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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 주보
제 434 호 2026년 5월 10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설교
안전의 장소
조도희 담임목사 | 여호수아 20장 1절-9절
오후설교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
조도희 담임목사 | 민수기 25장 1절 – 15절
수요설교
용서하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조도희 담임목사 | 마태복음 18장 21절-35절
오전설교

안전의 장소

조도희 담임목사
여호수아 20장 1절-9절
본문 말씀
1 또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내가 모세의 손을 통해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읍들을 너희를 위하여 지정하여 3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그곳으로 도피하게 하라. 그곳들이 피의 보복자로부터 너희의 피난처가 되리라. 4 그 성읍들 중에 하나로 도피하는 자는 그 성문 입구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주장을 고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 안으로 그들에게 데려와 그에게 한 곳을 주어 그로 그들 가운데 거하게 하라. 5 만일 피의 보복자가 그를 추격한다 해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넘겨주지 말지니 이는 그 살인자가 자기 이웃을 불식간에 쳤으며 사전에 그를 미워하지 아니하였음이라. 6 그 살인자가 그 성읍에서 살 것이니 그가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살 것이며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살 것이라. 그후에 그 살인자는 돌아와 자기 고장과 자기 집으로 오리니 그가 도피하여 나왔던 성읍으로 돌아가는 것이라.’하라.” 하시니라. 7 사람들이 납탈리 산지의 갈릴리에 있는 케데스와 에프라임 산지의 세켐과 유다 산지의 헤브론인 키럇아르바를 지정하였더라. 8 또 여리코 동쪽 요단 저편에서는,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위 광야에 있는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에 있는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에 있는 골란을 정하였더라. 9 이것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과 그들 가운데 거하는 타국인을 위하여 지정한 성읍들이니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사람은 누구든지 그곳으로 도피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명제 : 안전한 장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련된, 죄인에게 완전한 구원과 보호를 제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카나안 땅을 차지하고 정복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각 지파는 그들의 유업을 분배받았고, 전반적으로 그 땅의 정복은 완료되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민수기 35:1-34에서 모세에게 주셨던 명령을 그들이 수행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들은 도피성이라 불리는 여섯 개의 성읍을 지정해야 했다. 이 성읍들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라면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었다. 그런 사고에 연루된 사람은 이 여섯 성읍 중 어느 곳으로든 도망하여 안전과 보호를 얻을 수 있었다.

오늘 이 도피성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도피성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구원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그림이다. 이제 이 도피성들이 어떻게 안전의 장소가 되는지를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살펴보자. 구원받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누구든지 안전의 장소가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이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께로 도피하여 구원을 얻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안전한 장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련된, 죄인에게 완전한 구원과 보호를 제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안전한 장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련된, 죄인에게 완전한 구원과 보호를 제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첫 번째, 안전한 장소의 목적은 죄인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함이다(1-3).

이 성읍들은 실수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면, 죽임을 당한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은 그 죽음을 대신 갚을 권리가 있었다(35:19-21). 그런데 주께서는 살인과 과실치사를 분명히 구별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을 경우, 그는 이 여섯 도피성 중 하나로 도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사고였다고 판명되면, 그는 피의 보복자로부터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성읍들은 피난처로 세워졌다.

이 도피성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성읍들이 절박한 상황에서 사람이 도망하여 들어갈 수 있는 장소였던 것처럼, 오늘날 예수는 안전의 장소가 되신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다(3:23, 5:12, 58:3). 첫 번째 사람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나이가 들고 죄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르면, 우리는 항상 죄를 선택한다. 우리는 출생으로도, 행위로도 유죄이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심각하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자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던 것처럼,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도 사형 선고가 내려져 있다. 우리는 모두 피의 보복자에게 쫓기고 있다. 우리는 모두 죽음에게 쫓기고 있다(6:23).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에게 쫓지고 있다. 죽음 이후에는 지옥과 그 모든 고통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9:17).

우리에게는 피난처가 필요하다. 우리의 혼이 안전을 얻기 위해 달려갈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죄인이 도망하여 도움과 소망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곳에는 새로운 삶과 새로운 시작이 있다. 피의 보복자가 결코 손댈 수 없는 장소가 있다.

그곳은 한 사람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종교적 선택지가 아니라, 죄인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보호처이다.

 

안전한 장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련된, 죄인에게 완전한 구원과 보호를 제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두 번째, 안전한 장소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방법으로 마련되었다(1).

이 성읍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이 성읍들은 사람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자는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원하셨다. 그래서 피의 보복자제도를 두셨다. 동시에, 단지 사고로 인해 죄를 범한 자들에게는 자비의 장소가 있다는 것도 가르치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도피성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복음 3:16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떠올려 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를 통한 영원한 구원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생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이 일은 전부 하나님의 역사이다. 사람이 종교를 만들면, 항상 자신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든다. 행위의 체계를 세우고, 자신이 목표로 하는 어떤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책임을 지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 중심에서 제외시키신다. 사람은 단지 믿음으로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신뢰할 뿐이다. 그리고 그 믿음조차도 주께서 주시는 것이다(2:8-9).

이 성읍들은 은혜로 마련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과실치사한 자도 다른 살인자들과 같이 죽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은혜 가운데, 실수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자들이 피난처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그대로 지옥에 보내실 수도 있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유죄이며, 지옥 불 속에서의 정죄 외에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찬양한다. “우리는 모두 양같이 길을 잃어 각자 자기의 길로 돌이켰으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53:6). 예수께서 값을 치르셨기에,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 그분을 통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는 방법에 대해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과정을 시작하신다(6:44; 2:1).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방법을 제공하신다(3:25; 4:12; 14:6).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16:31; 10:13).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들을 지키신다(벧전 1:5; 10:28).

우리 스스로는 이 가운데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천국에 가야 한다면, 우리는 모두 지옥에 이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이 안전한 장소는 인간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준비하신 구원의 길이다.

 

안전한 장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련된, 죄인에게 완전한 구원과 보호를 제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세 번째로, 안전한 장소는 어떤 위험도 없는 완전한 보호의 영역이다(4-6, 9).

과실치사자가 그 성읍에 도착하면, 장로들이 그의 사건을 심문했다. 그리고 그 죽음이 과실치사로 사고였다고 판명되면, 그는 성 안에 거할 수 있는 자리를 얻고 피의 보복자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도피성은 원래라면 반드시 죽었을 사람을 살게 하는 역할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도 이와 같다! 그분만이 인간의 혼에 구원을 확실히 보장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죄인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을 구주로 영접할 때, 그는 즉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다. 그의 죄는 영원히 용서받는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 어떤 다른 신앙 체계도 이런 주장을 할 수 없다! 무엇을 하든지 스스로 구원받으려 한다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갈보리에서의 그의 죽음, 그의 부활, 그리고 그의 흘리신 피를 신뢰한다면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된다. 확실하다! (10:9-10; 10:13; 5:24) 그 사람이 성읍 안에 머무는 한 그는 안전했다. 그는 심판의 날까지, 그리고 대제사장이 살아 있는 동안 그곳에서 살 수 있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과실치사자는 두려움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도 구원을 위해 우리의 혼을 주 예수께 맡길 때 동일하게 보호를 받는다! 도피성 안에 있던 사람과는 달리, 우리는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10:28-2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심판의 날이었다. 이제 그 날은 영원히 지나갔고, 우리는 도피성 안에서 안전하다. 나는 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안에서 안전하다. 그분이 살아 계시는 한 안전한데,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신다(7:25; 1:18)!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인가!

도피성은 그곳으로 도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혼의 필요를 충분히 채우시는 분이시다. 당신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지, 죄의 깊이가 어떠하든지, 마음이 얼마나 완악하든지, 혹은 주께 나아오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이 있든지 간에, 그분은 그 모든 것보다 크신 분이다! 그분은 당신의 혼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분은 결코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신다(6:37). 그분의 능력은 그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 누구도 그것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그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22:17).

하나님께서는 여섯 개의 도피성을 마련하셨다. 요단강 동쪽에 세 곳, 요단강 서쪽에 세 곳이 있었다. 이 성읍들은 어디에 있든지,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과실치사자가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관계없이, 그를 위해 열려 있는 도피성이 있었다.

그 옛 도피성들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모든 사람에게 열려 계신다. 구원의 계획은 단 하나의 조건만을 요구한다.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죄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인정할 수 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당신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죽으셨으며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고 믿을 수 있다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더 이상 피의 보복자를 피해 도망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예수께로 달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성읍들이 온 나라에 골고루 배치되어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용 가능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있었다. 이 성읍들 대부분은 산 위에 세워졌다. 고대 이스라엘의 많은 성읍들은 흰 석회암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햇빛을 받으면 빛나 보였다. 밤에도 달빛 아래에서 잘 보였다. 멀리서도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다. 도피성에 도착하는 사람이 반드시 안전을 얻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길이 항상 열려 있었다. 제사장들은 이 성읍으로 가는 길이 막히지 않도록 항상 정비했다. 장애물이 없도록 유지하여 여행자가 쉽게 갈 수 있게 했다. 성문이 결코 닫히지 않았다.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도피성의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방향이 분명했다. “미클랏(Miklat, ‘피난처라는 뜻)”이라는 히브리어가 적힌 표지판이 세워져 있어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명확히 가리켰다. 그곳에 가는 길을 헷갈릴 이유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구원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도피성처럼,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접근 가능하다. 산 위에 있는 성읍처럼, 그분은 지친 나그네가 볼 수 있도록 드러나 계신다. 그분께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분 쪽에는 아무 장애물이 없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죄 자체가 그분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없다. 길은 이미 열려 있다! 다만, 불신앙과 교만이 스스로 그 길을 막을 뿐이다.

 

피난처를 아는 우리는 길과 울타리로 나아가 그분께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입장과 메시지는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께로 가는 길을 가리켜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을 우리의 복되신 구주께로 인도해야 한다.

 
오후설교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

조도희 담임목사
민수기 25장 1절 – 15절
본문 말씀
1 이스라엘이 싯팀에 거하였는데, 그 백성이 모압의 딸들과 더불어 음행하기 시작하였더라. 2 그들이 자기 신들의 희생제에 백성을 부르니, 그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였더라. 3 이스라엘이 바알프올에게 가담하였으니, 주의 진노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일어나더라. 4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백성의 모든 우두머리들을 잡아다가, 태양을 향하여 주 앞에 그들을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주의 맹렬한 진노가 이스라엘로부터 사라지리라.” 하시니라. 5 모세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각기 바알프올에게 가담하였던 자기 남자들을 죽이라.” 하니라. 6 보라, 이스라엘 자손이 회중의 성막 문 앞에서 울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이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목전에서 한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들에게로 온지라, 7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피느하스가 그것을 보고 회중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8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장막으로 들어가서, 그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었더니, 그 재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멈추었더라. 9 그 재앙으로 죽은 자들이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었기 때문에,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영적, 육적 특권을 누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 약속의 땅을 주셨다. 선지자들을 주셨다. 보호와 공급, 복에 대한 많은 약속을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음에도 완전하지 않았다. 근친상간, 거짓, 배신, 살인은 야곱의 아들들에게서 일상의 일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선하게 행하셨다. 그들이 400년 이상 이집트에서 노예의 삶을 살며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구원자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해방시키셔서 카나안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게 하셨다.

이집트에서 카나안으로 가는 여정 동안, 하나님은 친히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그들이 목마를 때 물을 주셨고, 배고플 때 만나를 주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셨고, 그곳에서 율법을 주셨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여러 번 하나님께 반역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진노를 보내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

마침내 이스라엘이 카나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 땅에 들어가 그곳에 살던 민족들을 쫓아낼 수 있는 기회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그들은 완전하게 순종하지 않았다. , , 심판, 회개의 악순환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큰 성공을 누리기도 했고, 혹독한 심판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본문은 그러한 실패와 심판의 한 장면이다. 이 본문에서 피느하스라는 용감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피느하스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이라고 부르신 인물이다(11). 피느하스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가증스런 죄로 짓밟히는 것을 보고, 행동으로 나아간 사람이었다. 피느하스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공격받을 때 그것을 존중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은 악이 지배하도록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낼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당신의 신실함에 대해 보상하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은 죄의 본질과 대가를 분명히 인식한다(19).

이스라엘은 싯팀이라 불리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1). 이 지역은 요단강 동쪽, 모압 땅에 위치한 곳이다. 모압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 바알에게 드리는 제사에 이스라엘을 초청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 제사에 참여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였더라.”(2), “모압의 딸들과 더불어 음행하기 시작하였더라.”(1), “이스라엘이 바알프올에게 가담하였으니라고 증언한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는 두 가지였다. 첫째, 그들은 모압 여자들, 아마도 신전 창녀들과 성적 죄를 범했다. 둘째, 그들은 거짓 신들에게 우상 숭배함으로써 하나님께 영적 간음을 범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했고,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을 인도하는 힘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도덕적 나침반을 상실했고, 단순히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하나님을 떠나버렸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사탄의 계략이었다. 민수기 24장에서 미디안 왕 발락은 발라암이라는 선지자를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라암이 그 저주를 선언하지 못하게 하셨다. 발라암은 하나님의 백성을 직접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다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요한계시록 2:14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내가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게 발라암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음이라. 그가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거치는 것을 놓게 하며,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고 또 음행하도록 하였느니라.” 발라암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복주시기로 정하셨기 때문에 저주로는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죄의 유혹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게 만들면 그들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생각은 맞았다.

오늘날 이 발라암의 교리는 반복되어 가르쳐지고 있다. 한때 미국, 유럽, 영국, 그리고 다른 많은 지역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존중받았고 개인과 국가의 방향을 인도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와 더불어 이미 지나갔다. 사람들은 하나님이나 그분의 말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 낙태를 옹호하고, 동성애를 지지하며, 죄를 용납하는 문화를 살고 있다. 교회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죄와 함께 춤추는 자들에게는 불같은 진노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한 민족이 은혜를 베푸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죄와 정욕의 거짓 신들을 선택할 때, 그 끝은 오직 심판과 죽음뿐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신속하고도 가혹했다. 하나님은 백성의 모든 우두머리들을 잡아다가 태양을 향하여 주 앞에 그들을 목매어 달라고 명령하셨다(4).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로부터 사라지리라.”고 하셨다(4). 그 형벌은 실제로 집행되었다(5). 그날 24,000명이 죽임을 당했다(9).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죄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죄를 범한 자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 사람이 그리스도 없이 죽으면, 그는 하나님과 그의 복과 영광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채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게 된다. 또한 이 땅에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 대가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 구원받은 이후에도 그 죄의 결과를 몸으로 감당하며 살아간다. 또한 많은 성도들이 과거의 악한 삶에서 비롯된 부끄러운 기억을 마음속에 지닌 채 살아간다. 그 기억을 버리고 싶어도, 죽는 날까지 그것에 시달리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죄의 즐거움에 빠지는 데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른다. 죄와 함께 춤추는 사람은 곧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주인인지를 깨닫게 된다.

수천 명의 남자들이 처형되어 그 시체가 진영 주변 장대에 꽂혀 있다. 바로 그 상황 속으로 시므리가 미디안 여인과 함께 들어온다. 그리고는 분명히 그녀와 음란한 관계를 맺기 위해 자기 장막으로 데려간다. 이것은 수치심도 없고, 하나님이나 사람의 시선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뻔뻔하고 노골적인 죄였다. 이 행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므리의 행동은 죄가 사람의 삶에서 어디까지 진행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죄는 보통 작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커져 결국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순결과 삶을 파괴한다. 아담의 한 가지 범죄가 노아의 홍수의 심판을 몰고 온 것이다. 한때 충격적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충격이 되지 않는다. 부모 세대라면 수치로 여겨 얼굴을 가렸을 일들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지나간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높이 평가하기까지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받아들인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그들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고 얼굴도 붉히지 않았도다. 그러므로 그들은 넘어지는 자들 가운데 넘어질 것이요, 그들이 감찰의 때에 버려지리라. 주가 말하노라.”(8:12) 열심은 감정이 아니라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은 죄에 대해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행동한다(78).

시므리가 코스비를 자기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갈 때, 피느하스라는 사람이 그것을 보았다. 피느하스는 분명 그 행동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즉시 일어나 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시므리의 장막으로 들어가 그 창으로 시므리와 코스비를 꿰뚫어 두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피느하스는 관망하지 않았다. 지연하지 않았다. 타협하지 않았다.

피느하스는 시므리와 코스비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즉각 행동했을 때,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하시던 재앙이 멈추었더라.”고 말한다(8). 한 사람이 옳은 일을 위해 일어섰을 때, 죽음이 멈추었다. 하나님은 피느하스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피느하스가 그들 가운데서 나를 위해 열심을 내어,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나의 진노를 돌이켰으니, 내가 나의 질투심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진멸하지 않았도다.”(11) 피느하스는 주님을 향해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매우 높이 여겼다는 의미다. 그는 그 거룩함이 짓밟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행동으로 대응했다. 그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도 동일한 거룩함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원리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자신의 백성도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피느하스와 같은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사람들의 의견이나 사회의 흐름보다 더 높은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악에 맞서 설 수 있는 사람, 옳은 것을 위해 서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이 더럽혀질 때 그것을 보고 침묵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진지하게 여기고, 거룩한 삶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두를 피느하스와 같은 사람들로 무장시키기를 바란다. 악을 용납하지 않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단호하고 신속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세워 주시기를 바란다. 피느하스의 행동은 이스라엘을 살렸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의 악에 맞서 설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여 교회에 부흥을 보내실 수도 있다. 열심은 내면의 분노가 아니라 외적인 순종으로 증명된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며 그분께 사용된다. “주께서 모세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피느하스가 그들 가운데서 나를 위해 열심을 내어,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나의 진노를 돌이켰으니, 내가 나의 질투심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진멸하지 않았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보라, 내가 그에게 나의 화평의 언약을 주리라. 그와 그 뒤를 잇는 그의 씨가 그것을 가지리니, 곧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이는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열성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라.” 하시니라.”(10-13)

하나님은 피느하스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행한 일을 칭찬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피느하스에게 화평의 언약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2). 그것은 피느하스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이 주어진다는 뜻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일어서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는 인기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큰 은혜를 입게 된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서는 사람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복을 누릴 뿐 아니라, 영원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당신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선다면, 주님은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내가 너로 많은 것들을 다스리도록 하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동참하라.”(25:21)

 

이스라엘과 시므리, 그리고 코스비는 하나님께 범한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 반면에 피느하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옹호했기 때문에 높여졌고 복을 받았다. 당신은 어떤 유산을 남기겠는가? 피느하스처럼 하나님을 위해 열성을 품은 사람으로 기억되겠는가? 아니면 시므리처럼 잘못된 행위로 기억될 사람으로 남겠는가? 그것은 오직 당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언제나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은 당신의 삶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삶을 통해 거두시고자 하는 열매를 거두실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이 되도록 간구하라.


수요설교

용서하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조도희 담임목사
마태복음 18장 21절-35절
본문 말씀
21 그때 베드로가 주께 와서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라고 하니, 2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에게 일곱 번까지라고 말하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고 하노라.

사람이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용서.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는 더 그렇다. 주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형제 간의 문제를 다루시면서, 결국 이 질문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나름대로 관대하게 생각해서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때 주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하라.”

사랑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도와주는 것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 나를 억울하게 만든 사람을 풀어주는 것, 이것은 인간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겠지”, “그 사람은 용서 못 해”, “하나님은 용서해도 나는 못 한다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생각을 정면으로 깨뜨린다. 주님은 단순히 용서하라고만 하지 않으신다.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까지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이 비유를 주신다. 이 비유는 단순한 도덕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책임과, 그리고 용서와 관련된 징계의 원리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용서받은 사람은 반드시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하신다(23-27).

그러므로 천국은 마치 자기 종들과 계산을 하고자 하는 어떤 왕과 같으니라. 그 왕이 계산을 시작하니 일만 달란트 빚진 한 사람을 자기 앞에 데려왔더라. 그러나 그에게는 갚을 것이 없으므로, 그의 주인이 명령하기를, 그 자신과 그의 아내와 자식들과 그의 소유를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하니, 그 종이 왕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하기를 주여, 참아 주소서. 그러면 제가 다 갚겠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러자 그 종의 주인이 그를 가엾게 여겨 풀어 주고 그 빚을 탕감해 주었더라.”

본문은 천국은 어떤 왕과 같으니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왕은 하나님을 나타낸다. 한 종이 등장하는데, 그는 만 달란트를 빚졌다. 이것은 단순한 큰 금액이 아니다. 사실상 절대 갚을 수 없는 금액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의 죄를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존재다. 사람은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르다. 숨겨진 죄, 마음의 죄, 교만, 시기, 미움, 질투 ...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빚이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그래서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 자신과 그의 아내와 자식들과 그의 소유를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25) 이것은 심판의 그림이다. 이것이 죄의 결과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그때 그 종이 엎드려 간청한다. “주여, 참아 주소서. 그러면 제가 다 갚겠나이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주인의 마음이다.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긴다. “그러자 그 종의 주인이 그를 가엾게 여겨”(27) 그 결과 그를 풀어 준다. 빚을 탕감해 준다. 완전한 탕감이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다. 하나님은 먼저 용서하시는 분이다. 은혜는 요구가 아니라 베풂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탕감 받은 자.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다. 어떤 사람이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데 채권자가 와서 이렇게 말한다. “다 없던 것으로 하자그 순간 그 사람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다음 날 자기에게 1만원 빌린 사람을 찾아가서 멱살을 잡는다면? 바로 그 이야기가 지금 본문이다.

 

용서받은 사람은 반드시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주셨다면 용서받은 자는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28-31).

그러나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종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네 빚을 갚으라.’고 하더라. 그러자 그의 동료 종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그에게 간청하며 말하기를 참아 주게. 그러면 내가 다 갚겠네.’라고 하나,그가 들어 주지 않고, 오히려 가서 빚진 것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집어넣더라. 그러므로 그의 동료 종들이 그 일어난 일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 그들의 주인에게 가서 일어났던 일을 모두 말하였더라.” 이제 장면이 바뀐다. 이 종이 나가서 자기 동료를 만난다. 그 동료는 그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졌다. 만 달란트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멱살을 잡고 당장 갚으라고 압박한다. 그리고 감옥에 넣는다. 놀라운 사실은 동료도 그에게 똑같이 말한다. “참아 주게. 그러면 내가 다 갚겠네.”(29) 이 말은 방금 전에 자기가 했던 말이다. 그런데 그는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면서도 무시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는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옥에 집어넣는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고 사람의 잘못은 절대 잊지 않는다. 다른 종들이 이것을 보고 매우 딱하게여긴다(31). 왜인가? 불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은혜가 막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주인에게 보고한다. 여기에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용서하지 않는 태도는 개인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주면 전체에 상처를 준다. 우리의 용서하지 않는 태도는 반드시 드러난다. 그 사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올라간다.

 

용서받은 사람은 반드시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32-35).

그때 그의 주인이 그를 불러서 말하기를 오 너 악한 종아, 네가 나에게 애걸하기에 나는 네가 진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노라. 내가 너를 가엾게 여김같이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냐?’ 하며, 그의 주인이 화가 나서 그 사람이 자기에게 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들에게 넘겨주더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형제 각 사람을 그들의 잘못과 더불어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들에게 그렇게 하시리라.”하시더라.” 이제 결론이다. 그 용서하지 않는 종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하나님의 책망이다. “오 너 악한 종아왜 악한가? 도둑질해서가 아니다. 거짓말해서가 아니다. 용서받았으면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가엾게 여김같이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냐?”(33) 이 말이 핵심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가하신다. 우리가 기준이 아니다. 상대방이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준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은혜는 반드시 흘러가야 한다. 징계는 실재한다. 주인은 분노한다. 그리고 그를 고문하는 자들인 형리들에게 넘긴다.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 반드시 다루신다.

주님은 이렇게 결론 내리신다. “너희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형제 각 사람을 그들의 잘못과 더불어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들에게 그렇게 하시리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받는 징계는 우선 마음이 불편하다. 평안이 없다. 계속 그 생각이 난다. 용서의 문제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영적 문제이고, 징계의 시작이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의무사항이다. 그후 감정은 따라온다. 순종이 먼저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풀어 주겠습니다이 결단이 먼저다.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이 비유는 매우 단순하지만 매우 무겁다. 우리는 만 달란트 빚진 자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 탕감하셨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있는가?”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아직도 여전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계속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불편한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을 생각할 때 불현듯 분노가 올라오는가? 그 사람이 바로 대상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라. “내가 용서합니다라고 고백하라. 반복해서라도 계속 풀어라. 이것이 영적 전쟁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의 감옥에 갇힌다. 하나님의 징계를 부른다. 그러나 용서하면 자유가 온다. 관계가 회복된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된다. 용서받은 사람은 반드시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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