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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제 453 호 2026년 9월 20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26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4
오전설교
청지기직 결산을 잘 하려면
조도희 담임목사 | 누가복음 16장 1절–12절
오후설교
세상이 무릎 꿇으라 할 때
조도희 담임목사 | 다니엘 3장 19절–30절
수요설교
부정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
강태영 형제 | 히브리서 4장 13절-16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26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4
본문 말씀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것이 은혜를 따라 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되거니와 마침내 그 약속을 모든 씨에게 확고히 하려 함이며 율법에 속한 자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에게도니라. 그는 우리 모두의 아비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비가 되게 하였노라.” 함과 같으니) 그가 믿은 그분, 곧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니라.

16절의 약속은 여전히 13절에 나오는 땅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 “믿음에서 난 것”이기 때문에 은혜는 그 약속을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씨인 유대인들(“율법에 속한 자들”)과 아브라함의 영적인 씨인 그리스도인들(“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 모두에게 확대한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에 아브라함의 영적인 씨에게 성취되는데,

그때 그들은 “왕들과 제사장들”로서 “땅 위에서 통치”하게 된다(계 5:10).

“그는 우리 모두의 아비라.”

아브라함은 구원받은 이방인들로 구성된 영적인 민족(벧전 2:9)의 영적인 조상이다.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비가 되게 하였노라.” 함과 같으니) 그가 믿은 그분, 곧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니라.

창세기 17:4–5을 인용한다.

“많은 민족들”에는 이스라엘, 유다, 에돔, 미디안, 아랍인들 등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교회라는 “거룩한 민족”도 포함된다.

 

“그가 믿은 그분, 곧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니라.”

생식 능력에 관한 한 아브라함은 육체적으로 죽은 상태였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그들의 몸의 생식 기능을 다시 살리셔야 했다.

 

18 그가 소망이 없는데도 소망 가운데서 믿었으니 “네 씨가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많은 민족들의 아비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여 약 백 살이 되고서도 자기 몸이 이제 죽은 것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또 사라의 태도 죽은 것으로 생각지 아니하였느니라.

20 그는 믿음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느니라.

22 그러므로 그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니라.

 

믿음에는 여러 단계가 있으며, 불신이 섞인 약한 믿음에서 시작하여 의심이 없는 강한 믿음으로 나아간다.

⑴믿음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믿음이다.

18 그가 소망이 없는데도 소망 가운데서 믿었으니 “네 씨가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많은 민족들의 아비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믿지만, 자신의 믿음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소망할 만한 근거가 없고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소망한다.

“소망이 없는데도 소망 가운데서 믿었으니”

아브라함이 바로 그러했다.

그는 자기 몸이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창 17: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을 수만 있다면,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고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울부짖으며 눈물로 말하기를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하더라.”(마가복음 9:23–24)

구원은 믿음의 양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 달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를 향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 믿음이 오직 그분께만 놓여 있는 한 사람을 구원할 것이다.

 

⑵믿음의 다음 단계는 중간 단계의 믿음이다.

19 그가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여 약 백 살이 되고서도 자기 몸이 이제 죽은 것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또 사라의 태도 죽은 것으로 생각지 아니하였느니라.

20 그는 믿음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이 자녀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계속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지점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약속에 집중하라.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께서 점점 크게 보이게 되어 마침내 당신의 문제보다 더 크게 보이게 될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이나 그분의 능력과 역량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뜻 안에서 당신이 그분께 필요로 하는 어떤 일이든 행하실 능력과 역량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당신은 믿음을 통하여 그 능력과 역량에 접근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적게 믿을수록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행하시는 일도 적어질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주실 것이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으니 그 사람은 주께로부터 어떤 것이든 받으리라 생각하지 말라.”(약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의심이 섞여 있는 약한 믿음에서부터 의심으로 인해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는 확고한 믿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일종의 중간 단계의 믿음이다.

아직 강한 믿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약한 믿음도 아니다.

⑶강한 믿음의 단계이다.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느니라.

따라서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의심은 사라지고,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에 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구원과 관련하여 중요하다.

약한 믿음도 누구든지 구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장하고 승리하기 원한다면 약한 믿음을 넘어서야 한다.

 

23 이제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우리들 때문이기도 하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분을 믿는 자들이라.

25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드려지셨고 우리의 의롭게 하심을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느니라.

 

로마서 4장 전체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신약 성도들을 위한 하나의 본보기로 사용되어 왔다.

아브라함의 구원은 우리의 구원(신약의 구원)과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의 구원에 대한 모형(type)이다.

로마서 4장의 마지막 세 구절에서 바울은 바로 이 모형론을 사용한다.

아브라함에게 의가 전가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는 것에 대한 모형이다.

그러나 그 조건은 달라졌다.

우리는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분을 믿는”(24절) 때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는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다는 사실, 곧 그분께서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드려지셨고”(25절)라는 사실을 믿을 때 그 의를 받는다.

또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죄의 빚이 완전히 지불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다는 사실, 곧 그분께서 “우리의 의롭게 하심을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느니라.”(25절)는 사실을 믿을 때 그 의를 받는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는 달리, 당신은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믿는 순간 의롭게 된다.

우리의 죄들은 제거되었다(요 1:29).

그러나 아브라함의 죄들은 제거되지 않았다(히 10:4).

“이는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

오전설교

청지기직 결산을 잘 하려면

조도희 담임목사
누가복음 16장 1절–12절
본문 말씀
1 또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떤 부자가 한 청지기를 두었는데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비난이 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너에 대하여 이런 소문을 들었는데, 어찌된 일이냐? 네가 청지기를 더 이상 못하리니 네 청지기직을 청산하라.’고 하더라. 3 그러자 그 청지기가 속으로 말하기를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직을 박탈하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일굴 수도 없고 구걸을 하자니 부끄럽도다.

  청지기란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청지기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신실하게 맡은 것을 관리하느냐이다. “당신이 맡은 것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이제 계산하라.”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심이다. 그리스도인은 소유자가 아니라 청지기이다. 우리에게 있는 시간도 맡겨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물질,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재능, 우리에게 주어진 가족도 맡겨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역도 맡겨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도 있다. 언젠가 우리는 주님 앞에 서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회계보고하게 된다.

 

  청지기직에 대한 회계결산을 잘 하려면 오늘을 영원의 관점에서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 맡겨진 것을 내 것처럼 낭비하지 말라. “어떤 부자가 한 청지기를 두었는데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비난이 그에게 들린지라.”(1–2절).

  그 재산은 주인의 재산이지 청지기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맡은 것을 자기 것처럼 사용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

  청지기의 첫 번째 실패는 돈을 잘못 쓴 것 이전에 소유권을 착각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내 시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사용한다. 내 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만을 위해 사용한다. 내 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사용한다. 내 재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성공을 위해 사용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잠시 맡아 관리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 사실을 모르면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된다.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함이다. 세상은 능력을 크게 본다. 성과를 크게 본다. 규모를 크게 본다. 사람의 숫자를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신실함을 보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시간과 돈과 재능과 기회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한다면 청지기의 개념을 잃어버린 것이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은 청지기의 죄이다. 낭비는 단지 돈을 허비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시간도 낭비할 수 있다. 젊음, 건강, 재능, 기회도 낭비할 수 있다. 그리고 복음 전도의 기회도 낭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맡기셨는가? 건강한 몸을 맡기셨는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맡기셨는가? 물질을 맡기셨는가? 배운 지식과 경험을 맡기셨는가? 자녀나 손자들을 맡기셨는가? 교회에서 어떤 책임을 맡기셨는가? 복음을 맡기셨는가? 그것을 지금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오늘 그것을 돌려달라고 하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네 청지기직을 청산하라.”

 

  청지기직에 대한 회계결산을 잘 하려면 오늘을 영원의 관점에서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 오늘 가진 것으로 내일의 결산을 준비하라(2–8절).

  우리의 청지기직에는 반드시 끝이 온다. “네가 청지기를 더 이상 못하리니 네 청지기직을 청산하라.” 이 청지기는 지금까지 주인의 재산을 관리했다. 권한도 있었다. 지위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끝이 온 것이다. 청지기직은 영원하지 않았다. 우리의 청지기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계속 있을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금의 건강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의 직장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의 돈, 지금의 사역, 지금의 인간관계, 그리고 지금의 몸도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불의한 청지기는 적어도 자신의 끝을 생각했다. 그는 불의했지만 미래를 생각했다. “그러자 그 청지기가 속으로 말하기를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직을 박탈하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일굴 수도 없고 구걸을 하자니 부끄럽도다.’” 그리고 4절에서 결론을 내린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될는지 알았도다.” 그는 빚진 사람들의 채무를 줄여 주었다. 5절부터 7절을 보면 한 사람에게는 기름 백 말을 오십으로 줄여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밀 백 말을 팔십으로 줄여 주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계속 속였다. 그러나 8절에서 주인이 그를 칭찬한다. “이에 그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가 현명하게 처리하므로 칭찬하였으니 이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그들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현명하기 때문이라.” 주인이 무엇을 칭찬했는가? 불의를 칭찬한 것이 아니다. 거짓과 속임수를 칭찬한 것이 아니다. 그가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한 지혜를 칭찬한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요점은 매우 날카롭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그들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현명하다.” 세상 사람들은 일시적인 삶을 위해서도 철저하게 준비한다. 노후를 준비한다. 연금을 준비한다. 보험을 든다. 건강검진을 한다. 자녀 교육을 준비한다. 주택을 준비한다. 사업을 준비한다. 10년 뒤, 20년 뒤를 생각하면서 오늘 돈을 절약하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빛의 자녀들이 영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청지기에게는 “나중”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위험하다. 당신이 계속 미루고 있는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젠가 이런 말씀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네가 청지기를 더 이상 못하리니 네 청지기직을 청산하라.”

 

  청지기직에 대한 회계결산을 잘 하려면 오늘을 영원의 관점에서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 큰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작은 일에 신실하라. “지극히 작은 일에 신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신실하며, 또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하니라.” (9–12절)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우리는 큰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일. 눈에 띄는 일. 칭찬받는 일. 성과가 크게 보이는 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을 보신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신실한가? 작은 약속을 지키는가? 적은 돈을 바르게 사용하는가? 작은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가?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가?

  작은 기회라도 복음을 전하는가? 작은 일에서 태도가 드러난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지극히 작은 일에 신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신실하며.”

  물질은 신실함을 시험하는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불의한 재물로도 신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 신용에 맡기겠느냐?” 세상은 돈을 매우 크게 본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지극히 작은 일”의 문맥에서 말씀하신다. 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신실함을 시험하시는 하나의 도구이다. 돈을 어떻게 버는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돈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 돈이 생기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가? 돈이 적을 때 정직한가? 돈이 많아졌을 때 교만해지는가?

  주님께서는 이런 것을 보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 말씀은 돈과 친구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돈을 사용하여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도움을 주라는 것이다. 돈은 반드시 청지기의 삶에서 도구가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은 섬김을 받아야 할 주인이 아니라 섬김에 사용되어야 할 도구이다.

  남의 것에 신실해야 자기 몫을 받는다.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신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 자신의 몫을 주겠느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남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맡아 관리한다. 그러나 장차 주님 앞에서 그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바로 그때 “너희 자신의 몫”을 받게 된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

  현재는 맡긴 것을 관리하는 때이다. 장래는 평가와 보상의 때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맡은 것을 신실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 앞에 서서 회계보고한다.

 

  오늘 청산하라고 하신다면 오늘 본문의 청지기는 실패한 청지기였다. 만일 오늘 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청지기를 더 이상 못하리니 네 청지기직을 청산하라.” 지극히 작은 일에 신실하라. 주님께서 오늘 당신에게 맡기신 일을 하라.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라. 결과가 크게 보이지 않아도 하라. 모두가 그날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서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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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무릎 꿇으라 할 때

조도희 담임목사
다니엘 3장 19절–30절
본문 말씀
9 그러자 느부캇넷살이 분이 가득 차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한 그의 얼굴 모양이 변하더라. 그러므로 그가 명령하여 말하기를, 그 용광로를 평상시에 뜨거웠던 것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하더라. 20 왕이 자기 군대에서 가장 힘센 사람들에게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묶어서 불타는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던져 넣으라고 하니, 21 이 사람들이 그들의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들을 입은 채로 묶여서 불타는 뜨거운 용광로 가운데에 던져졌더라. 22 왕의 명령이 엄격하여 용광로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들어 간 사람들을 태워 죽였더라. 23 그리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묶여서 불타는 뜨거운 용광로 가운데로 떨어졌더라.

  거듭난 성도들에게 세상은 점점 더 적대적으로 변해 간다. 고대 바빌론 역시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 적대적인 왕국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강철 같은 기개를 가진 세 명의 젊은이들을 본다. 그들은 세상에 굴복하지 않았고, 절하지 않았으며, 불타 없어지지도 않았다. 세상이 무릎 꿇으라 할 때 불타는 용광로에서 배우는 교훈들이 있다.

 

  세상이 무릎 꿇으라 할 때 믿음으로 굳게 서라. 세상이 굴복을 요구할 때 믿음은 굳게 선다 (19–23절).

  느부캇넷살은 세 히브리 청년이 취한 태도에 분노하여 그들을 불타는 용광로에서 죽이기로 작정했다. 그는 그들을 결박하여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달군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했다(19). 불길이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에 그들을 불 속에 던져 넣었던 사람들마저 죽고 말았다(22).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을 향해 이토록 큰 분노가 쏟아졌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 때문에 박해받았다. 느부캇넷살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신의 형상을 세웠거나, 아니면 더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자신의 형상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형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그들 주변의 이교도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자신들을 낮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삶의 기준과 생활 방식은 그날 그들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그들을 구별되게 만들었다. 거듭난 성도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 다른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 마음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라.”(골 3:1–2).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구주 때문에 박해받았다. 느부캇넷살은 그들에게 세상에 무릎 꿇을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그는 이 청년들이 왜 절하기를 거부하는지 알고 있었으며, 15절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조롱했다. 그는 자신, 곧 느부캇넷살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굴복하라고 요구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과 그분의 뜻에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드려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의 삶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셔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취한 입장 때문에 박해받았다. 끔찍한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이 사람들은 굴복하지도 않았고 절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굳게 지켰다. 참된 성도는 어깨를 펴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굳게 서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살려고 한다면,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오직 그분께만 속한 사람으로 살려고 한다면,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 우리를 세상의 틀 속에 억지로 밀어 넣도록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는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이다.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 3:12) 우리에게는 비난의 용광로가 있을 것이다. 위협의 용광로, 증오의 용광로, 유혹의 용광로, 그리고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련의 용광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직면하게 되는 현실이다.

  인생의 용광로, 특히 박해의 용광로는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유익하다. 왜 그런가? 인생의 용광로는 우리를 더욱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금과 은이 용광로 속에 들어가 그 과정을 통해 정결하게 되는 것처럼, 박해 역시 우리의 삶에서 찌꺼기를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을 작은 용광로 속으로 보내시고 그로 인해 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셨다면, 앞으로 인생길 어딘가에서 당신을 더 큰 용광로 속에 넣으실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완전히 믿음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조금만 양보하라고 한다. 한 번만 절하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까지 유별나게 살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세 청년은 알고 있었다. 믿음은 모두가 서 있을 때 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무릎 꿇을 때 혼자라도 서는 것이다.

 

  세상이 무릎 꿇으라 할 때 믿음으로 굳게 서라. 시련 가운데서 성도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한다 (24–27절).

  세 히브리 청년은 불 속에 던져졌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불길 속에서 죽기는커녕 자신들을 묶고 있던 결박에서 풀려나 불 속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느부캇넷살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불 속에서 나오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불길로부터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보호받았다(25).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길 속에 던져졌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이 앞서 믿는다고 고백했던 하나님께서 불 속에서 그들을 만나 주셨다. 느부캇넷살과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세 사람을 불길 속에 던져 넣었는데, 이제 네 사람이 결박이 풀린 채 그 안에서 걸어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바빌론의 용광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다. “네가 물들을 통과할 때도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네가 강들을 통과할 때에도 물이 너를 덮치지 못할 것이라. 네가 불 속을 통과해서 걸을 때에도 타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네 위에서 타지 못할 것이라.”(사 43:2). 우리에게도 동일한 약속이 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 13:5). 당신 주위로 불길이 치솟을 때 눈을 떠서 바라보라.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에서 당신과 함께 계신다!

  당신 앞에 불타는 용광로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이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그분께서는 고난의 때에 당신을 지키실 수 있으며, 그 모든 고난을 통과하게 하여 마침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세상이 무릎 꿇으라 할 때 믿음으로 굳게 서라. 믿음이 끝까지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28–30절).

  불 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세 히브리 청년들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하실지 알지 못했다(17절). 그러나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했다. 느부캇넷살은 자신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15절). 그러나 결국 그들 모두는 하나님께서 왕보다 위대하시며 불타는 용광로보다도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용광로에서 구출된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의 인격이 찬양받았다. 한 늙은 이교도 왕이 참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느부캇넷살은 하나님께서 용광로 속에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목격한 후 모든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 히브리 성도들의 삶에 찾아온 이 끔찍한 순간을 사용하여 구원받지 못한 이교도 왕의 완고한 마음을 움직이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을 어떻게 사용하실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을 의지하면서 인생의 용광로를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나의 삶에서 그 순간들을 사용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주는 바로 그 순간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 그분께서 하나님이시며 그들도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용광로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면서 그분께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후 12:9).

  하나님의 백성이 높임받았다. 그들은 주님께 신실했기 때문에 용광로를 통과했다. 그리고 용광로의 반대편으로 나온 후, 그들은 왕국에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하게 하시기 전에는 그 사람을 크게 사용하지 않으신다. 먼저 겸손하게 마른 시냇가에 머물지 않고서는 능력 가운데 칼멜산에 설 수 없다. 먼저 광야에서 다른 사람의 양들을 돌보지 않고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광로 속으로 보내실 때, 그것은 당신에게 해를 입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분께서 당신을 그곳으로 보내시는 것은 당신의 삶을 이전보다 더 크게 사용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특히 청년들이여, 앞으로 여러분 앞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성경을 버려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모두가 무릎을 꿇어도 당신까지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다. 혼자 서야 한다면 혼자 서라. 손해를 보더라도 서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서라. 당신의 믿음 때문에 조롱받더라도 서라. 그리고 기억하라. 당신이 주님을 위하여 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세 청년이 불 속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그들과 함께하시는 분이 계셨다. 세상은 그들을 묶을 수 있었다. 세상은 그들을 불 속에 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하나님을 불 밖에 세워 둘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안한 삶이 아니다. 끝까지 서 있는 믿음이다. 세상이 무릎 꿇으라고 요구할 때 서 있으라. 불길이 치솟을 때에도 서 있으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믿으라. 모두가 무릎 꿇는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서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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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

강태영 형제
히브리서 4장 13절-16절
본문 말씀
13 그 어떤 피조물도 그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나니, 오직 만물이 우리가 회계해야 하는 그분의 눈 앞에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나게 되느니라. 14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라. 15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자. 이는 우리가 자비를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함이라.

  발명왕이라 불리는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1200번의 실패를 했다. 1200번 실수를 했다는 것은 1200번의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왜 실패했을까, 어디서 잘못되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많은 질문 끝에 전구를 발명했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인 도로시 리즈는 '질문의 7가지의 힘'이라는 책을 썼다.
7가지를 정리하자면 1, ​질문을 하면 답이 나온다. 2, ​질문은 생각을 자극한다. 3, ​질문은 정보를 가져다준다. ​4, 질문을 하면 통제가 된다. 5, ​질문은 마음을 열게 한다. 6, ​질문은 귀를 기울이게 한다. 7, ​질문은 스스로를 설득시킨다. ​결론은 질문은 명확한 길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시는 직분과 역할은 대제사장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고백하는 바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믿음은 숙고의 결과이다. 생각하는 것이 믿음을 결정한다. 깊이 생각하면 믿음이 안정이 된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그리스도 이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주 이심을 고백하는 삶은 낙심하는 삶을 살고 지치게 되는 요인들이 계속해서 찾아온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 만이 가능하다. 나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지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의 대상에 다른 것이 있다면 성도가 나아가야 할 길은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세상과 마귀는 여러분을 계속 미혹시키기 위해 더 좋아 보이는 것을 보여주며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할 그 위치를 뒤바꾸고자 한다. 삶에 문제들에 주저앉고 닥친 위기에 혼란스러운가? 본문 말씀을 근거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과연 나의 삶에서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 답은 부정일 수밖에 없다. 그 답이 명확해졌을 때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올바르게 갈 수 있게 된다.

 명제: 성도의 삶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1, 예수님처럼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있는가? 히 4:13

​  감추어진 것들, 드러나지 않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는 일들 중 대부분은 드러나지 않는다. 각자가 개인의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들림 받아 올라갔을 때 다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 드러나지 않는 것조차 다 알고 계신다.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가 살면서 남몰래 지은 죄들 다 지켜보고 계신다. 죄들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수고 또한 다 알고 계신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순탄했으면 좋겠지만 그 길은 어려움과 시험의 연속이고 잘 걸어가다가도 자주 넘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에 무릎 꿇거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따르기 위해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분의 수고를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며 지켜보신다. 지금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내 수고와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시며 들림 받아 올라갔을 때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X선은 전자기파의 한 종류이다. 이 X선을 활용한 것이 대표적으로 공항의 보안검색대의 전신 스캐너이다. 이것을 활용하여 몸에 지니고 있는 것들, 혹은 몸 안에 삼킨 물체도 전부 보여준다고 한다. 다른 것으로는 병원의 X-ray가 있다. 이것을 활용하여 외부적으로 보이지 않는 내부 장기의 손상, 골절의 여부를 진단할 수 있다. 이 X선이 자신의 내부를 투시하여 드러내듯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투시하고 계신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여정을 계획하신다. 현재 나에게 이루어지는 일들이 왜 나에게 일어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이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그 모든 일에는 나에게 유익이 되는 주님께서 계획하신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창 50:20에서 요셉의 형들의 음모로 인해 겪었던 억울함과 어려움은 결국 야곱 집안을 기근으로부터 구해내는 계기가 되었다. 행 8:1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났던 박해가 복음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내가 처한 상황 모두 알고 계시며 왜 그런 일을 겪게 하셨는가 그 이유도 알고 계신다. ​삶을 살아가며 반복적으로 넘어지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의 수고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예수그리스도만큼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 계시는가? 나의 가족, 가장 친한 친구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편적일 뿐 나의 깊은 곳의 상처나 어려움까진 세세하게 알진 못한다. ​그 질문의 답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아름다운 간증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우선적으로 나를 위해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 답을 확신할 수 있다. 그 답은 부정일 수밖에 없다. 아무도 없다. 예수님처럼 나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2, 예수님처럼 나의 고통을 잘 이해해 주시는 분이 있는가? 히 4:14, 15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을 함께 느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고통이 우리 마음 깊이 느껴지면, 예수님도 그 고통을 함께 느끼신다. 음악에도 공감 현상이 있다. 피아노의 하단 (보통 3개로 이루어진 페달) 우측에 위치한 음을 울리게 하는 서스테인이라는 페달을 밟은 상태에서 도를 치면 그 피아노 안에 있는 다른 높이의 도들도 울리게 된다. 심지어 서로 다른 피아노 두 대가 있는 상태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도를 누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피아노의 도 음정이 같이 울리게 된다. 이것을 공명 현상, 공진 현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예수님도 우리가 겪는 슬픔과 고통에 따른 진동을 동일하게 느끼신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하며 인내하는 것을 원하신다.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무시하고 매몰차게 강해질 것을 몰아붙이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연약한 사람을 내팽개치지도 않으신다. 진실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나와 다른 환경과 상태에 계시는데, 셋째 하늘에서 만왕의 왕으로 계시는 데, 한낱 인간인 내가 겪는 그런 고통을 어떻게 함께 느끼고 아시겠는가 의심이 들더라도 성경에서는 다 알고 계신다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이 겪는 문제가 가장 익숙하신 분은 예수그리스도 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받아야 될 모든 죄의 문제들을 다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다. 예수님처럼 가난한 사람은 없었다. 성경에서 만주의 주 시라고 말씀하셨던 가장 부유하신 분이 여러분을 가장 부유하게 하시려고 가장 가난하게 되셨다. 그분께서는 시험받는 것을 이해하신다. 홀로된다 는 것을 이해하신다. 

  중학생 시절 필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친구에게 말했더니 공개적으로 예수쟁이라며 놀림감을 만들었다. 고등학생 시절 함께 다니던 필자 포함 5명의 친구 중 가장 친했던 한 명을 구령하고 교회까지 데려와 침례 받기 직전 물속에까지 들어갔다가 마귀의 공격으로 침례에 순종하지 못했다. 결국 그 친구와는 멀어졌으며 나머지 친구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필자뿐만이 아니라 여러분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했더니 고립된 간증이 많을 것이다.

  "그때부터 제자들 중 많은 자들이 물러가고 더 이상 주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6)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다. 베드로는 나는 그 사람을 모르노라.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세상이 등을 돌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신 분이시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하나님마저도 등을 돌리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막 15:34)
그때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아라.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돕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고통과 슬픔의 본질도 다 아시는 것이다. 두려움, 절망, 낙심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동정한다. 평생 또는 오랜 기간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살아가거나 가난과 고통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며 그 고통을 그대로 느끼신다. 다시 한번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과연 예수님처럼 나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있는 분이 있는가? 그 대답은 부정일 수밖에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유일하게 나를 동정하실 수 있는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 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신뢰의 대상을 결코 바꿔서는 안 된다.

 

3, 예수님처럼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있는가? 히 4:16

  구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는다. 은혜와 자비 없이 하루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가 30명쯤 되는 고아들을 데리고 고아원을 운영할 때 이야기이다. 하루는 고아원 요리사가 점심 양식이 없어서 뮬러에게 어찌할까 물었다. 그는 평소대로 준비하라 지시했다. 빈 빵 접시 30개와 물컵을 식탁에 올려놓았고 요리사는 식사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음을 세며 초조해했다. 뮬러는 묵묵히 기도했다. 식사시간이 다 되어 요리사가 이제 시간이 없다며 우는소리를 하는 순간 문밖에서 요란한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나가보니 한 식료품 회사가 고아원에 기증하려고 빵을 가져온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예정대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저 우연히 벌어진 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 우리는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구주로 모시며 그분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어떤 깊은 고민이 있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고난이 찾아오고 위기가 닥쳤을 때, 언제든지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신실하게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에 결격사유가 있는가? 해결 받지 못한 죄가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의 죄책감이, 이 죄를 짓고 난 후 찜찜함이 조금 덜어진 후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겠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나와 과연 소통해 주실 것인가 의심이 드는가? 그런 것은 없다. 죄가 있다면 그 즉시로 은혜의 보혈의 능력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나를 위해 흘리신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언제든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된 것이다. 나의 현 상황에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고 필요한 것이라 느껴지지만 그것이 조금 터무니없게 느껴지고 구하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져 의심이 되는가? 주저하지 말고 구해야 한다. 조지 뮬러 또한 그 30인분의 음식을 짧은 시간 내에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터무니없이 느꼈을 것이고 불안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한 것이다. 바로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갔을 때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은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고 계신다. 지난 설교 때 24시간 콜센터를 예시로 든 적이 있다. 24시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항상 대기하신다. 부재중이 없으시다. 그러나 기도에 응답을 안 해 주시면 말씀이 잘못된 것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유익이 되고 최상이 되기 때문에 주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최상의 것만 주신다.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주님께서 도우시는 은혜는 우리가 갖고 싶어 하고 갈망하는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필요한 때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 무엇이 언제, 왜 필요한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해 믿음으로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오늘 그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하라. 가장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삶이야말로 기쁨이 되고 힘이 되며 위대한 간증으로 이어지는 삶이다. 다시 한번 16절 말씀을 근거로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하여 확증해 보라. 과연 예수님처럼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있는가? 그 답은 명백하게 없다는 것이다. 바로 부정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이 세상이 아무리 부유하게 느껴지고 나에게 많은 것을 해줄 것 같지만 결코 나의 필요를 채워주지는 못한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그리스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나에게 역사하시는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기 위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스스로 질문해서 확증하라. 나의 삶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결론을 지었다고 한다면 그 결론을 하나님께 고백하라.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대체할 수 있는 건 단 한 개도 없음을 고백하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나의 모든 문제들에 그대로 동정할 수 있으시며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분이심을 고백해 드리며 감사하라. 그러고 나서 오늘 여러분이 가지고 나온 기도 제목을 그 믿음과 담대함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길 바란다. 오직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을 신뢰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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