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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제 454 호 2026년 9월 27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강해 27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5장
오전설교
시작부터 끝까지 이루시는 구원
조도희 담임목사 | 요한복음 6:37-40
오후설교
더 좋은 길
조도희 담임목사 | 고린도전서 13:1-13
수요설교
하나님의 용광로를 기쁨으로 통과하라.
조도희 담임목사 | 에스겔 22:18-22
오전성경공부

로마서강해 27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5장

I. 칭의(의롭게 됨)의 복들 (5:1-11)

칭의란 하나님께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의롭게 됨은 전가된 의다.

반면 성화는 나의 삶 속에서 성령을 통해 실제로 나타나는 의다.

⑴칭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신분(standing)을 말한다.

⑵성화는 이 땅에서 나타나는 나의 상태(state)를 말한다.

 

1. 우리는 화평을 갖는다(1절).

한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다(1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가진다.

2.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2절).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고 정죄 상태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신분을 가진다.

3. 우리는 소망을 가진다(2절).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즐거워하고 자랑한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얻었다고 자랑할 수는 없다(엡 2:8-9).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구원을 자랑할 수 있다.

이것은 복된 소망이다.

4.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도 확신을 가진다 (3-4).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

참된 그리스도인은 미래의 소망뿐 아니라 현재의 시련 속에서도 확신을 가진다.

5.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다 (5-11).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준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나타내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받았고 (9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도 구원받는다 (10절).

즉,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에서 역사한다(빌립보서 3:10).

우리는 “화해”를 받았고(11절),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 삶에서 경험한다.

 

II. 칭의(의롭게 됨)의 근거 (5:12-21)

왜 모든 사람이 죄인인가?

어떻게 “한 사람”의 죽음(그리스도)이 죄인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 수 있는가?

“한 사람”은 12, 15, 16, 17, 18, 19절에서 11번 나온다.

또한 “다스리다”라는 의미의 “군림하다”라는 단어도 14절, 17절, 21절에 나온다.

 

1. 두 사람: 아담과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보실 때 단 두 사람만 본다.

⑴아담

⑵예수 그리스도

 

14절은 아담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한다.

⑴아담, 첫 번째 아담

⑵예수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고린도전서 15:45)

 

2. 첫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비교

 

첫째 아담

⑴땅에서 만들어짐(고전 15:47)

⑵옛 창조의 왕 (창 1:26-28)

⑶완전한 동산에서 시험받고 실패

⑷죄, 죽음, 정죄를 가져옴

⑸죽음이 군림함 (5:14,17)

⑹많은 사람이 죄인이 됨 (19)

⑺육체적 출생으로 아담 안에 있음

 

마지막 아담 – 그리스도

⑴하늘에서 오신 주 (고전 15:47)

⑵새 창조의 주 (고후 5:17)

⑶광야에서 시험받고 승리

⑷의, 생명, 칭의를 가져옴

⑸믿는 자들이 군림함 (17), 은혜가 군림함 (21)

⑹믿는 자들이 의롭게 됨 (19)

⑺영적 출생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음

 

3. 아담 안에서의 인류

“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피로 만드시어”(사도행전 17:26)

우리는 아담과 동일시되어 있다.

아담의 죄 = 우리의 죄

아담의 죽음 = 우리의 죽음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죽는다.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율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었다.

그렇다면 죽음의 원인은 율법 위반이 아니라 아담의 죄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그의 죄와 그의 정죄를 상속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 아담, 새로운 머리 되신 분이 오셨다.

 

4. 죄와 구원의 대조

⑴범죄와 은혜의 선물인 값없는 선물의 대조(15-16절)

아담의 범죄는 정죄와 죽음을 가져왔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값없는 선물은 칭의와 생명을 가져왔다.

⑵죽음과 생명의 대조(17절)

아담 때문에 죽음이 군림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안에서 군림한다.

그리고 풍성한 생명을 가진다.

⑶정죄와 칭의의 대조(18절)

아담의 죄는 인류를 정죄로 빠뜨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주셨다.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간다.

⑷불순종과 순종의 대조(19절)

아담의 불순종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만들었다.

⑸율법과 은혜의 대조(20절)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준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율법이 할 수 없던 죄로부터의 구원을 이루었다.

 

 

오전성경공부 동영상 설교
오전설교

시작부터 끝까지 이루시는 구원

조도희 담임목사
요한복음 6:37-40
본문 말씀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38 이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자신의 뜻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는 것임이라. 39 이것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니, 즉 그분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 40 또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니,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 그리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고 하시더라.

  본문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본문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영광 가운데 그분의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그분 앞에 설 때까지 인간의 지성으로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들이 담겨 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가르쳐 준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구원을 우리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를 구원하여 마지막 날까지 안전하게 지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신 목적대로 행하신다(37절 상반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이 말씀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히셨다. 35절에서 주님께서는 놀라운 초청을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 또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생명의 빵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그분께 나아와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보고서도 믿지 않느니라.”(36) 그들은 기적을 보았고 빵을 먹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1:11은 이 사실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더라.” 메시아께서 이스라엘에게 오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했다는 뜻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바로 그 사실에 대한 대답이 37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이스라엘의 불신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다고 해서 십자가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에게 사람들을 주실 것이며, 그들은 그리스도께 나아올 것이다.

  이 선물의 대상은 “모든 자”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사람은 어떤 특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육신적인 혈통이나 종교적인 특권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12은 말씀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구원의 문제는 결국 그리스도를 믿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 자체에서도 계속 반복된다.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40), “나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졌나니”(47)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며, 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 그러므로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다. 당신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다. 종교적이었기 때문도 아니다. 선한 행위를 많이 했기 때문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을 주시는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이 구원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은 인간이 만들어 낸 계획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낸 인간의 작품이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먼저 찾아오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동시에,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명령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사도행전 16:31)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께 나아왔는데 거절당한 죄인은 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죄인은 결코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다. 죄인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 상관없다. 얼마나 깊은 죄 가운데 살았든 상관없다. 얼마나 멀리 떠나 있었든 상관없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을 믿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내어쫓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그분께서는 결코 당신을 내어쫓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를 구원하여 마지막 날까지 안전하게 지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죄인을 은혜로 받아 주신다. “또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죄인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깨닫고 그분께 믿음을 둘 때, 그분께서는 그 죄인의 혼을 구원하신다. 구원받는 것은 어떤 어렵고 신비로운 과정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그분의 부활이 당신의 혼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다(롬 10:9). 그 나머지는 그분께 달려 있으며, 그분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을 결코 거절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당신의 과거의 죄들은 그분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당신의 현재 상태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당신의 미래의 실패들 역시 그분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라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올 때 그분께서는 당신의 혼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약속이다! “또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그분께서는 당신을 결코 내어쫓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를 구원하여 마지막 날까지 안전하게 지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구원하신 모든 사람을 마지막 날까지 안전하게 지키신다. “이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자신의 뜻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는 것임이라. 이것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니, 즉 그분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 또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니,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 그리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고 하시더라.”(38–40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로 구원하신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결코 다시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끝까지 잘 버티기만 한다면 그들 가운데 일부가 구원받을 수도 있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살고 죽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죽게 하셨으며, 그리하여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도 안전하며 오는 세상에서도 안전하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그것을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고 말해도 좋다. “영원한 안전”​이라고 불러도 좋다. “영원한 생명”이라고 불러도 좋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결코 다시 잃어버린 자가 될 수 없다.

  성경은 이 사실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는다. “너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벧전 1:5).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느니라.”(5:24). 우리에게는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요 10:28). “그들은 결코, 어떤 방법으로도, 어떤 경우에도, 어떤 장소에서도, 어떤 때에도, 어떤 목적으로도,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계속해서나 영원토록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실제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면, 다시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시는 한, 당신은 결코 다시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히 6:4–6)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빚을 지불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바로 그 일을 이루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진노가 돌이켜지도록 자신의 피를 흘리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바로 그 일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선포하려 하심이요,”(롬 3:25)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이니라.”(요일 2:2)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4:10). “화목제물”은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요구하시는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다!

 

  주님께서 자신이 구원하시는 모든 혼의 죄의 빚을 완전히 갚으신 것으로 인해 그분을 찬양하라. 만일 당신이 오늘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면, 당신은 그분께 나아와야 한다. 지체하지 말라! 지금 예수님께 나아오라! 당신은 그분께로 다시 돌아와 바로잡아야 할 것들을 바로잡기 원하는가? 예수님께 나아오라! 당신은 집에서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는가? 예수님께 나아오라! 필요가 무엇이든, 예수님께 나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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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길

조도희 담임목사
고린도전서 13:1-13
본문 말씀
1 내가 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내는 놋이나 시끄러운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의 은사가 있어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3 또 내가 내 모든 소유를 주어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은사에는 풍성하지만 은혜에는 빈곤한 교회가 있다. 사람들을 중심으로 분열되고, 영적 은사들을 두고 다투고 있으며, 부도덕을 용납하고 있었고, 서로를 법정으로 끌고 가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하고, 심지어 주의 만찬에서도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교회다. 바로 고린도 교회인데 그들은 은사에는 풍성했지만 은혜에는 빈곤했다.

  은사들을 다루는 12장, 13장, 14장 본문의 12장의 끝에서 바울은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교사들과 기적들과 병 고치는 은사들과 방언들과 그 밖의 영적 은사들을 다룬 후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더 좋은 길을 보여 주리라.”(고전 12:31) 그 “더 좋은 길”이 바로 사랑의 길이다.

  바울이 묘사하는 사랑은 단순한 애정이나 낭만적인 끌림이나 자연적인 우정이 아니다. 이 사랑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단지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 안에서 맺어지는 사랑이다. 교회는 세워져야 하고 성숙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은 은사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은 은사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사랑은 모든 영적 은사와 섬김보다 우선한다(1–3절).

  말을 잘 할 수 있는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무익하다. 놀라운 의사소통 능력, 유창한 달변, 탁월한 전달 능력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단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리 내는 놋”과 “시끄러운 꽹과리”는 금속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로, 소리는 클 수 있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영적인 가치가 없다. 설교자가 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교사가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적절한 말을 정확하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들 뒤에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감동받지 않으신다.

  영적인 깨달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무익하다. “내가 예언의 은사가 있어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놀라운 신학적 이해력을 가지고 있고, 어려운 교리들을 설명하고 복잡한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어도 거기에 사랑이 없다면 그 지식은 거룩함 대신 교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고린도전서 8:1) 지식만으로는 자신의 자아를 자랑할 수 있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세워 준다.

  놀라운 믿음조차 사랑이 없다면 무익하다.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놀라운 믿음이라 할지라도 사랑과 분리되어 있다면 그 사람을 영적으로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 내가 내 모든 소유를 주어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처분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분명 그런 행동이라면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관대함조차도 교만에서 나올 수 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다면, 말의 능력도 공허하다. 지식도 공허하다. 믿음도 공허하다. 관대함도 공허하다. 희생도 공허하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소음이 “되고,”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내게 “아무 유익도 없다.” 교회가 아름다운 시설을 갖추고 있을 수 있다. 훌륭한 음악, 건전한 설교, 잘 조직된 사역들, 은사 있는 일꾼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그 교회는 차갑고, 경쟁적이며, 비판적이고, 용서하지 않는 교회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왜 섬기는가? 나는 왜 가르치는가? 나는 왜 설교하는가? 나는 왜 드리는가? 나는 왜 어떤 사람을 권면하려고 하는가? 나는 진정으로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은 은사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닮은 행동과 태도로 나타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4–7절)

  사랑은 오래 참는다. 성급하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사람을 대할 때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흔히 자신이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인내심을 시험받기 전까지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실수와 미성숙함을 받아 주며,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도록 여지를 준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향하여 바로 이런 종류의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셨다. 베드로는 주께서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라고 기록한다(벧후 3:9).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속하게 우리를 다루셨다면, 우리 가운데 아무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은 친절하다. 사랑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참는 것만이 아니다. 사랑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할 기회를 찾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말하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는 것을 더 즐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24–26에서 주의 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의 종은 다투어서는 아니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고, 잘 참으며 반대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바르게 잡아 주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진리를 깨닫도록 하실까 함이요 마귀의 뜻대로 그에게 사로잡혔던 그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깨어 나올까 함이라.”

  사랑은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사랑이 하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시기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받은 복을 보고 불쾌해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는다.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교만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사랑은 수치스럽거나 무례하거나 불명예스럽게 행동하지 않는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이것은 아마 우리의 마음을 가장 깊이 살피게 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렇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나에게 편리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사랑은 이렇게 묻는다. “무엇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사랑은 화평하다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어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장전된 총과 같이 살아간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무엇이 다음번 폭발을 일으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사랑은 개인적인 보복을 하지 않는다.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나중에 복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들을 계속해서 장부에 기록해 두기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한 죄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필요한 경우 책망과 회개와 화해와 교회 징계와 정의를 명령한다. 그러나 사랑은 나중에 상대방을 공격할 탄약으로 사용하기 위해 잘못들을 간직해 두지 않는다.

  사랑은 진리를 사랑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성경적인 사랑은 결코 죄를 감상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뻐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사랑이 넘치는 행동이 어려운 진리를 은혜롭게 말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끝까지 견딘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 사람들이 친절하고, 감사하며, 우리와 뜻이 맞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때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사랑의 진정한 시험은 누군가가 우리를 짜증 나게 하고, 실망시키고, 오해하고, 불편하게 만들 때 찾아온다. 다리 위에 무거운 하중을 올려놓을 때 그 다리가 얼마나 튼튼한지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관계에 압력이 가해질 때 우리는 자신이 가진 사랑의 질이 어떠한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친절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감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셨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대한 기준은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와 직접 마주 서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은 은사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사랑은 모든 일시적인 은사보다 오래 지속되며 가장 위대하다.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아니하나 예언들이라도 끝이 올 것이요, 방언들이라도 그치게 될 것이며 지식도 끝나게 되리라. 이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또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온전한 것이 오면 그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끝날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어린아이같이 말하고 어린아이같이 이해하며 어린아이같이 생각하였으나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어린아이의 일들을 버렸노라. 지금은 우리가 유리를 통해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처럼 알게 되리라.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으나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니라.”(8–13절)

  예언은 끝난다. 방언은 그친다. 지식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부분적인 상태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또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어린아이와 거울이라는 두 그림으로 설명한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면 어린 시절의 것들을 내려놓는다. 희미한 거울로 보던 사람이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참되지만 부분적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선명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은사들은 사라지지만 사랑은 남는다.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으나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니라.”(13)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한다.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 그리고 사랑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갈보리에서 나타났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롬 5:8) 그 사랑의 가장 위대한 표현은 단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정의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견된다. 갈보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나는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오래 참는가? 다른 사람이 복을 받을 때 함께 기뻐하는가? 내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는가? 쉽게 성내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마음속 장부에 기록해 두고 있지는 않은가? 진리를 말할 만큼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은혜롭게 말할 만큼 사람을 사랑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보여 주는 가장 위대한 증거는 얼마나 많이 아는가도 아니고, 얼마나 큰 은사를 가졌는가도 아니며, 얼마나 눈에 띄게 섬기는가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데서 나타난다.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으나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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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용광로를 기쁨으로 통과하라.

조도희 담임목사
에스겔 22:18-22
본문 말씀
18 인자야, 이스라엘 집이 내게 찌꺼기가 되었으니 그들 모두가 용광로 가운데 있는 놋과 주석과 철과 납이라. 그들은 또 은의 찌꺼기니라. 19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모두 찌꺼기가 되었으니, 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가운데로 모으리라. 20 그들이 은과 놋과 철과 납과 주석을 용광로 가운데로 모아 그 위에 불을 불어넣어 녹이는 것같이 내가 너희를 나의 성냄과 분노 속에 모아 너희를 거기에 남겨 두고 녹이리라. 21 정녕, 내가 너희를 모아 내 진노의 불길을 너희 위에 불게 하리니 너희는 그 가운데서 녹으리라. 22 은이 용광로 가운데서 녹는 것같이 너희도 그 가운데서 그렇게 녹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나 주가 내 분노를 너희 위에 부은 줄을 알게 되리라.

  주제 명제 : 하나님의 용광로를 기쁨으로 통과하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불순물이 섞인 은에 비유하신다. “인자야, 이스라엘 집이 내게 찌꺼기가 되었으니”(18)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기 원하셨던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 섞였고 죄와 타협했다. 그 결과 순수한 은이 아니라 찌꺼기가 섞인 은처럼 되었다. 세공자인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광로 속에 넣고 뜨거운 열을 가한다. 금속이 녹으면서 그 안에 숨어 있던 불순물이 드러나고, 세공자는 그것을 제거한다. 용광로는 금속에게는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세공자에게는 목적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의 자녀들이 때때로 용광로와 같은 시간을 지나가도록 허락하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괴하기 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변화시키시며,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광로를 기쁨으로 통과하라. 하나님의 용광로를 기쁨으로 통과하려면 용광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 용광로를 사용하신다.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요한계시록 3:19) 하나님께서는 사생아가 아닌 자신의 자녀가 죄 가운데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히브리서 12장). 그러나 모든 고난이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욥이 고난을 받은 것은 그가 어떤 은밀한 죄 가운데 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기 때문에 저런 일을 당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지근함을 깨뜨리기 위해 용광로를 사용하신다. 디도서 2:14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우리를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쉽게 식어 버리는가?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은 없을 수 있다. 기도는 하지만 간절함이 없을 수 있다.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흔드셔서 다시 그분을 찾게 하실 수 있다. 그 결과 평안할 때 하지 않던 기도를 고난 가운데 하게 된다. 평안할 때 붙들지 않던 말씀을 눈물 가운데 붙들게 된다. 평안할 때 의지하지 않던 하나님을 고난 가운데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용광로를 사용하신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세공자는 금속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금속 안에 섞여 있는 찌꺼기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신다. 우리의 교만, 자기 의존, 세상 사랑, 우리의 불신과 두려움을 제거하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용광로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순히 “주님, 언제 이 고난을 끝내 주시겠습니까?”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한다. “주님, 이 일을 통하여 제 안에서 무엇을 이루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용광로를 기쁨으로 통과하라. 하나님의 용광로를 기쁨으로 통과하려면 용광로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해야 한다.

  금속이 용광로에 들어가면 금속에 붙어 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간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지나치게 의지하던 것을 흔드신다. 용광로에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욥을 전 재산을 잃었다. 자녀들, 건강을 잃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서조차 제대로 된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욥이 알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이것이 용광로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불은 느껴지는데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 고통은 분명한데 하나님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8:28은 분명히 말씀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현재의 불을 보나, 하나님께서는 불이 지나간 뒤의 모습을 보신다. 우리는 잃어버리는 것을 보나, 하나님께서는 이루어질 것을 보신다.

  용광로는 고통스럽지만, 때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경험한다. 세 히브리 청년들은 어디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는가? 불타는 용광로 속이었다. 다니엘은 어디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했는가? 사자 굴이었다. 이스라엘은 어디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했는가? 광야였다. 제자들은 어디에서 바람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았는가? 폭풍 가운데였다. 바울은 어디에서 그리스도의 충분한 은혜를 배웠는가? 육체의 가시 가운데였다. 때로 우리는 말한다. “주님, 이 불을 꺼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을 즉시 끄시는 대신 말씀하실 수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 이것이 용광로 가운데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하나님의 용광로를 기쁨으로 통과하라. 하나님의 용광로를 기쁨으로 통과하려면 용광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짐을 믿어야 한다.

  용광로를 통과하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모든 일이 잘될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모든 것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상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때, 눈물 가운데서도 주님을 붙들 때, 세상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용광로를 통과한 삶은 강력한 간증이 될 수 있다.

  용광로를 통과하면 하나님께 더욱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된다. 잠언 25:4은 말씀한다. “은에서 찌꺼기를 제거하라. 그리하면 세공자에게 그릇이 되어 나올 것이니라.” 찌꺼기가 제거된 후에는 무엇이 나오는가? 그릇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어 거룩하여지고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되느니라.”(디모데후서 2:2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깨끗하게 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신다. 깨끗하게 하셔서 사용하신다. 교만이 제거될수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쉬워진다. 자기 의지가 꺾일수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쉬워진다. 자기 의존이 사라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 용광로 이전보다 용광로 이후에 더 좋은 그릇이 된다. 뜨겁게 달구어진 금속은 부드러워진다. 그래서 세공자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을 바꾸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용광로는 우리의 완고함을 부드럽게 만든다. 마침내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처럼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고린도후서 4:17은 말씀한다.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라.” 용광로는 영원하지 않다. 불은 언젠가는 꺼진다. 시련은 지나간다. 눈물도 언젠가는 그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용광로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이루신 것은 남는다. 그러므로 용광로의 가장 귀한 결과는 단순히 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 당신은 용광로 속에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 세 가지를 기억하라. 첫째, 용광로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둘째, 용광로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 셋째, 용광로 뒤에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결과가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라. 용광로는 일시적이지만 그 유익은 영원하다.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사실을 믿고 아버지의 손길에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용광로 안에서도 기쁨을 누리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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