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씀
바울이 묻는 질문은 “누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인가(“할례받은 자들에게만”)?
아니면 이방인들(“할례받지 아니한 자들”)도 그 복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간다.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았는가?
할례받기 전이었는가, 아니면 할례받은 후였는가?
그는 할례받지 않은 상태였던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7장에 이르러서야 할례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아브라함에게 전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유대인이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높은 아버지”에서 “많은 민족들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창 17:5).
이 이름의 변화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오직 한 아들인 이삭에게만 이어졌기 때문이다(창 17:21).
할례는 아브라함의 선택받은 씨와 맺은 언약의 표적이었다.
이삭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 둘 다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야곱에게로 이어졌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언약이 그 열두 아들과 그들의 후손 모두에게 이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열두 아들을 선택하셔서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루게 될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았을 때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할례받지 않은 히브리인이었다.
그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았을 때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언약과 할례는 그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이었다.
4:11 그가 할례의 표적을 받은 것은 무할례 때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할례를 받지 아니하고서 믿는 모든 자의 아비가 되게 하려 함이요, 그들도 의롭게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며
12 또 할례자의 아비이니 할례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비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아니하였을 때 가진 믿음의 발자취를 밟는 자들에게도니라.
할례는 하나의 표적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린도전서 1:22)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인 표적이 필요하지 않다.
그의 “인침”은 이미 그의 안에 살아 계신다.
엡 4:30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쓸모없고”(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으되”(갈6:15)
할례가 옛 언약의 표적인 것처럼 침례가 새 언약의 표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구약이든 신약이든, 침례를 표적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베드로전서 3:21에서는 그것을 “모형”(figure)이라고 부르지, 표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개혁주의 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은 침례가 새 언약의 표적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물을 뿌리는 것은 당신이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믿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어 새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물 침례는 당신을 언약의 자녀로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개혁주의 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이 더 이상 카톨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아기들에게 물을 뿌리는 이유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언약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도 그리스도인의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침례를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그 자녀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셔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성경에 철학과 전통을 더할 때 바로 이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으리라.”(막16:16)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하거나 정죄받게 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이다(15절).
침례는 구원하는 믿음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17절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라고 말한 다음 그 표적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침례는 어떤 식으로든 그 표적들과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할례는 누구를 옛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않았다.
그 언약은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에게 주어졌다(창 17:19, 21).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방황하는 동안 태어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들은 언약 아래 있었지만, 여호수아 5:2–7에 이르기까지 그들 가운데 단 한 명도 할례를 받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앞서 말했듯이 할례는 그 사람이 언약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도 않았다.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지만(창 17:23–25), 그는 전혀 그 언약에 속하지 않았다(창 17:20–21).
그러므로 개혁주의와 장로교 신학자들이 가르치는 침례는 할례와 유사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유사한 것이라면, 자기 자녀들에게 침례를 주지 않은 모든 침례교인들은 죽었어야 할 것이다(출 4:24–25).
할례는 표적이며, 할례는 “인침”이다.
침례는 둘 다 아니다.
이 둘의 유일한 유사점은 둘 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은 사람에게 시행된다는 것이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후에 표적으로 주어졌다.
침례는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한 후에(행 8:36–37),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후에(행 10:47) 모형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영접했다면 하나님의 의를 받은 것이며(롬 3:21–22에 대한 주석 참조),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것이다(엡 1:13). 그러나 유사점은 거기에서 끝난다.
11절과 12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본을 따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적인 복과 아브라함과 그의 선택받은 육신적인 씨에게 주어진 땅에 관한 육신적인 약속을 구별한다.
1.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종류의 자녀들이 있다.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사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아말렉 족속도 에서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녀들이었지만(창 36:12),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때문에 사울에게 모든 아말렉 족속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삼상 15:1–3).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침례인 요한은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자녀들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고 말했다(눅 3:8).
2. 팔레스타인 땅에 관한 육적인 약속과, 메시아를 통하여 이 땅을 다스리게 될 것에 관한 약속은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주어졌다(마 19:28; 옵 17–21; 겔 36장, 48장; 사 11장; 렘 31장; 슼 14장).
어떤 교파나 신조에 속해 있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든 실제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땅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다.
왜냐하면 그 땅은 그들에게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못된 종류의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다.
3.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들은 믿음과 순종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요 5:39).
신약에서 이방인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씨,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녀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갈 3장).
만일 그가 자신의 주님을 받아들여질 만하게 신실하게 섬긴다면, “유대인의 왕”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 때 그분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딤후 2:8–13).
바로 그때, 오직 그때에만, 그리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아브라함의 영적인 씨가 육적인 복들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4장의 문맥에서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전가된 의이다.
아브라함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그 의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구원받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그 믿음이 어디에 두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에 두어진다(롬 4:24–25).
그것은 그분께서 행하신 일에 두는 믿음이지, 우리가 행한 일에 두는 믿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