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씀
할례는 하나의 표적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린도전서 1:22)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인 표적이 필요하지 않다.
그의 “인침”은 이미 그의 안에 살아 계신다.
엡 4:30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쓸모없고”(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으되”(갈6:15)
할례가 옛 언약의 표적인 것처럼 침례가 새 언약의 표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구약이든 신약이든, 침례를 표적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베드로전서 3:21에서는 그것을 “모형”(figure)이라고 부르지, 표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개혁주의 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은 침례가 새 언약의 표적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물을 뿌리는 것은 당신이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믿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어 새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물 침례는 당신을 언약의 자녀로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개혁주의 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이 더 이상 카톨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아기들에게 물을 뿌리는 이유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언약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도 그리스도인의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침례를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그 자녀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셔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성경에 철학과 전통을 더할 때 바로 이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으리라.”(막16:16)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하거나 정죄받게 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이다(15절).
침례는 구원하는 믿음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17절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라고 말한 다음 그 표적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침례는 어떤 식으로든 그 표적들과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할례는 누구를 옛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않았다.
그 언약은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에게 주어졌다(창 17:19, 21).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방황하는 동안 태어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들은 언약 아래 있었지만, 여호수아 5:2–7에 이르기까지 그들 가운데 단 한 명도 할례를 받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앞서 말했듯이 할례는 그 사람이 언약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도 않았다.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지만(창 17:23–25), 그는 전혀 그 언약에 속하지 않았다(창 17:20–21).
그러므로 개혁주의와 장로교 신학자들이 가르치는 침례는 할례와 유사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유사한 것이라면, 자기 자녀들에게 침례를 주지 않은 모든 침례교인들은 죽었어야 할 것이다(출 4:24–25).
할례는 표적이며, 할례는 “인침”이다.
침례는 둘 다 아니다.
이 둘의 유일한 유사점은 둘 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은 사람에게 시행된다는 것이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후에 표적으로 주어졌다.
침례는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한 후에(행 8:36–37),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후에(행 10:47) 모형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영접했다면 하나님의 의를 받은 것이며(롬 3:21–22에 대한 주석 참조),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것이다(엡 1:13). 그러나 유사점은 거기에서 끝난다.
11절과 12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본을 따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적인 복과 아브라함과 그의 선택받은 육신적인 씨에게 주어진 땅에 관한 육신적인 약속을 구별한다.
1.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종류의 자녀들이 있다.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사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아말렉 족속도 에서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녀들이었지만(창 36:12),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때문에 사울에게 모든 아말렉 족속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삼상 15:1–3).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침례인 요한은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자녀들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고 말했다(눅 3:8).
2. 팔레스타인 땅에 관한 육적인 약속과, 메시아를 통하여 이 땅을 다스리게 될 것에 관한 약속은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주어졌다(마 19:28; 옵 17–21; 겔 36장, 48장; 사 11장; 렘 31장; 슼 14장).
어떤 교파나 신조에 속해 있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든 실제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땅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다.
왜냐하면 그 땅은 그들에게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못된 종류의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다.
3.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들은 믿음과 순종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요 5:39).
신약에서 이방인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씨,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녀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갈 3장).
만일 그가 자신의 주님을 받아들여질 만하게 신실하게 섬긴다면, “유대인의 왕”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 때 그분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딤후 2:8–13).
바로 그때, 오직 그때에만, 그리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아브라함의 영적인 씨가 육적인 복들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4장의 문맥에서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전가된 의이다.
아브라함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그 의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구원받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그 믿음이 어디에 두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에 두어진다(롬 4:24–25).
그것은 그분께서 행하신 일에 두는 믿음이지, 우리가 행한 일에 두는 믿음이 아니다.
13 아브라함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이나 그의 씨에게 율법을 통하여 하신 것이 아니요, 믿음의 의를 통하여 하신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라면 믿음은 헛되게 되고 그 약속은 무효가 되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일으키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3 아브라함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이나 그의 씨에게 율법을 통하여 하신 것이 아니요, 믿음의 의를 통하여 하신 것이니라.
그 “약속”은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이다.
“내가 너와 네 뒤에 올 네 씨에게 네가 타국인으로 있는 땅, 즉 카나안의 모든 땅을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며”(창17:8)
신약시대가 시작되면서 인류에는 세 부류가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엡 5:21–32).
새 예루살렘은 “신부인 어린양의 아내”와 연관되어 있다(계 21:9–10).
그러므로 영원에서 교회는 새 예루살렘을 얻는다.
이방인들은 영원에서도 존재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민족들을 그들의 유업으로 나누셨을 때, 그분께서 아담의 아들들을 분리시키셨을 때,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으니,”(신명기 32:8)
이것은 영원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이방 민족은 열둘로 나뉘어지는데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 하나씩 해당하며, 이스라엘은 열세 번째이자 제사장 민족이 된다.
이는 레위가 열세 번째이자 제사장 지파였던 것과 같다.
“또 네가 네 눈을 하늘로 들어 태양과 달과 별들, 즉 하늘의 모든 군상을 보고 그것들을 경배하고, 그것들을 섬기도록 이끌려서는 안 될지니, 그것들은 주 너의 하나님께서 온 하늘 아래 모든 민족들에게 나누신 것이니라.”(신명기 4:19)
새 하늘들은 이방인들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영원에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교회시대에 구원받은 사람들과 함께 새 예루살렘 안에 육체적으로 거하신다.
천년왕국의 통치와 백보좌 심판을 통과하여 살아남은 이방인들은 매달 한 번씩 그 성 안으로 들어가 생명나무의 잎사귀들로 민족적으로 치유를 받는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방식대로 번식할 수 있게 되는데, 천천히 번식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왕의 통치 아래 카나안 땅에 거하게 된다.
만일 원래의 약속(13–14절)이 율법 아래서 모세에게 주어졌다면 믿음은 효력을 잃었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 땅에 대한 약속을 주었다(신 28장).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 아래서 유대인들에게 그 땅을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으로 주신 일방적인 언약이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사람이 응답할 수 없는 꿈 가운데 주어졌다(창 15장처럼).
그런 방식으로 약속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만 달려 있었다.
“율법은 진노를 일으키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