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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제 452 호 2026년 9월 13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25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4장
오전설교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
조도희 담임목사 | 누가복음 15장 11절-24절
오후설교
집안에서 잃어버린 아들
조도희 담임목사 | 누가복음 15장 25절-32절
수요설교
기도가 멈추면 생기는 일
조경재 형제 | 야고보서 5장 13절-16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25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4장
본문 말씀
4:11 그가 할례의 표적을 받은 것은 무할례 때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할례를 받지 아니하고서 믿는 모든 자의 아비가 되게 하려 함이요, 그들도 의롭게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며 12 또 할례자의 아비이니 할례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비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아니하였을 때 가진 믿음의 발자취를 밟는 자들에게도니라.

할례는 하나의 표적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린도전서 1:22)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인 표적이 필요하지 않다.

그의 “인침”은 이미 그의 안에 살아 계신다.

엡 4:30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쓸모없고”(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으되”(갈6:15)

할례가 옛 언약의 표적인 것처럼 침례가 새 언약의 표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구약이든 신약이든, 침례를 표적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베드로전서 3:21에서는 그것을 “모형”(figure)이라고 부르지, 표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개혁주의 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은 침례가 새 언약의 표적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물을 뿌리는 것은 당신이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믿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어 새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물 침례는 당신을 언약의 자녀로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개혁주의 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이 더 이상 카톨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아기들에게 물을 뿌리는 이유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언약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도 그리스도인의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침례를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그 자녀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셔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성경에 철학과 전통을 더할 때 바로 이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으리라.”(막16:16)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하거나 정죄받게 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이다(15절).

침례는 구원하는 믿음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17절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라고 말한 다음 그 표적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침례는 어떤 식으로든 그 표적들과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할례는 누구를 옛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않았다.

그 언약은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에게 주어졌다(창 17:19, 21).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방황하는 동안 태어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들은 언약 아래 있었지만, 여호수아 5:2–7에 이르기까지 그들 가운데 단 한 명도 할례를 받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앞서 말했듯이 할례는 그 사람이 언약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도 않았다.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지만(창 17:23–25), 그는 전혀 그 언약에 속하지 않았다(창 17:20–21).

그러므로 개혁주의와 장로교 신학자들이 가르치는 침례는 할례와 유사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유사한 것이라면, 자기 자녀들에게 침례를 주지 않은 모든 침례교인들은 죽었어야 할 것이다(출 4:24–25).

 

할례는 표적이며, 할례는 “인침”이다.

침례는 둘 다 아니다.

이 둘의 유일한 유사점은 둘 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은 사람에게 시행된다는 것이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후에 표적으로 주어졌다.

침례는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한 후에(행 8:36–37),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후에(행 10:47) 모형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영접했다면 하나님의 의를 받은 것이며(롬 3:21–22에 대한 주석 참조),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것이다(엡 1:13). 그러나 유사점은 거기에서 끝난다.

 

11절과 12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본을 따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적인 복과 아브라함과 그의 선택받은 육신적인 씨에게 주어진 땅에 관한 육신적인 약속을 구별한다.

 

1.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종류의 자녀들이 있다.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사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아말렉 족속도 에서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녀들이었지만(창 36:12),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때문에 사울에게 모든 아말렉 족속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삼상 15:1–3).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침례인 요한은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자녀들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고 말했다(눅 3:8).

 

2. 팔레스타인 땅에 관한 육적인 약속과, 메시아를 통하여 이 땅을 다스리게 될 것에 관한 약속은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주어졌다(마 19:28; 옵 17–21; 겔 36장, 48장; 사 11장; 렘 31장; 슼 14장).

어떤 교파나 신조에 속해 있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든 실제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땅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다.

왜냐하면 그 땅은 그들에게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못된 종류의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다.

 

3.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들은 믿음과 순종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요 5:39).

신약에서 이방인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씨,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녀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갈 3장).

만일 그가 자신의 주님을 받아들여질 만하게 신실하게 섬긴다면, “유대인의 왕”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 때 그분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딤후 2:8–13).

바로 그때, 오직 그때에만, 그리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아브라함의 영적인 씨가 육적인 복들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4장의 문맥에서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전가된 의이다.

아브라함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그 의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구원받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그 믿음이 어디에 두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에 두어진다(롬 4:24–25).

그것은 그분께서 행하신 일에 두는 믿음이지, 우리가 행한 일에 두는 믿음이 아니다.

 

13 아브라함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이나 그의 씨에게 율법을 통하여 하신 것이 아니요, 믿음의 의를 통하여 하신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라면 믿음은 헛되게 되고 그 약속은 무효가 되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일으키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3 아브라함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이나 그의 씨에게 율법을 통하여 하신 것이 아니요, 믿음의 의를 통하여 하신 것이니라.

그 “약속”은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이다.

“내가 너와 네 뒤에 올 네 씨에게 네가 타국인으로 있는 땅, 즉 카나안의 모든 땅을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며”(창17:8)

신약시대가 시작되면서 인류에는 세 부류가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엡 5:21–32).

새 예루살렘은 “신부인 어린양의 아내”와 연관되어 있다(계 21:9–10).

그러므로 영원에서 교회는 새 예루살렘을 얻는다.

이방인들은 영원에서도 존재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민족들을 그들의 유업으로 나누셨을 때, 그분께서 아담의 아들들을 분리시키셨을 때,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으니,”(신명기 32:8)

이것은 영원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이방 민족은 열둘로 나뉘어지는데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 하나씩 해당하며, 이스라엘은 열세 번째이자 제사장 민족이 된다.

이는 레위가 열세 번째이자 제사장 지파였던 것과 같다.

“또 네가 네 눈을 하늘로 들어 태양과 달과 별들, 즉 하늘의 모든 군상을 보고 그것들을 경배하고, 그것들을 섬기도록 이끌려서는 안 될지니, 그것들은 주 너의 하나님께서 온 하늘 아래 모든 민족들에게 나누신 것이니라.”(신명기 4:19)

새 하늘들은 이방인들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영원에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교회시대에 구원받은 사람들과 함께 새 예루살렘 안에 육체적으로 거하신다.

천년왕국의 통치와 백보좌 심판을 통과하여 살아남은 이방인들은 매달 한 번씩 그 성 안으로 들어가 생명나무의 잎사귀들로 민족적으로 치유를 받는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방식대로 번식할 수 있게 되는데, 천천히 번식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왕의 통치 아래 카나안 땅에 거하게 된다.

만일 원래의 약속(13–14절)이 율법 아래서 모세에게 주어졌다면 믿음은 효력을 잃었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 땅에 대한 약속을 주었다(신 28장).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 아래서 유대인들에게 그 땅을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으로 주신 일방적인 언약이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사람이 응답할 수 없는 꿈 가운데 주어졌다(창 15장처럼).

그런 방식으로 약속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만 달려 있었다.

“율법은 진노를 일으키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오전설교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

조도희 담임목사
누가복음 15장 11절-24절
본문 말씀
11 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12 그 중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저에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주소서.’라고 하니, 그 아버지가 자기 살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라. 13 얼마 후에 작은아들이 모든 것을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그곳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자기 재산을 낭비하더라.

명제 :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아버지를 떠나지 말고, 죄의 실체를 바로 보고, 즉시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들려주시는 이 이야기들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모든 혼은 하나님께 소중하다. 당신의 혼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혼들의 구원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시며, 이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새겨 주려고 하신다. 이 자리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주시도록 하고, 그분께 나아와 구원받으라. 또한 구원받은 사람 가운데 주님과 마땅히 누려야 할 만큼 가까운 관계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당신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기 바란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하고, 그분께서 부르실 때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이제 “낭비된 인생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이 비유를 살펴보자.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 아버지를 떠나 자기 뜻대로 살려는 마음은 인생을 낭비하게 한다. “그 중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저에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주소서.’라고 하니”

  이 요구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했을 때, 사실상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내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제 아버지에게 지쳤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가 내 삶을 통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잃어버린 죄인은 바로 이런 태도로 살아간다! “하나님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자기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요구는 이기적인 것이었다. “저에게 주소서!” 그의 관심은 오직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의 인생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잃어버린 죄인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태도는 이것이다. “저에게 주소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공기를 원한다. 그분께서 주시는 음식을 원한다. 그분께서 주시는 물을 원한다. 그분께서 주시는 시간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관여하시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 그분께서는 문자 그대로 자신의 생명을 사람 안에 불어넣으셨다(창 2:7). 그리고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창조하신 자원들을 사용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들의 삶에 그분을 모시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은 원하지만 하나님 자신은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분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받아 누리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허락하실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런 인생의 마지막에는 지옥에서 보내는 영원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정말 당신이 원하는 인생의 최종 결과인가? 잠언 16:25의 말씀을 기억하라.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들이니라.”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 죄의 쾌락을 따라가는 삶은 결국 인생을 무너뜨린다.

  “얼마 후에 작은아들이 모든 것을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그곳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자기 재산을 낭비하더라.”(13) 아들은 아버지가 은혜롭게 마련해 준 재산을 가지고 가서 악하고 방탕하며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면서 모두 탕진해 버렸다. 이 아들이 집을 떠났을 때 그는 자신을 붙잡아 주던 모든 도덕적인 제약도 함께 버리고 떠났다. 그는 육신의 온갖 충동과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았다! 그는 즐거웠는가? 물론이다! 히브리서 11:25도 죄의 쾌락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잠시 동안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고” 그러나 그 쾌락이 “잠시 동안”이라고 말씀한다. 오늘 이 건물 밖에 있는 나무들이 푸르고 생기가 넘쳐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고 잎사귀들도 떨어질 것이다. 인생의 계절은 변한다! 그리고 그 계절이 바뀌면 한때 당신에게 쾌락을 가져다주었던 바로 그것들이 오히려 당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게 될 것이다! 술에 빠져 사는 인생, 성적인 죄를 탐닉하며 사는 인생, 육신의 쾌락을 위해 사는 인생,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인생, 이 모든 인생은 결국 같은 곳에 도달한다! 그렇다. 이런 것들 가운데서 잠시 동안 쾌락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죄가 주는 쾌락의 품에서 잠시 즐기는 것이 하나님 없이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는 것과 바꿀 만큼 가치가 있는가?

  “그가 모든 것을 탕진한 후에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들어 궁핍하게 되기 시작하니”(14) 마침내 그의 돈은 바닥났고, 돈과 함께 친구들도 모두 사라졌다! 쾌락의 도시, 죄의 땅이었던 먼 나라는 이제 “눈물과 걱정과 슬픔”의 땅이 되어 버렸다. 그는 너무 늦게서야 죄에는 엄청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는 분리를 가져온다. 이 아들은 이제 빈털터리가 되어 혼자가 되었으며, 자신에게 사랑밖에는 아무것도 베풀지 않았던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죄 가운데 잃어버린 모든 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사 59:2).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지만(렘 31:3; 요 3:16), 그들의 죄들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이 얼마나 낭비된 인생이며, 얼마나 큰 비극인가!

  죄는 슬픔을 가져온다. “궁핍하게 되기 시작하니” 이 아들의 인생은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 음악이 멈추고, 친구들이 떠나가고, 돈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이 젊은이는 자신에게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필요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죄는 그에게서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갔으며, 먼 나라에서 그를 소망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죄는 자신의 모든 희생자들을 바로 이런 식으로 대한다! 죄는 당신에게 온 세상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실제로 줄 수 있는 것은 절망과 황폐함과 죽음뿐이다(롬 6:23, 약 1:14–15).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위해 살면 반드시 그 대가가 있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그러나 마귀를 위해 살아도 그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마귀를 위해 사는 삶은 당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한다! 망가진 인생, 파탄 난 결혼생활, 산산이 부서진 꿈, 깨어진 신뢰, 건강의 문제, 절망, 우울, 패배, 그리고 죽음. 이 모든 것이 죄가 지불하는 대가에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적절하게 이렇게 말했다. “죄는 당신이 가고 싶었던 것보다 더 멀리 데려가고, 당신이 머물고 싶었던 것보다 더 오래 붙잡아 두며, 당신이 지불하고 싶었던 것보다 더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한다.” 죄는 언제나 그 대가를 반드시 지불한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갈 6:7)!

  “그가 나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더라. 그 주인이 그를 자기 농지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한지라. 그가 돼지가 먹는 곡식 껍질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으나, 그에게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15–16) 자신의 어리석은 결정들 때문에 이 아들은 처참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상황 속에서 몇 가지 귀중한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죄는 수치를 가져온다. 여기 한 유대인 청년이 돼지를 먹이고 있다! 유대인 남자가 이 정도까지 비참한 처지로 내려갔다는 것은 그가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가 자기 삶에서 마음대로 역사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들은 조만간 반드시 수치를 당하게 된다. 낭비된 인생의 수치를 생각해 보라! 낭비된 젊음의 수치를 생각해 보라. 낭비된 기회들의 수치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끔찍한 것은 낭비된 영원의 수치이다! 자신의 재정과 건강과 가족을 죄와 자기 탐닉이라는 제단 위에 희생시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그렇게 사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며, 그렇게 죽는 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다! 언젠가 그들이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이제 그분 안에 거하라. 이는 그가 나타나실 때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며, 그가 오실 때 그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2:28)

  죄는 슬픔을 가져온다. 그 아들 주변에는 그가 살든 죽든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는 홀로 버려졌으며 외로웠다. 그는 굶주렸으며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가! 죄로 인해 산산이 무너진 인생보다 더 슬픈 것은 없다. 한때 가능성으로 가득했던 인생이 사악한 삶이라는 잔인한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없다.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먼 나라로 떠났다가 행복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는 없다! 죄 가운데로 방황해 들어갔다가 나중에 그것을 잘한 일이었다고 기뻐하며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모두 상처 입고, 패배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 자신을 돌아보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 낭비된 인생을 회복하는 길이다.

 “그때 그가 자신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많은 품꾼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고도 남는도다. 그런데 나는 굶어 죽어 가는도다!이제 내가 일어나서 내 아버지께로 가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리니, 아버지여, 내가 하늘을 거역하여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 하고 그가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에게로 갔는데”(17–20)

  이 아들이 먼 나라에서 보낸 모든 시간은 마치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는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지내던 때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기억한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의 종들도 지금의 자기보다 훨씬 나은 형편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인가! 죄 가운데 사는 삶은 정신 나간 삶과 같다! 왜 그런가? 죄인은 자신의 상태와 자신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곳을 보지 못하도록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고후 4:4).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먼 나라에서의 삶에 지쳤다. 그는 아버지와의 교제를 갈망한다. 그는 사랑받고, 먹을 것을 얻고,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는 일어나 집을 향해 출발한다. 그는 집에 도착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 수치를 당할 수도 있다.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죄가 큰 죄인일수록 죄에 대한 깨달음도 더 깊다! 그러나 교회에서 자랐고 선하게 살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말라. 주님께서 당신에게 당신의 상태를 보여 주셨고, 당신에게 구주를 가리켜 보여 주셨으며, 당신이 그분을 믿음으로 영접했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구원받기 위해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먼 나라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당신은 그렇게 했는가?

  “그가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에게로 갔는데 그가 아직도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게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맞추더라. 그때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을 거역하여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나는 더 이상 아들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나이다.’라고 하더라.”(20–21)

  아버지는 달려갔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신속하게 자비를 베푸시고 그에게 닥친 위험을 제거하시기 위해 죄인을 만나러 달려오신다! 그분께서는 문자 그대로 우리와 자신의 진노 사이에 자신을 두셨다(요일 2:2). 아버지는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에게서 나는 냄새에도 불구하고, 그의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버지에게 안겨 준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과 손실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에게 입을 맞추었다! 율법은 죽음을 요구했지만, 은혜는 사랑과 화해의 입맞춤을 베풀었다! 용서하시는 은혜 때문에 장례식 대신 잔치가 열렸다!

  “그러나 그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말하기를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22) 이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내버렸던 모든 것을 아버지의 선하신 은혜로 다시 회복받았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이리로 끌어내어 잡아서 먹고 즐기자. 이는 이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또 잃어버렸다가 찾았음이라.’고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아버지는 이제 낭비된 인생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고 회복된 인생을 기뻐하며 축하하고 있었다! 돼지우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모든 것이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주어졌다.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다! 하늘에 기쁨이 있다. 하나님의 집에 기쁨이 있다. 그리고 구속받은 죄인의 마음에도 기쁨이 있다!

 

  당신의 인생 이야기가 모두 기록되었을 때, 그 이야기는 당신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당신의 이야기는 “낭비된 인생 이야기”​가 되겠는가? 아니면 예수님께 나아와 구원받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되겠는가? 오늘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아직도 먼 나라에서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보다 집으로 돌아오기에 더 좋은 때는 없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받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당신을 깨끗하게 하시고, 당신의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 주시고, 당신의 발에 신을 신겨 주시고, 당신을 자신의 의로 옷 입혀 주시고, 기쁨의 잔치를 시작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아직 구원받지 않았다면 바로 지금 예수님께 나아와야 한다! 이미 구원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당신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로운 공급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드린 것이 언제였는가? 어쩌면 오늘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아버지에게서 멀리 떠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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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잃어버린 아들

조도희 담임목사
누가복음 15장 25절-32절
본문 말씀
25 그때 큰아들은 들에 있었는데, 그가 집 가까이 왔을 때 노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종 하나를 불러서 이것이 무슨 일인지 묻더라. 27 종이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돌아와서 당신의 아버지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무사하고 건강하게 돌아온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니이다.’라고 하니 28 그가 화가 나서 들어가기도 싫어하더라.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나가서 그에게 권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잃어버린 죄인들을 바라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다루고 계신다(1–2절). 이 본문에 나오는 큰아들은 아버지의 집 안에 있지만 잃어버린 사람이다. 몸은 아버지의 집에 있지만 그의 마음은 “먼 나라”에 있다! 당신은 종교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교회의 회원일 수도 있다.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구원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구원받았지만 큰아들과 같은 영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실 때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탕자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씀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다. 집 안에 있다는 사실이 아버지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큰아들은 “들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느라 바빴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으며, 아버지와 큰아들 사이에도 좋은 교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큰아들은 종교적인 엘리트 계층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 그들 역시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으며,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 율법을 따라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그들은 훌륭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는 사람들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실 수 있었다.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종교가 곧 구원은 아니다.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 곧 회심은 아니다. 하나님의 일들 가까이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차고에서 잠을 잔다고 자동차가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다.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마음은 이미 아버지에게서 멀어진 마음이다. “그가 화가 나서 들어가기도 싫어하더라.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나가서 그에게 권하더라.”

  밭에서 힘든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잔치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당황한다. 그가 아는 한, 아버지의 집에서 잔치를 벌일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는 평생 그 집에서 살아왔지만 지금까지 잔치를 벌일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종은 그에게 잃어버렸던 동생이 돌아왔으며,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자 그는 “화가 났다.” 주먹을 꽉 쥐고 분노로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의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서 그의 행동을 보면 아버지와 동생을 향한 그의 원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큰아들은 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자 화를 내며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아버지가 밖으로 나와 부드럽게 그에게 들어오라고 간청한다. 그가 아버지에게 한 대답은 이 아들의 마음 상태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충성스럽게 섬겨 왔는지를 아버지에게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한 번도 잔치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고 불평한다. 결국 핵심은 이것이다. 그는 잃어버렸던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도 관심이 없었다. 큰아들은 탕자가 돌아온 날이 자기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가족으로부터 멀어진 둘째 아들을 다시 가족 안으로 데려오기 위해 나갔던 것처럼, 이제는 큰아들을 위해서도 똑같이 밖으로 나가야 했다.

  이와 똑같은 태도를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죄인이 구원받을 때 기뻐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위치가 위협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성장해도 기뻐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행사하던 영향력과 권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이 자기 개인적인 계획과 충돌한다면 더욱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칭찬과 모든 격려와 모든 영광을 자신이 받기를 원한다. 그들이 교회에서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긴다. 이런 태도가 드러난다면 둘 중 하나이다. 구원받은 사람인 척하는 잃어버린 사람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술 취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영적으로 먼 나라에 있기 위해 꼭 간음하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교회를 섬기고, 찬양하고, 말씀을 설교하며, 그 밖의 어떤 종교적인 일을 하고 있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 오늘 겉으로는 누구보다도 훌륭해 보일 수 있지만, 마음속에는 정욕과 악한 생각과 죄에 대한 욕망 등이 가득할 수도 있다. 겉으로는 원하는 어떤 모습으로든 가장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태이다(마 15:18–19). 구원받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그 새로운 마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러나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의 마음에도 죄와 악이 가득해질 수 있다.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요한일서 1:9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다. 아버지의 마음을 거절하면 집 가까이에 있어도 아버지의 기쁨에는 참여할 수 없다.

  이 아버지는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잃어버렸던 동생이 돌아온 것을 함께 기뻐하며 잔치에 참여하라고 그를 격려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아들아”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올바른 마음으로 이 아들에게 다가갔지만, 그는 아버지를 거절했다! 주님께서도 때때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말씀하시기도 하고, 우리 삶 가운데 있는 죄를 책망하시기 위해 말씀하시기도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교회를 원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좀 더 나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한다. 지옥불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보험 증서를 원한다.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무료 탈출권을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종종 아버지와 그런 친밀함을 원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한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 그분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더 원한다면 더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있다. 당신은 그것을 원하는가?

  아버지는 이 아들이 한 가지 진리를 배우기를 원했다.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시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분께서는 온 우주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식대로 일하지 않으신다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행하고 계신 일 때문에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큰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기뻐한다. 그의 친구들도 기뻐한다. 잃어버린 은전을 찾은 여인은 기뻐한다. 그녀의 친구들도 기뻐한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기뻐한다. 종들도 기뻐한다. 하늘의 거민들도 기뻐한다. 그런데 여기서 비참한 사람은 오직 큰아들 한 사람뿐이다. 그가 비참한 이유는 기뻐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잔치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가 할 일은 안으로 들어가 함께 즐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관심의 중심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리고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밖에 서서 삐치고 있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큰아들은 결국 잔치에 들어갔는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모든 사람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자기 자신이 써야 한다! 이스라엘에게는 이 이야기가 좋지 않게 끝났다. 이 이야기에서 큰아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나타낸다. 그들은 잔치에 들어오기를 거부했고, 결국에는 아버지를 죽였다. 그들은 그분께서 자기들을 다스리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을 죽였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들은 아버지를 죽였으며 이 이야기의 결말을 스스로 써 버렸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겠는가? 오늘 당신이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받아야 한다.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영적인 자리에 있지 않다면, 오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 잔치가 벌어지고 있으며 당신도 초대받았다. 밖에 서서 잔치 소리만 듣고 있지 말라. 안으로 들어와 그 기쁨에 함께 참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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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멈추면 생기는 일

조경재 형제
야고보서 5장 13절-16절
본문 말씀
13 너희 가운데 고난받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시로 노래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가 죄들을 범했어도 그것들을 용서해 주시리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잘못들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비상상황 시 지켜야 할 지침의 핵심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제시되어야 하고, 한 번 교육받았을 때 확실히 기억에 남도록 단순하고 쉬워야 한다. 비상상황 때 따라야 할 절차가 어렵고 복잡하다면 그 위기를 올바로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비행기나 지하철, 배, 기차 등의 운송수단과 모든 건물들마다 탈출구의 위치, 소화기의 위치 및 사용법, 구명조끼의 위치 및 착용법들이 단순한 설명들로 제시되고 있다.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에 위기가 닥쳤을 때 올바르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잊히지 않을 가장 단순한 한 단어로 요약된다.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위기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이다. 기도가 아닌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멈추면 인생의 위기를 제대로 극복할 수 없다.

 

  기도가 멈추면 인생의 위기를 제대로 극복할 수 없다. 첫째로, 기도가 멈추면 고난을 극복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고난받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13절)

고난의 때에 해결책은 한 가지 뿐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지체하지 않고 무릎 꿇는 자는 그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다. 고난의 때에 기도하지 않고 먼저 시도해 볼 수 있는 다른 방향을 향해 뛰쳐 나가려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다. 기도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시도를 다 해보다가 번번이 실패하고 뒤늦게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온다. 그때에는 이미 처음의 어려움보다 훨씬 더 커지고 더 무거워져 있는 것이다. 굉장한 시간 낭비와 비용 낭비, 인생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결코 헛된 도움을 구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 하나님은 없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자들은 헛된 곳에 도움을 구한다. “고난에서 우리를 도우소서. 사람의 도움은 헛되나이다.”(시편 60:11). 하나님께서 고난에서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방향을 제시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렇기에 고난받는 자는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자신의 인생에서 발생한다면 그 즉시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한다.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어떤 구원이 필요한지 하나님께 진지하고 간절하게 말씀드려야 한다. 그 고난이 극복될 때까지 멈추지 말고,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간구해야 한다.

고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생은 없다.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과 같이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느니라.” (욥기 5:7)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인생은 고난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주를 부르는 것이다.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구해 낼 것이요, 너는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시 50:15) 우리가 고난의 날에 불러야 할 이름은 친구, 가족, 은행가, 의사, 정치가, 권세가, 119구조대원이 아니다. 먼저 주 하나님을 불러 구원을 청하고, 이후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방향에 순종하여 고난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며, 고난 중에 나타나시는 도움이시라.” (시편 46:1).

 

기도가 멈추면 인생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않은 즐거움이 가장 위험하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시로 노래할지니라.”(13절)

고난받는 자는 인생의 어떤 때보다 겸손해진다. 그는 진지하게 자신의 무능력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경청하고 순종함으로 그 고난을 극복해나갈 때 그는 역설적으로 가장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미 바짝 엎드려 있는 사람을 쓰러뜨리기는 아주 어렵다. 그러나 이제 그 고난을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시고, 한숨 돌리게 되면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찬양해야 하거늘, 엉뚱한 생각에 빠지게 된다. 말로 꺼내진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은연 중에 ‘기도하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이렇게 해결되었을지 몰라.’, ‘이 고난을 해결한 것은 나의 공로가 아주 컸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난이 해결되고 즐거움이 찾아왔을 때 제대로 반응하고 대처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고난의 때보다 더 위험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때, 즐거움의 때에 합당한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고, 교만함에 빠져 멸망하게 된다. 가장 죄를 짓기 쉬운 때는 고난의 때보다 즐거움과 안락 가운데 방심할 때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영광과 즐거움의 때에 멸망했는가! 성경의 많은 인물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악한 즐거움의 때에 멸망에 처했다. 느부캇넷살왕은 바빌론 왕국을 바라보며 ‘이것이 내가 내 권세의 힘으로 내 위엄의 영예를 위하여 왕국의 집을 건설한 위대한 바빌론이 아니냐?’(단4:30) 고 말했다. 그 즉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왕국과 권세를 비롯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짐승처럼 되었다. 그의 아들 벨사살왕도 일천명의 귀족들과 연회를 베풀며 자신을 높이고 이방신들을 찬양했다. 그때 글 쓰는 손가락이 나와 벽에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이라는 글씨를 써 벨사살왕의 심판을 예언했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에 죽임당했다(단 5장). 헤롯왕도 왕복을 입고 왕좌에서 연설할 때 ‘저것은 신의 음성이지 사람의 음성이 아니다’는 사람들의 찬사를 듣고(행12:2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자 주의 천사가 그를 쳤고, 그는 즉사했다. 어리석은 부자도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 즐거워하다가 멸망했다. ‘내 혼아,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물건들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혼을 네게서 앗아가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시니라.(눅12:19,20)

우리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즐거움의 때를 올바로 반응하지 못하면 교만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 즐거워하는 자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찬양으로 표현해야 한다. 본문의 시는 성경의 시편을 말하는데, 시편의 저자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으면서 간절하게 기도를 드린다. 이는 곧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노래로 바뀌어 있다. 이처럼 고난의 때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즐거울 때의 찬양의 노래와 동일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시편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가사와 아름다운 운율이 담긴 좋은 찬송가가 있다. 즐겁고 기쁠 때에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림으로써 그 즐거움의 때를 가장 올바르게 반응하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는 사람의 합당한 태도와 반응이고, 이렇게 할 때에 그 즐거움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께 찬양하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생명을 연장해주시고, 세상이 가져다 줄 수 없는 참된 만족과 화평을 주신 하나님께 항상 노래하고 찬양하라.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로 기도하고, 그 기도를 찬양과 노래로 승화시키라! 가족과 성도 가운데 찬양을 부르자고 잘 제안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참 바람직한 것이다. 즐거워하는 자는 시로 노래해야 한다. 역으로 노래하는 자는 즐거워할 수 있다. 상황은 비록 그렇지 않다 해도, 명백하고 객관적으로 고난의 때라 해도 성도의 입에서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올 때 그의 마음은 그 고난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들어갔을 때 노래했다. 그 찬양이 그들을 속박에서 구원하게 했다. 즐거워할 때 뿐만 아니라, 고난의 때에도 노래하고 찬양하는 성도는 마귀가 두려워하는 강한 군사이다.

 

기도가 멈추면 인생의 위기를 올바로 극복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기도가 멈추면 믿음으로 질병에서 일어날 수 없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가 죄들을 범했어도 그것들을 용서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잘못들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14~16절)

병들었을 때의 원칙은 기도의 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병들었을 때 바로 병원에 달려가는 것이 순서가 아니다. 일본의 한 명의가 자신이 환자에게 내린 진단과 처방이 적중할 확률이 40%밖에 되지 않는다고 양심고백을 했다. 그러자 주위의 반응은 그 의사를 돌팔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40%의 적중확률이 “신의 영역”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복잡한 신체의 질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치료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사이신 하나님께서는 못 고치시는 병이 없으시며, 그분은 죽은 자도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병의 원인, 해결책을 정확히 아시며 실수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주께 나아가 먼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치유의 능력으로 낫게 해주시던지, 아니면 적합한 의료행위와 약을 통해 낫게 해주시는 것이다. 일단 질병 자체가 고난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고난받는 자는 기도하라는 명령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병든 자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자들을 청해야 한다. 병든 자를 위해서는 다른 이들이 서로 같이 기도해줘야 한다. 보통 병든 자는 육체의 연약함과 함께 혼과 영이 동시에 영향을 받아 약화된다. 믿음도 약해지는 것이다. 그때 그를 위해 기도의 동역이 반드시 필요하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할 수 있다. 주님께서 반드시 이 병을 치유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교회의 장로들은 믿음의 기도에 더 강한 이들이다. 이들은 많은 간증을 자신과 다른 성도들의 삶을 통해 가지고 있을 것이고, 말씀 안에 믿음 안에 굳게 서 있는 이들의 기도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치유의 능력을 간증으로 경험하여 믿음이 더 성장해야 한다. 주께서 그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라. 결코 신유의 능력이 아니다. 의사의 의학이 아니다. 발전된 과학기술도, 우연도, 무당의 굿도 아니다. 주께서 그 병든 자를 일으키시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에서 병든 자의 치유에 대해서 강조되는 것은 죄와 잘못을 자백하고 용서받는 것이다. 병든 자의 병은 죄를 지어서 온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애초에 인간의 질병은 잘못된 출생으로 죄 가운데 태어나고, 저주받은 땅에서 태어나 사망을 향해 가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가 지은 죄나 잘못으로 병을 얻어 사망에 가까워진다. 죄의 삯은 사망인 것이다(롬3:23). 하지만 죄나 잘못으로 인해 온 병이 아닌 경우도 있다. 자연스런 노화의 과정이나, 혹은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을 수 있다. 욥이 그러했고, 바울의 경우가 그러했으며,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병들어 죽게 된 에파프로디도, 위장과 자주 앓는 질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쓰라고 권면받은 디모데 등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몸이 아픈 많은 이들이 있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이를 보고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가 죄를 지은 것이니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아니면 그의 부모니이까?”(요한복음 9:2).”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요, 오직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라.”라고 하셨다. 이처럼 병의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병을 “잘못과 죄 때문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자신의 병에 대해서 판단할 때에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돌아봐야 한다. 하나님께 병의 원인이 자신의 죄나, 잘못 때문은 아닌지 진지하게 여쭤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과오와 잘못된 행실이 있다면, 반드시 회개와 자백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함 받아야 한다! “그가 죄들을 범했어도 그것들을 용서해주시리라”(15절),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9)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질병에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본문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죄로 인해 약해지고 병들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을 때이다.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야 한다. 내가 건강하고 내 가족이 건강하면 기도를 멈추면 되는 것인가? 주변에 몸이 아프고 마음이 병들고, 믿음의 병에 걸린 지체가 있는데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의 짐을 지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기도해야 한다.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병든 자들은 자신만의 기도로 그 병에서 일어나기 힘들다. 그들의 몸이 약해져 있고, 마음이 지쳤는데 어떻게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겠는가?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즉각적으로 병든 이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기 위해 나 자신이 늘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내가 똑바로 살고 있지 않는데 갑자기 내가 아프거나, 가족이나 성도가 아플 때 확신있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 효과적인 기도는 말씀에 입각한 기도이며, 나아야 하는 이유를 성경적으로 주장하는 기도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자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그가 몸이 아파 누워있으면 안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한 일에 열의가 있는 성도입니다, 그를 속히 낫게 해 주십시요, 그는 하나님의 소유가 아닙니까? 그를 일으켜주십시오.” 열렬한 기도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이다. 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가져와야 한다. 간절하게 꾸준히 매달리는 기도이다.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인생의 위기는 끊임없이 다가온다. 그 위기에 대처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늘 깨어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가 멈추면 위기와 고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기도가 멈추면 고난이 쓰라린 상처와 비탄으로 남게 된다. 기도가 멈추는 것은 곧 재앙을 의미한다. 기도는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멈추지 않는 기도가 나의 믿음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지킬 수 있다. 멈추지 않는 기도가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나와, 나의 주위에 소중한 성도를 건강하게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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