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에는 풍성하지만 은혜에는 빈곤한 교회가 있다. 사람들을 중심으로 분열되고, 영적 은사들을 두고 다투고 있으며, 부도덕을 용납하고 있었고, 서로를 법정으로 끌고 가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하고, 심지어 주의 만찬에서도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교회다. 바로 고린도 교회인데 그들은 은사에는 풍성했지만 은혜에는 빈곤했다.
은사들을 다루는 12장, 13장, 14장 본문의 12장의 끝에서 바울은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교사들과 기적들과 병 고치는 은사들과 방언들과 그 밖의 영적 은사들을 다룬 후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더 좋은 길을 보여 주리라.”(고전 12:31) 그 “더 좋은 길”이 바로 사랑의 길이다.
바울이 묘사하는 사랑은 단순한 애정이나 낭만적인 끌림이나 자연적인 우정이 아니다. 이 사랑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단지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 안에서 맺어지는 사랑이다. 교회는 세워져야 하고 성숙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은 은사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은 은사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사랑은 모든 영적 은사와 섬김보다 우선한다(1–3절).
말을 잘 할 수 있는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무익하다. 놀라운 의사소통 능력, 유창한 달변, 탁월한 전달 능력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단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리 내는 놋”과 “시끄러운 꽹과리”는 금속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로, 소리는 클 수 있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영적인 가치가 없다. 설교자가 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교사가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적절한 말을 정확하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들 뒤에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감동받지 않으신다.
영적인 깨달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무익하다. “내가 예언의 은사가 있어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놀라운 신학적 이해력을 가지고 있고, 어려운 교리들을 설명하고 복잡한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어도 거기에 사랑이 없다면 그 지식은 거룩함 대신 교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고린도전서 8:1) 지식만으로는 자신의 자아를 자랑할 수 있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세워 준다.
놀라운 믿음조차 사랑이 없다면 무익하다.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놀라운 믿음이라 할지라도 사랑과 분리되어 있다면 그 사람을 영적으로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 내가 내 모든 소유를 주어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처분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분명 그런 행동이라면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관대함조차도 교만에서 나올 수 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다면, 말의 능력도 공허하다. 지식도 공허하다. 믿음도 공허하다. 관대함도 공허하다. 희생도 공허하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소음이 “되고,”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내게 “아무 유익도 없다.” 교회가 아름다운 시설을 갖추고 있을 수 있다. 훌륭한 음악, 건전한 설교, 잘 조직된 사역들, 은사 있는 일꾼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그 교회는 차갑고, 경쟁적이며, 비판적이고, 용서하지 않는 교회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왜 섬기는가? 나는 왜 가르치는가? 나는 왜 설교하는가? 나는 왜 드리는가? 나는 왜 어떤 사람을 권면하려고 하는가? 나는 진정으로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은 은사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닮은 행동과 태도로 나타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4–7절)
사랑은 오래 참는다. 성급하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사람을 대할 때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흔히 자신이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인내심을 시험받기 전까지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실수와 미성숙함을 받아 주며,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도록 여지를 준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향하여 바로 이런 종류의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셨다. 베드로는 주께서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라고 기록한다(벧후 3:9).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속하게 우리를 다루셨다면, 우리 가운데 아무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은 친절하다. 사랑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참는 것만이 아니다. 사랑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할 기회를 찾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말하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는 것을 더 즐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24–26에서 주의 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의 종은 다투어서는 아니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고, 잘 참으며 반대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바르게 잡아 주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진리를 깨닫도록 하실까 함이요 마귀의 뜻대로 그에게 사로잡혔던 그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깨어 나올까 함이라.”
사랑은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사랑이 하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시기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받은 복을 보고 불쾌해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는다.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교만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사랑은 수치스럽거나 무례하거나 불명예스럽게 행동하지 않는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이것은 아마 우리의 마음을 가장 깊이 살피게 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렇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나에게 편리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사랑은 이렇게 묻는다. “무엇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사랑은 화평하다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어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장전된 총과 같이 살아간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무엇이 다음번 폭발을 일으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사랑은 개인적인 보복을 하지 않는다.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나중에 복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들을 계속해서 장부에 기록해 두기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한 죄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필요한 경우 책망과 회개와 화해와 교회 징계와 정의를 명령한다. 그러나 사랑은 나중에 상대방을 공격할 탄약으로 사용하기 위해 잘못들을 간직해 두지 않는다.
사랑은 진리를 사랑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성경적인 사랑은 결코 죄를 감상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뻐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사랑이 넘치는 행동이 어려운 진리를 은혜롭게 말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끝까지 견딘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 사람들이 친절하고, 감사하며, 우리와 뜻이 맞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때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사랑의 진정한 시험은 누군가가 우리를 짜증 나게 하고, 실망시키고, 오해하고, 불편하게 만들 때 찾아온다. 다리 위에 무거운 하중을 올려놓을 때 그 다리가 얼마나 튼튼한지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관계에 압력이 가해질 때 우리는 자신이 가진 사랑의 질이 어떠한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친절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감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셨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대한 기준은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와 직접 마주 서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은 은사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사랑은 모든 일시적인 은사보다 오래 지속되며 가장 위대하다.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아니하나 예언들이라도 끝이 올 것이요, 방언들이라도 그치게 될 것이며 지식도 끝나게 되리라. 이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또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온전한 것이 오면 그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끝날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어린아이같이 말하고 어린아이같이 이해하며 어린아이같이 생각하였으나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어린아이의 일들을 버렸노라. 지금은 우리가 유리를 통해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처럼 알게 되리라.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으나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니라.”(8–13절)
예언은 끝난다. 방언은 그친다. 지식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부분적인 상태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또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어린아이와 거울이라는 두 그림으로 설명한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면 어린 시절의 것들을 내려놓는다. 희미한 거울로 보던 사람이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참되지만 부분적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선명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은사들은 사라지지만 사랑은 남는다.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으나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니라.”(13)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한다.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 그리고 사랑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갈보리에서 나타났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롬 5:8) 그 사랑의 가장 위대한 표현은 단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정의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견된다. 갈보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나는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오래 참는가? 다른 사람이 복을 받을 때 함께 기뻐하는가? 내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는가? 쉽게 성내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마음속 장부에 기록해 두고 있지는 않은가? 진리를 말할 만큼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은혜롭게 말할 만큼 사람을 사랑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보여 주는 가장 위대한 증거는 얼마나 많이 아는가도 아니고, 얼마나 큰 은사를 가졌는가도 아니며, 얼마나 눈에 띄게 섬기는가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데서 나타난다.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으나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