만 가정에서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부하들과 원수들의 눈에는 위대한 사람으로 서 있었지만, 가족과의 관계에서는 너무나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삶에는 그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는 한 가지 두드러진 사실이 있다.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겪는 가운데서도,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사도행전 13:22).

본문에서 늙은 다윗 왕을 보게 된다. 그는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으며,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 권면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특별히 가정의 영적 머리인 아버지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남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끝까지 잘 마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잘 마치는 삶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는 삶이다. 잘 마치는 삶은 첫 번째, 마지막을 준비하는 삶이다.(1-2).

내가 세상의 모든 자들의 길로 가노라.” 죽음은 확실하다. 우리 가운데 불멸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녀들에게 있어서 구원받은 아버지를 갖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이 죽은 후 어떻게 될지를 두고 불안해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아버지이든 아니든, 반드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당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다윗은다음 세대를 준비시킨다. “당부하여 말하기를”. 아버지들과 그리스도인 남성으로서 우리는 우리 뒤를 따라올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는 자녀들을 위하여 길을 닦아 놓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주의 길들을 가르치고 거룩함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

그 도전은 단순하다. “남자가 되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진짜 남자들이 필요하다. 성경적인 확신을 가진 남자들이 필요하다. 일을 시작하였다면 끝을 보는 남자들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들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과 기준과 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남자들이 필요하다.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는 반대로, 그리고 세상이 홍보하는 것과는 반대로, 아버지는 결코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경건한 남자들을 세워 주시기를 바란다. 남자들이여, 세상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 편에 서기로 결심하고 진정한 남자가 되라.

가족을 부양하라. “만일 누군가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을 부인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나쁜 자니라.”(디모데전서 5:8) 가족을 양육하라. “너희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가정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라. “자기 집안을 잘 다스려서 온전한 위엄으로 자기 자녀들을 순종케 하는 사람이어야 하리라.”(디모데전서 3:4) 가족을 사랑하라. “남편들아, 너희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같이 하라.”(에베소서 5:25) 경건한 삶의 본이 되라.

 

잘 마치는 삶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는 삶이다. 잘 마치는 삶은 두 번째 오늘을 거룩하게 사는 삶이다.(3).

우리는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을 드린 삶, 헌신되고 온전히 바쳐진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당신의 자녀들이 보고 있는 아버지는 바로 그런 사람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남자들이 필요하다. 기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 헌신의 사람, 인격의 사람, 정직함의 사람, 신념의 사람, 원칙의 사람, 목적이 있는 사람,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필요하다.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실제로 삶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직접 보아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이것은 정직함과 헌신을 요구한다.

오늘을 거룩하게 사는 삶은 곧 성실함과 진실함에 대한 부르심이다. 우리가 교회에서의 모습과 집에서의 모습, 쉴 때의 모습과 직장에서의 모습이 같은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현재의 삶이 미래를 결정한다

 

잘 마치는 삶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는 삶이다. 잘 마치는 삶은 세 번째, 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삶이다.(4).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남겨 주고 싶었던 몇 가지가 있었다. 기념비를 남기는 삶을 남기고 싶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 했다. 경건한 자녀들은 경건한 부모들의 기념비이다. 나는 이 세상에 어떤 자녀들을 남기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의 자녀들 안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드러내는 기념비를 세우게 하시고, 다음 세대가 우리의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사역을 이어주는 삶을 남기고 싶었다. 다윗은 솔로몬이 온전히 주를 따른다면 자신의 사역이 자신이 떠난 후에도 계속될 것을 알고 있었다.우리 자녀들의 삶 역시 우리가 세상에서 행한 사역의 증거로, 우리가 떠난 후에도 계속 남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당신은 어떤 유산을 남기고 싶은가? 누가 자기 자녀를 술주정뱅이로 키우고 싶어 하겠는가? 누가 마약 중독자나 반역자나 학대하는 사람이나 위선자로 키우고 싶어 하겠는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왜 그런가? 대개 자녀들은 우리 안에서 보는 모습대로 되어 가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당신이 자녀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도 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에 데려가려 애쓰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했는데도 여전히 반항하며 세상으로 달려가는 경우가 있다. 그들의 선택 때문에 스스로를 지나치게 정죄하지 말라. 계속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때에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신뢰하라.

대부분 사람들의 업적은 무덤가에서 잊혀진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이 세상에 영구적인 흔적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정직함과 신념과 인격을 가진 자녀들을 남긴다면, 우리는 무덤도 시간도 그 어떤 힘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남겨 준 유산을 통해 세상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당신은 스스로 완전히 실패했다고 느낄 수도 있다. 너무 많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지금이 다시 시작하기에 가장 완벽한 시간이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이렇게 말해야 할 때이다. “나는 지금부터 인격과 정직함과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되겠다. 나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하나님을 위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유산을 남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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