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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 주보
제 433 호 2026년 5월 03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8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1장 24절 ~ 27절
오전설교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
조도희 담임목사 | 창세기 50장 15절-26절
오후설교
하나님의 사람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때
조도희 담임목사 | 사무엘상 27장 1절 – 30장 8절
수요설교
증명된 믿음의 결과
조경재 | 히브리서 11장 4절-7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8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1장 24절 ~ 27절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자기들의 마음의 정욕에 따른 더러움에 내버려 두시어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도록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말로 바꾸어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음이라. 하나님은 영원토록 찬양받으실 분이로다. 아멘.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 내버려 두시어”(24).

26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 내버려 두셨으니

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 내버려 두시어”.

이 표현이 세 번 나온다.

이 세 번의 언급은 주께서 사람의 몸과 혼과 영을 하나씩 포기하시는 것을 보여 준다

첫 번째 내버려두시는 것(24)은 몸에 관한 것이다.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도록 하셨으니”.

26절에서는 혼을 수치스러운 욕정에 내버려두셨다.

감정과 애정의 자리인 혼이 거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28절에서는 버림받은 마음에 내버려두심으로 그들의 영을 포기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히 버리시되, 한 부분씩 내어 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야에서 주께서는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리니, 곧 그들의 생각의 열매라.”(6:19)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실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심판은 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실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일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훈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6:23)

생명의 책망을 듣는 귀는 현명한 자들 가운데 거하느니라.”(15:31)

책망을 받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향해 가는 어리석은 자다.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음이라.”(25)

여기서 사람들이 바꾼 변화는 둘째 큰 계명(“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을 첫째 큰 계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첫째 큰 계명(“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은 뒤로 밀려나게 된다.

둘째 계명을 첫째 계명보다 앞세우면, 결국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것이 된다.

이것이 마귀의 교묘함이다.

하나님 사랑을 무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을 먼저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26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러운 욕정에 내버려 두셨으니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까지도 본래대로 쓰는 것에서 본성을 거역하는 것으로 바꾸었음이라.

27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여자들을 본래대로 쓰는 것에서 벗어나 서로 음욕이 불일 듯하니 남자들이 남자들과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자기 자신들에게 받았느니라.

 

수치스러운 욕정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느니라. ...이런 모든 악한 것은 속에서 나와, 그 사람을 더럽히느니라.”(마가복음 7:20, 23).

더러워진 영이 그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쏟아내고, 몸은 그 악한 것들을 따라 행동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몸도 더럽혀지게 된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 고전6:19)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3:17)

사람의 영은 눈으로 들어오는 것과 귀로 들어오는 것에 의해 더럽혀진다.

 

수치스러운 욕정에 이어지는 본문은 게이 해방게이 자긍심에 대해 다룬다.

세상 전체가 이 성적 타락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움직인다.

 

어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그들은 가증한 짓을 행한 것이니 그들을 반드시 죽일 것이며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으리라.”(레위기 20:13)

 

오전설교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

조도희 담임목사
창세기 50장 15절-26절
본문 말씀
15 요셉의 형들이 자신들의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기를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갚지 않겠느냐.” 하고 16 요셉에게 심부름꾼을 보내며 말하기를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할지니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으나, 내가 이제 네게 청하노니 그들의 허물과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우리가 당신께 청하오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하니, 그들이 요셉에게 말할 때 그가 울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한 가서 요셉의 면전에 엎드려 말하기를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나이까?

요셉의 삶은 시련과 비극의 연속이었다. 요셉은 참으로 힘든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 그는 심각하게 뒤틀린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열 명의 이복형들과 한 명의 이복누이, 그리고 세 명의 계모 밑에서 자랐다. 사실 그의 이모들이 그의 계모들이고, 그의 이복형제들 중 일부는 사촌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계모 중 두 명은 자매였고, 가족 모두가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으니,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요셉은 형제들의 자신을 향한 미움과 잔인함을 견뎌야 했다. 어린 시절에는 노예로 팔려갔다. 강간 미수라는 거짓 고소를 당해 여러 해 동안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 감옥에서 버림받고 잊혀진 채 지내야 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감옥에서 나와 이집트에서 명예와 권세와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결국 그는 형제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사용하셔서 그의 형제들이 회개에 이르도록 하셨다. 또한 요셉은 마침내 그의 아버지와도 재회하게 되었다. 요셉의 삶의 모든 고비와 낮은 자리, 모든 골짜기와 모든 산을 지나오는 동안 한 가지 진리는 변함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 속에서 완전한 계획을 이루어 가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요셉이 인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졌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믿음을 계속해서 보여 준다.

요셉이 그의 지상 생애의 끝에 가까워지면서, 그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졌다. 요셉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몇 가지 행한 중요한 일은 우리도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우리의 시간이 이르렀을 때 아무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될 수 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관계를 정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안식해야 한다.

 

떠나기 전에 관계를 정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안식하라. 과거의 관계를 정리하라(15-19).과거의 상처와 죄를 붙들지 말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관계를 바로잡으라.”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여러 해 전에 자신들이 요셉에게 저질렀던 모든 끔찍한 일들을 떠올린다. 그를 미워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를 노예로 팔아넘긴 일을 기억한다. 그의 죽음을 가장하기 위해 거짓말로 그의 실종을 덮어버렸던 일을 기억한다. 이 모든 일들과 그 밖의 많은 일들을 떠올리며 두려워한다. 이제 아버지가 죽었으니,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 가지 계획을 세운다. 누군가를 요셉에게 보내어 메시지를 전하게 한다. 야곱이 죽기 전에 요셉에게 형제들을 용서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또다시 자기 형제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요셉은 그 말을 듣고 울었다. 요셉의 마음에는 그들의 과거를 붙들고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그들의 죄를 용서했다. 그들의 이런 속임수는 그들이 여전히 동생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요셉은 인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지면서, 깨끗한 양심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누구에게 해를 끼쳤다는 기록도 없고, 누구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기록도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형제들에게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형제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요셉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결국 더 높은 하늘의 법정과 절대 오류가 없는 공의로운 재판장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깨끗한 양심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었고, 그것은 참으로 좋은 죽음의 모습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때가 반드시 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상처를 받을 것이고, 때로는 깊이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지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준 상처를 어떻게 다룰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상처 주는 말과 거친 행동이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릴 때, 우리는 사실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분노하고, 원한을 품고, 복수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길 것인가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적 명령은 용서하고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한 말과 행동을 계속 마음에 짊어지고 다닌다면, 결국 자신만 해치게 된다.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로 결심하라. 요셉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당신은 어떠한가?

 

떠나기 전에 관계를 정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안식하라. 현재의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라(20-21).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을 계획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계획하시어서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을 살도록 구원하시려 하셨으니,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 것들을 양육하리이다.” 하고, 그가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다정하게 말하더라.”

이해되지 않는 삶의 모든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받아들이라.” 요셉은 형제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이 악이 아니었다고 가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히 악한 일이었다. 요셉은 그들의 마음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요셉은 그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길 때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의 의도보다 더 깊이 본 것이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놀라운 일을 하고 계셨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형들보다 크시고, 노예 신분보다 크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학대와 감옥 생활과 상한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죄와 모욕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면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요셉에게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까지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영원한 계획을 이루셨다.

요셉은 약 30년에 걸친 시련과 승리의 시간을 돌아보며, 자기 삶의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요셉은 미움과 배신,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 외로움과 이별이 모두 더 크고 위대한 계획의 일부였음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생에 있는 골짜기와 승리들을 사용하셔서 그의 형제들에게 다가가게 하셨고, 야곱을 격려하셨으며,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로 이끄셨고, 실제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까지 사용하셨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사건들을 통해 요셉의 경우처럼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가능성은 크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겪는 시련과 비극을 통해 민족을 구원하시거나 구속의 계획을 이루시는 일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이 삶을 지나가는 동안, 모든 골짜기와 모든 승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모두 우리의 유익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배후에 계시며, 그 모든 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견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의 뜻과 반대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 가신다는 것을 알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가 인생의 어려운 길을 지나갈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삶이 갑자기 우리를 흔들어 놓을 때,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붙드신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 그분께 나아오라고 초청하신다는 것이다.

 

떠나기 전에 관계를 정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안식하라. 미래의 약속을 붙들라(22-26). “요셉, 곧 그와 그의 아비의 집이 이집트에 거하니 요셉이 일백십 세를 살았더라. 요셉이 에프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킬의 자손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죽으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들을 찾아오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그 땅으로 인도하시리라.” 하고요셉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맹세시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뼈들을 옮겨 가야 하리라.” 하였더라. 그리하여 요셉이 일백십 세가 되어 죽으니 그들이 그에게 향 재료를 넣고, 그를 이집트에서 관에 넣었더라.”

죽음과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붙들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라.”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산 후에, 요셉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왔다. 그때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집트에서 나갈 때 자신의 뼈를 함께 가지고 가겠다고 약속하게 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그의 아버지에게 하신 약속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창세기 46:2-4).

요셉은 하나님께서 언젠가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더 좋은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죽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400년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일으켜 하나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고, 그들이 노예 생활의 땅을 떠날 때 요셉의 뼈가 담긴 오래된 관을 함께 가지고 나왔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확신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휴거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죽기 전에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소망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몸들을 다시 일으키실 날이 올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 그들은 새롭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9-57).

 

요셉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크신 약속들을 붙들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바른 관계의 상태로 떠났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모든 걸음을 인도해 오셨다는 확신 가운데 떠났다. 그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떠났다. 당신이 떠날 그날은 반드시 온다. 당신은 어떻게 떠나겠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바른 관계에 있는가? 하나님의 가족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마땅히 그래야 할 상태인가? 문제가 있다면, 오늘 바로 해결하라.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야 한다.

 

오후설교

하나님의 사람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때

조도희 담임목사
사무엘상 27장 1절 – 30장 8절
본문 말씀
1 다윗이 그의 마음에 말하기를 ‘언젠가는 내가 사울의 손에 멸망하리라.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으로 속히 피하는 것보다 내게 더 나은 것이 없도다. 그러면 사울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경에서 나를 더 찾으려 해도 나로 인하여 절망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그의 손에서 피하리라.’ 하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육백 명과 함께 마옥의 아들 가드 왕 아키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다윗은 십대 시절, 그는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왕궁에 들어가 왕 앞에서 연주하며 섬기는 자가 되었다.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왕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정확하게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무너진다. 왕은 까닭없이 그를 죽이려 한다. 아내와의 관계는 깨졌고 요나단과의 교제는 끊어진다. 모든 지위는 사라지고 결국 그는 도망자가 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했다. 기회가 있었지만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오늘은 다르다. 하나님이 나를 잊은 것 같다. 이제는 원수가 이길 것 같다.” 그 순간, 다윗은 한 가지 결정을 내린다. 그 결정이 그의 인생을 무너뜨린다.

 

마음을 따르면 무너지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회복된다. 잘못된 결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신뢰할 때 시작된다(1).

다윗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는 이전에 자주 그렇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서 받은 조언은 결코 지혜로운 것이 아니었다다윗이 자기 마음과 더불어 생각하기 시작하자마자, 그는 주께서 자신에게 주신 위대한 약속들을 즉시 잊어버렸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사무엘상 16:1, 12-13). 그 약속은 요나단에 의해(삼상 23:17), 아비가일에 의해(삼상 25:30-31), 심지어 사울에 의해서도(삼상 24:20)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자기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자 이 모든 위대한 약속들은 잊혀지고 만다. 더 나아가 다윗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을 완전히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알았어야 했다(135:6; 1:11).

다윗은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자신을 두셨던 생명의 길을 버리기로 선택했다. 그는 필리스티아 땅으로 도망가는 것이 사울 왕에게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의 미래의 왕이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마음이 그를 빠뜨린 문제였다. 자신의 마음에 조언을 구하면, 결국 인간의 본성과 접촉하게 된다. 우리의 옛 본성은 타락했으며 항상 모든 것을 육적인 수준에서 바라본다(5:19-21). 사람들이 나는 마음으로 그렇게 느껴라고 말할 때, 대개는 문제로 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을 신뢰하지 말라고 경고한다(17:9; 28:26; 9:3; 7:21-22). 자신과 대화할 때는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5:19-20; 4:8). 누군가가 네 마음이 말하는 것을 따라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따를 경우 영적인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조언이다. 마음은 나를 속이고, 기만하고, 거짓말하며, 잘못된 길로 이끈다. 마음의 소리를 따른다면, 결국 다윗이 있었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 밖에, 하나님이 두신 자리 밖에, 하나님과의 교제 밖에 서게 될 것이다. 마음을 따르면 결국 영적으로 타협하는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 빠지게 된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내렸고, 그로 인해 길을 잃었다. 매우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따르면 무너지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회복된다. 잘못된 결정의 결과는 삶 전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삶의 관계, 삶의 방식, 그리고 마음의 평안이 모두 무너지는 것이다.

다윗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육백 명과 함께 마옥의 아들 가드 왕 아키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다윗이 가드에서 아키스와 함께 거하였으니, 그와 그의 사람들이 각자 자기 가족과 함께 거하였고, 다윗은 그의 두 아내, 즉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칼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거하더라.”(27:2-3) 다윗이 내린 어리석은 결정 때문에, 그의 삶과 연결된 모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다. 그의 600명의 부하들과 그들의 가족들, 그의 아내들과 자녀들,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결정으로 인해 함께 무너졌다. 단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타협과 시험의 자리로 끌려 들어간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하는 모든 일이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남편이나 아내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그 결혼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부모 중 한 사람 또는 둘 다가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기를 거부하면 자녀들에게 영향을 준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누가 보고 있는지, 혹은 우리가 마음의 조언을 따르고 하나님을 떠날 때 누가 실족하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때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17:1-2).

다윗의 삶의 패턴이 영향을 받았다(27:5-12). “...아키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로 자기를 완전히 혐오하게 만들었으니, 그가 영원히 내 종이 되리라.” 하더라.” 다윗의 결정은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그의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다시 말해, 주님을 떠나기로 한 결정이 그를 완전히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이 비극적인 시기에 대해 성경이 보여주는 몇 가지 사실을 보라. 다윗은 거짓된 안전감 속에서 살았다. “사울은 다윗이 가드로 도망하였다 함을 듣고, 다시는 더 이상 그를 찾지 아니하더라.”(4) 다윗은 자신이 이제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다윗은 잘못된 도움을 구했고(5), 잘못된 무리와 함께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원수와 손을 잡았다. 다윗은 이전에는 결코 하지 않았을 일들을 행했다. 그는 살인을 저질렀고, 거짓말을 했으며, 하나님의 원수에게 자신을 내어주었다. 그의 삶 전체의 구조가 그 한 번의 결정으로 인해 바뀌어 버렸다. 다윗은 그곳에 16개월 동안 머물렀다. 아마도 처음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또한 이 기간 동안 다윗이 기록한 시편이 하나도 없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찬양자가 그의 노래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곧 이전에는 행하지 않았을 일들을 하게 되고, 이전에는 함께하지 않았을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고전 15:33). 그의 삶의 방식 전체가 바뀌고, 정신을 차려 보면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흘러버린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그의 노래는 사라지고, 기쁨은 말라버리게 된다.

당신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을 떠났는데도 당신의 삶에 아무 변화가 없다면, 애초에 당신이 그분께 속한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윗은 사람이 떨어질 수 있는 거의 최저 지점까지 내려갔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고, 하나님의 길을 떠났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다윗은 결코 즐거운 상태가 아니었다. 그의 죄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그의 마음의 평안까지도 무너뜨렸다. 다윗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 필리스티아인들의 군주들이 수백 명씩, 수천 명씩 거느리고 나아갔으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키스와 함께 후미에서 나아가더라. ...”(29:1-5) 그는 필리스티아인들과 연합하여 자기 민족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한다. 그러나 필리스티아인 사람들조차 그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에게도 걸림돌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그는 사실상 나라 없는 사람이 되었다.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드러낸다. “... 다윗이 아키스에게 말하기를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오늘까지 왕과 함께 있는 동안 왕께서는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내 주 왕의 원수들과 싸우러 가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29:6-8). 이스라엘의 미래 왕이 이방 왕 앞에서 비굴하게 엎드려 자신을 그의 종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아키스 왕의 원수들이 곧 자신의 원수라고까지 말한다. 다윗은 마침내 자신이 뿌린 악의 열매를 거둔다. “셋째 날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시클락에 왔을 때, 아말렉인들이 남부와 시클락을 침략하였으니, 그들이 시클락을 쳐서 그곳을 불살랐으며,그곳에 거하는 여자들을 사로잡아갔더라. 그들이 크거나 작거나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끌고서 자기 길을 갔더라. 그리하여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성읍에 오니, 보라, 그 성읍이 불타고 그들의 아내들과 아들들과 딸들이 사로잡혀갔더라. ...”(30:1-5). 다윗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손실을 입는다. 아말렉 사람들이 이전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행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공격해 그의 가족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그의 성읍은 불타버린다

다윗은 결국 바닥에 이른다. 그의 부하들이 그를 죽이려고 돌아선다. 그들은 이 모든 비극이 다윗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죄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이것은 죄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과 잠재력을 보여주는 매우 두려운 그림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길로 갈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는 없다! 지금 하나님을 떠나 저지르려는 그 죄가 그 대가를 치를 만큼 가치가 있는가? 그것이 당신의 배우자보다 더 중요한가? 저지르려 하는 그 죄가 당신의 자녀보다 더 중요한가? 당신의 사역보다 더 중요한가? 당신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가? 하나님과의 능력 있는 관계보다 더 중요한가? 당신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가? 당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가? 하나님을 떠나면서 아무런 결과 없이 지나갈 수 있다고 단 한순간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대가가 있고, 하나님은 그 대가를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거두신다. 이것이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교훈이다(32:23; 13:1-5).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 하나님을 떠나기 전에, 당신이 치르게 될 대가를 반드시 생각하라.

 

마음을 따르면 무너지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회복된다. 무너진 삶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 회복된다.

다윗이 심히 불안해 하였으니, 이는 모든 백성이 각자 자기 아들들과 딸들로 인하여 혼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하였음이라. 그러나 다윗은 주 그의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용기를 얻더라. ...”(30:6-8). 다윗은 주님 앞에 회개했다. 다윗이 마침내 바닥에 이르렀을 때, 사람이 잃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드디어 그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마 그는 주변에 무너진 삶들과 산산이 부서진 현실을 보면서, 이 모든 일이 자기 마음과 나눈 한 번의 어리석은 대화와 그에 따른 한 번의 어리석은 결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제 다윗은 이 모든 사건이 시작될 때 처음부터 했어야 할 일을 한다. 그는 기도로 주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뜻과 도우심을 구한다. 다윗은 다시 한 번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삶에 대한 방향을 듣자, 주저하지 않고 즉시 순종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뜻 안으로 돌아와, 다시 하나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다윗을 통해 배운 대부분의 내용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교훈이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본문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첫 번째 단계는 회개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다루어야 한다(28:13; 51:1-5).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처리하면,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하시고 넘어진 성도를 회복시키신다(요일 1:9). 이것은 큰 복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때때로 죄에 빠지지 않는 성도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면, 오늘이라도 돌아와 완전한 용서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 다윗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주목하라. 다윗은 16개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있었다. 그 후 주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다루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미안하다 다윗아, 너는 선을 넘었다. 내가 다른 왕을 세웠다.”, “3개월 동안 시험 기간을 주겠다. 잘하면 회복을 논의해 보자.”, “용서는 해 주겠지만, 우리 관계는 예전 같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다윗이 올바른 마음으로 부르짖자, 하나님은 즉시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다시 교통하셨다. 하나님의 응답은 신속하고, 확실하며, 정확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물론 우리가 지은 죄에는 이 땅에서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6:7). 그러나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는 즉시, 완전하게, 영원히 용서하신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든지, 아무리 오래 구원받은 삶을 살았든지, 아무리 영적인 사다리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든지 간에,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다. 사람들은 자신이 내린 어리석은 결정들 때문에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있다. 어떤 일들은 이미 진행되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이라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다. 당신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행하라.

 

수요설교

증명된 믿음의 결과

조경재
히브리서 11장 4절-7절
본문 말씀
4 믿음으로 아벨은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의로운 자라고 증거를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을 인정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아직 말하고 있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그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이 증거를 지녔느니라. 6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분이 존재하시는 것과 그분이 자기를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는 분이심을 마땅히 믿어야 하느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고 두려움으로 행하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자기 집안을 구원하였으니,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에 의한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확신이 없이 걷는 길은 막연하다. 이 길로 걸어 갈 때, 원하는 결과를 이룰 수 있을지 확신이 없기에 사람들은 최대한 실패할 확률을 줄이기 위해 결과가 증명된 길로 가고자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각자가 원하는 분야에서 성공을 이룬, 그 증거를 가진 이들을 찾아간다. 수험생들은 수능이나 각종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이들의 방법을 묻는다. 부유해지기 원하는 자들은 뛰어난 성공을 이룬 사업가나, 투자의 귀재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그래서 이미 성공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의 방법을 자신들에게 적용함으로 실패확률을 최대한 줄이려 한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칭찬을 받고, 많은 상과 유업을 받는 것이다. 본문에는 자신들의 삶을 통해 훌륭한 간증을 남긴 성공의 증거들이 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명의 인물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아벨,에녹 그리고 노아.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믿음에 대해 좋은 평판을 받았다는 증거를 지녔다. 이들이 믿음에 대해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었던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말씀을 통해 잘 살펴보고 이를 실천한다면, 우리의 믿음의 삶 또한 하나님께 좋은 평판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믿음으로 나아가지만 더욱 확신 가운데 의심없이 나아갈 수 있다.

 

증명된 믿음의 결과를 보고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경배를 드리고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본문4)

아벨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배를 드린 최초의 인물이었다. 아벨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리는 경배에서 “A”학점을 받은 우수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께 바쳤고,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을 인정하셨다. 아벨은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고 증거를 받았다. 아벨이 바친 것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그가 치던 양무리에서 바친 살진 어린양과 그 피였다. 아벨은 자신의 부모인 아담과 이브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바쳐야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3: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가죽으로 옷들을 만들어 입히셨다(3:21). 죄들을 가리기 위해 생명의 피가 흘려져야만 했던 것이다. 이를 안 아벨은 자신이 치던 양의 피를 하나님께 바쳤다. 그 결과로 아벨은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인정됐다. 그의 믿음은 증명됐고, 그 결과 증거를 얻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에 적용할 수 있다. 아벨이 바친 피는 동물의 피였다. 이는 하나의 모형이었다. 아담과 이브를 옷입히기 위해 흘려진 짐승의 피부터 본문의 아벨의 제사, 유월절 어린양의 피, 율법시대 때 셀 수 없이 많이 흘려진 짐승들의 피는 모두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바로 십자가에서 세상죄를 제거하기 위해 흘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였다. 이 피는 동물의 피와는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하고 영원한 효과를 지닌 보혈이다. “황소와 염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도 불결한 자들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함으로써 거룩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9:13,14)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로 입증되었다면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드리는 경배를 하나님께서 왜 받지 않으시겠는가? 왜 인정하지 않으시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드리는 것이라면 확신을 가져도 된다. 그 경배는 하나님께서 받고 계신다. 이미 아벨을 통해 증명된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카인의 예물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결과는 역시 정해져 있다. 카인은 그 결과를 이미 증명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물도, 그 경배를 드리는 자도 받지 않으신다. 카인은 땅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농부였다. 자신 나름대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보기에 최상의 것들을 바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거부하시자, 그는 매우 분노하고 감히 하나님 앞에 그 안색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카인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이미 저주받은 땅에서 무언가 선한 것을 발굴해보려는 노력이었다. 육신적인 행위였다. 오늘날에도 카인의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오려는 수많은 경배자들이 있다. 자신의 행위와 노력, 전통들과 경건하고 금욕적인 생활, 자기 의, 종교적인 행위 등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아벨은 죽었으나 믿음으로 아직 말하고 있다. 무엇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 자신이 드린 제사의 결과를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혈을 믿고 구원받으라. 날마다 그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라. 그 보혈에 의지하여 경배드리라.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늘 하나님께 나아가라. 그렇다면 당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헛되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것이다.

 

증명된 믿음의 결과는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 둘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나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계시다는 확신을 갖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수많은 성도들이 성경에 나오지만 본문의 에녹은 그 증거를 가진 특별한 인물이었다(5,6).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바로 셋째 하늘로 데려가셨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데, 예수님께서조차 죽음을 경험하셨고, 불병거를 타고 올라간 엘리야도 언젠가 죽음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시키신 사람들도 다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휴거될 성도들을 예표하는 특별한 인물이다. 성도의 소망은 항상 에녹처럼 휴거되는 것이며, 에녹처럼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을 늘 기쁘시게 해드리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들려 올라가는 인생, 정말 최상의 인생이 아닌가! 에녹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을 우리도 가진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있다는 확신과 증거를 얻을 수 있다. 에녹이 가졌던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었고, “그분께서는 자기를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믿음이 아니다. 이 단순한 두 가지 사실을 믿으며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삶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임을 알 수 있다. 성도가 에녹처럼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늘 생각하고 믿으며, 두려워하고, 그분께서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믿으며 열심히 그분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에녹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놓여져 있다. 왜냐하면 에녹은 이따금씩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나 양심의 인도로 하나님과 동행했을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두 귀로 듣는 음성보다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음성보다 더 확실한 말씀을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우리 안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의 형태로 거하고 계시기에 가장 가까이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구약성도들처럼 특정한 상태, 특정한 공간에서 아주 제한된 조건 내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이들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설령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다고 해도 언제든지 어린양의 보혈에 의지해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겠다는 약속까지 주셨다(요일1:7,9).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 하나님의 말씀,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늘 동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선물처럼 우리에게 주셨음을 알 수 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는가? 당신도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 에녹은 자신의 믿음으로 증명했고, 그 결과 증거를 갖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확신을 가져도 된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성도 바로 당신이 죽음을 보지 않고 휴거될 특별한 은혜를 입는 성도가 될 것이다.

 

증명된 믿음의 결과는 확신을 준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7)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다. 앞서 살펴 본 에녹과 같이 노아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다. 그가 하나님께 들은 것은 세상의 물로 인한 심판이었다. 그것은 아직 보지 못한 미래의 일이었음에 분명했다. 노아도, 노아의 먼 조상도 경험해보지 못한, 실로 사람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심판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했다. 믿음이란, 11:1의 정의에 따르면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미래의 일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노아는 말씀에 두려움으로 떨었고, 순종하여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에 착실히 순종했다. 심판을 대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업을 완수했다. 마침내 방주가 완성되고, 온 세상은 물로 인한 심판으로 멸망했지만, 방주에 타고 있었던 노아를 포함한 여덟 혼은 구원받았다.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었을 때 받았던 세상의 조롱소리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비를 보지 못한 세상에서 물로 인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거대한 배를 짓는 노아에게 세상은 굉장한 조소와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노아는 미쳤다고, 광신자라고 숱하게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결국 방주를 완성했다. 노아와 그의 가족만이 하나님의 경고에 두려움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두려워했고, 그 결과 구원받았다. 노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보지 못한 일들일지라도, 미래의 일일지라도, 상식적으로 믿기 힘들지라도 이루어진다는 증거를 가진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에는 믿음으로 만들었지만 실제로 대홍수가 일어나 구원받았을 때 노아의 믿음은 증명되었고 그 결과를 오늘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노아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믿음은 그가 의의 상속자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의 믿음 또한 노아의 믿음과 유사하다. 우리 또한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두려워하고, 그 일들을 실제로 가져와 할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미래에 있을 일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가올 일들에 대한 경고를 주셨다. 세상은 사라질 것이며, 모든 것은 썩을 것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죄인은 지옥으로 던져저 영원히 불탈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다. 장차 일어날 휴거와 대환란, 재림, 그리스도의 심판석, 어린양의 혼인식, 천년왕국, 온 우주적인 불심판, 새 하늘들과 새 땅에 대한 아직 보지 못한일들을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고 있다. 우리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경고를 두 귀로 들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욱 우월한 것이 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헷갈리지도, 마음과 감정상태에 따라 흔들리지도 않고, 영원히 기록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기록으로 말씀하시기에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노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는 이뤄졌다. 예언은 성취되었다. 노아는 이전에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사례를 알지 못했음에도 믿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성경에 이미 이뤄진 예언의 말씀들을 찾아볼 수 있다. 노아의 홍수를 포함하여 예수님의 초림, 공생애, 죽으심, 부활하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옴, 재림의 징후들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 이 세상의 악함이 노아의 날들이나 롯의 날들과 같아지는 것 등 성취된 예언의 데이터는 더욱 많아지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본다면 보지 못한 미래의 것이라도 이뤄질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이 결코 노아의 믿음보다 뒤쳐질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세상은 믿음을 가진 이들을 여전히 조롱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왜 섬기냐고, 왜 일요일마다 그 귀한 시간에 꼬박꼬박 교회에 가느냐고, 왜 증명할 수도 없는 신을 믿는데 당신의 인생을 다 거느냐고, 그냥 적당히 교양인으로 믿으면 안되느냐고 비아냥거리고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임을 기억하라! 결코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실체가 있는것, 증명될 수 있는 것, “진짜로 존재하는 대상을 믿고 있음이 확실하다!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의로워졌는가? 하나님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근거로 나아가 경배드리는 경배자인가? 하나님과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고 있는가? 그분과 동행하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언된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다! 이미 그 믿음은 증명된 결과를 가지고 있다. 그 믿음을 따르는 당신의 결과 또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보상과 상속을 받을 것이다!

곧 부산성경침례교회의 모든 성도들과 그들이 하나님께로 이겨온 혼들이 동시에 사라졌다는 실종경보문자가 모든 부산시민들의 핸드폰에 동시다발적으로 울릴 것이다. 그날이 반드시 다가올 것이며,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위로 올라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동행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니,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공동상속자가 될 것이다. , 이런 영광스러운 미래를 향해 더욱 확신이 찬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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