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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제 451 호 2026년 9월 06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24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4장
오전설교
찾을 때까지
조도희 담임목사 | 누가복음 15장 8-10절
오후설교
교회를 세우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조도희 담임목사 | 에베소서 4장 11절-32절
수요설교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
조도희 담임목사 | 디모데후서 2장 15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24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4장
본문 말씀
9 그러면 이러한 복이 할례자에게만이냐? 아니면 무할례자에게도냐? 이는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노라.”고 했음이라. 10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그가 할례 때였느냐? 아니면 무할례 때였느냐? 할례 때가 아니라 무할례 때였느니라.

바울이 묻는 질문은 “누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인가(“할례받은 자들에게만”)?

아니면 이방인들(“할례받지 아니한 자들”)도 그 복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간다.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았는가?

할례받기 전이었는가, 아니면 할례받은 후였는가?

그는 할례받지 않은 상태였던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7장에 이르러서야 할례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아브라함에게 전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유대인이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높은 아버지”에서 “많은 민족들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창 17:5).

이 이름의 변화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오직 한 아들인 이삭에게만 이어졌기 때문이다(창 17:21).

할례는 아브라함의 선택받은 씨와 맺은 언약의 표적이었다.

이삭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 둘 다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야곱에게로 이어졌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언약이 그 열두 아들과 그들의 후손 모두에게 이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열두 아들을 선택하셔서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루게 될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았을 때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할례받지 않은 히브리인이었다.

그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았을 때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언약과 할례는 그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이었다.

 

4:11 그가 할례의 표적을 받은 것은 무할례 때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할례를 받지 아니하고서 믿는 모든 자의 아비가 되게 하려 함이요, 그들도 의롭게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며

12 또 할례자의 아비이니 할례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비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아니하였을 때 가진 믿음의 발자취를 밟는 자들에게도니라.

 

할례는 하나의 표적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린도전서 1:22)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인 표적이 필요하지 않다.

그의 “인침”은 이미 그의 안에 살아 계신다.

엡 4:30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쓸모없고”(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으되”(갈6:15)

할례가 옛 언약의 표적인 것처럼 침례가 새 언약의 표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구약이든 신약이든, 침례를 표적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베드로전서 3:21에서는 그것을 “모형”(figure)이라고 부르지, 표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개혁주의 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은 침례가 새 언약의 표적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물을 뿌리는 것은 당신이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믿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어 새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물 침례는 당신을 언약의 자녀로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개혁주의 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이 더 이상 카톨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아기들에게 물을 뿌리는 이유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언약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도 그리스도인의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침례를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그 자녀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셔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성경에 철학과 전통을 더할 때 바로 이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으리라.”(막16:16)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하거나 정죄받게 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이다(15절).

침례는 구원하는 믿음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17절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라고 말한 다음 그 표적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침례는 어떤 식으로든 그 표적들과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할례는 누구를 옛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않았다.

그 언약은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에게 주어졌다(창 17:19, 21).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방황하는 동안 태어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들은 언약 아래 있었지만, 여호수아 5:2–7에 이르기까지 그들 가운데 단 한 명도 할례를 받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앞서 말했듯이 할례는 그 사람이 언약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도 않았다.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지만(창 17:23–25), 그는 전혀 그 언약에 속하지 않았다(창 17:20–21).

그러므로 개혁주의와 장로교 신학자들이 가르치는 침례는 할례와 유사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유사한 것이라면, 자기 자녀들에게 침례를 주지 않은 모든 침례교인들은 죽었어야 할 것이다(출 4:24–25).

 

할례는 표적이며, 할례는 “인침”이다.

침례는 둘 다 아니다.

이 둘의 유일한 유사점은 둘 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은 사람에게 시행된다는 것이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후에 표적으로 주어졌다.

침례는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한 후에(행 8:36–37),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후에(행 10:47) 모형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영접했다면 하나님의 의를 받은 것이며(롬 3:21–22에 대한 주석 참조),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것이다(엡 1:13). 그러나 유사점은 거기에서 끝난다.

 

11절과 12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본을 따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적인 복과 아브라함과 그의 선택받은 육신적인 씨에게 주어진 땅에 관한 육신적인 약속을 구별한다.

 

1.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종류의 자녀들이 있다.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사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아말렉 족속도 에서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녀들이었지만(창 36:12),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때문에 사울에게 모든 아말렉 족속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삼상 15:1–3).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침례인 요한은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자녀들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고 말했다(눅 3:8).

 

2. 팔레스타인 땅에 관한 육적인 약속과, 메시아를 통하여 이 땅을 다스리게 될 것에 관한 약속은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주어졌다(마 19:28; 옵 17–21; 겔 36장, 48장; 사 11장; 렘 31장; 슼 14장).

어떤 교파나 신조에 속해 있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든 실제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땅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다.

왜냐하면 그 땅은 그들에게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못된 종류의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다.

 

3.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들은 믿음과 순종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요 5:39).

신약에서 이방인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씨,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녀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갈 3장).

만일 그가 자신의 주님을 받아들여질 만하게 신실하게 섬긴다면, “유대인의 왕”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 때 그분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딤후 2:8–13).

바로 그때, 오직 그때에만, 그리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아브라함의 영적인 씨가 육적인 복들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4장의 문맥에서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전가된 의이다.

아브라함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그 의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구원받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그 믿음이 어디에 두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에 두어진다(롬 4:24–25).

그것은 그분께서 행하신 일에 두는 믿음이지, 우리가 행한 일에 두는 믿음이 아니다.

 

오전성경공부 동영상 설교
오전설교

찾을 때까지

조도희 담임목사
누가복음 15장 8-10절
본문 말씀
8 또 어떤 여인이 은 열 개를 가졌다가 한 개를 잃어버리면 촛불을 켜서 찾을 때까지 집을 쓸고 샅샅이 찾지 아니하겠느냐? 9 그리하여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함께 불러,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내가 잃어버린 은 한 개를 찾았도다.’라고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의 면전에 기쁨이 있느니라.”고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생애는 은혜를 베푸시는 삶이었다. 누가복음 15장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은혜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위대한 장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장의 배경은 매우 중요하다. 누가복음 15:1–2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때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평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고 하더라.” 그들의 이러한 불평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다. 곧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 동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이다. 이 세 가지 비유는 각각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준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죄인들을 더럽고, 버려도 되며, 위험한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잃어버렸지만, 가치가 있으며, 되찾을 수 있는 존재​로 보셨다.

  은화 열 개를 가진 한 여인이 그중 하나를 잃어버린 것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그 여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그래도 아직 아홉 개나 남아 있잖아.”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촛불을 켜고, 집을 쓸며, 그 잃어버린 은화를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았다. 그리고 잃어버린 은화를 발견했을 때 기뻐하였다. 이 짧은 비유는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준다. 잃어버린 죄인들은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으시며, 그들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는 기뻐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잃어버린 한 혼을 소중히 여긴다. “또 어떤 여인이 은 열 개를 가졌다가 한 개를 잃어버리면…”

  그 여인에게는 은화 열 개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 하나가 중요했다. 그 은화는 금전적인 가치가 있었지만, 어쩌면 개인적으로 소중한 의미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중동에서는 남녀가 결혼할 때 오늘날의 부부들처럼 서로 반지를 교환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신부를 위한 지참금이 지불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부의 아버지가 남편에게 지불하기도 했고, 남편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지불하기도 했다. 아내는 그 지참금 가운데 일부의 은전을 가지고 목걸이를 만들어 착용했는데, 그것은 남편과의 결혼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값을 치르고 사서 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타나는 상징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이방인 신부이다.

  여기에서 실제로 그런 경우였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요점은 분명하다. 잃어버린 것은 여전히 가치가 있었다. 그 은화는 잃어버려졌지만 가치 없는 것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타락한 인류를 보여 주는 강력한 그림이다. 죄가 사람을 훼손시켰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까지 지워 버린 것은 아니다. 창세기 1:27은 말씀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으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느니라.” 잃어버린 죄인은 영적으로 죽어 있고, 도덕적으로 더럽혀져 있으며, 자기 자신을 회복시킬 능력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은 존재는 아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멸시받았지만, 그리스도께는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 은화는 그 여인의 소유로서 그녀에게 있어야 했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죄가 사람에게 행한 일이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켰다. 이사야 59:2은 말씀한다.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 그 은화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다. 죄인도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는 사람을 어둠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멀어짐과 위험 가운데로 끌고 갔다.

  우리는 결코 바리새인들이 잃어버린 사람들을 바라보았던 방식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을 자신들을 방해하는 사람들로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혼들로 보셨다. 그들은 더러움을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치를 보셨다. 그들은 피해야 할 사람들을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구해 내야 할 사람들을 보셨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시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는가? 술 취한 사람, 중독자, 회의론자, 부도덕한 사람, 교만한 사람, 종교적인 위선자, 마음이 완고한 이웃, 방황하는 자녀, 함께 지내기 힘든 직장 동료, 그리고 복음에 무관심한 가족까지도 모두 영원한 가치를 지닌 혼들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잃어버린 한 혼을 찾기 위해 수고한다. “촛불을 켜서 찾을 때까지 집을 쓸고 샅샅이 찾지 아니하겠느냐?”

  그 여인은 세 가지 일을 한다. 그녀는 촛불을 켠다. 집을 쓴다. 부지런히 찾는다. 이것은 대충 한번 둘러보는 것이 아니다. 마지못해 하는 노력도 아니다. 그녀는 잃어버린 것을 반드시 찾겠다고 결심하였다. 당시의 집들은 흔히 작고 어두웠으며, 창문이 없거나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바닥은 단단하게 다져진 흙으로 되어 있거나 짚이 깔려 있었을 수도 있다. 작은 은화 하나는 어두운 곳에 쉽게 떨어져 보이지 않게 되거나 먼지 속에 묻힐 수 있었다. 그래서 여인은 등불을 켜고 주의 깊게 찾기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 준다. 죄인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로마서 3:11은 말씀한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찾으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 또 구원하려는 것이라.” 부지런히 찾는 것을 말하는 “샅샅이 찾는다”는 표현은 주의 깊고, 간절하며, 철저하게 찾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수동적인 관심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이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님께서는 단지 멀리서 구원을 선포하시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는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아들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잃어버린 아들이 회개하고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사용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세상에 들어오셨고,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으며, 율법 아래서 사셨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죄인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부르신다.

  그녀는 “그것을 찾을 때까지” 계속 찾는다. 얼마나 끈질긴가! 얼마나 확고한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결혼반지를 잃어버린 한 여인을 생각해 보라. 그녀는 “그래도 다른 보석들이 있으니 괜찮아.”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춘다. 자신이 지나온 곳을 다시 살펴본다. 가구 밑을 들여다본다. 불을 켠다. 구석구석을 쓸어 본다. 이미 찾아본 곳도 다시 확인한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 은화가 그녀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찾는 수고는 잃어버린 것의 가치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구속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위대한 증거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알게 된다. 또한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된다. 잃어버린 죄인이 하나님께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기꺼이 지불하신 대가를 볼 때 알 수 있다.

  당신은 먼지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어둠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스스로 자신을 회복시킬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능력 있는 구주이시다. 그분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죄인들도 구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내신다. 하늘이 잃어버린 죄인들을 되찾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역시 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구령은 단순히 교회가 유지해야 할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구령은 잃어버린 자들을 되찾고자 하는 열정이다. 우리는 복음의 촛불을 켜야 한다. 기도로 집을 쓸어야 한다. 그리고 증거와 긍휼과 설교와 개인적인 관심을 통하여 잃어버린 혼들을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잃어버린 한 혼이 구원받을 때 기뻐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함께 불러,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하자.”

  여인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뀐다. 잃어버렸던 은화를 찾았다. 없어졌던 것을 되찾았다. 어둠 속에 있던 것이 다시 그녀의 소유로 돌아왔다. “내가 잃어버린 은 한 개를 찾았도다.”(9) 그녀는 “은 하나를 찾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잃어버렸던 은 하나를 찾았도다.” 여기에는 소유와 애정과 기쁨이 담겨 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이렇게 묘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못해 죄인들을 받아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인하여 기뻐하신다.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을 때 바리새인들은 불평했다. 그러나 하늘은 기뻐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대조이다. 종교적인 교만은 은혜를 불평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은혜를 기뻐한다.

  그녀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함께 불러 모은다. 은혜는 함께 나누는 기쁨을 만들어 낸다. 한 죄인이 구원받으면 그것은 단지 그 사람만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교회가 기뻐한다. 설교자가 기뻐한다. 하나님의 가족이 기뻐한다. 그리고 하늘이 기뻐한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으니 우리가 기쁘도다.”(시편 126:3) 우리는 한 죄인의 회심을 바라보는 하늘의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때때로 교회들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보다

  건물이나 재정이나 많은 사람들의 모임이나 음악이나 행사에 더 흥분한다. 그러나 하늘의 기쁨의 중심에는 잃어버린 혼의 구속이 있다. 한 죄인이 회개할 때 우리는 은혜의 기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눈먼 혼이 보게 된다. 죽었던 죄인이 살아난다. 반역자가 굴복한다. 방황하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온다. 잃어버린 은화를 찾는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의 면전에 기쁨이 있느니라.”(10)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의미를 말씀하신다. 여인은 되찾은 은화 하나로 인하여 기뻐했다. 하늘은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기뻐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자의 가치를 기억하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라. 복음의 빛을 비추라.

  여인은 촛불을 켰다. 기도와 증거를 통하여 부지런히 찾으라. 죄인들이 회개할 때 기뻐하라. 한 죄인의 회심을 더 이상 기뻐하지 않는 교회는 하늘의 심장 박동으로부터 멀어진 교회이다.

 

본문은 단순히 한 여인과 은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죄인들을 찾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다. 은화는 잃어버려졌고, 무력했으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스스로 돌아올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여인은 그것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찾았다. 이것이 은혜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자비의 빛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타락한 우리의 비참한 상태 가운데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갈보리까지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한 값을 지불하셨다. 은이나 금으로 지불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지불하셨다. 마찬가지로 구속받은 모든 죄인의 간증은 이것이다. “나는 한때 잃어버린 자였으나 이제는 발견되었다.”

오전설교 동영상 설교
오후설교

교회를 세우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조도희 담임목사
에베소서 4장 11절-32절
본문 말씀
11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여 13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 됨에 도달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교회에 영적 지도자들을 주신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영적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기 자녀들이 자라고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며 기뻐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자녀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갓난아이의 상태를 벗어나 장성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실 때 기뻐하신다. 자녀의 출생만큼 기쁜 일도 없다. 그러나 그 자녀의 성장이 멈춘다면 그보다 더한 비극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인 유아실에서 나와 영적인 전쟁터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젖과 턱받이와 기저귀의 영역을 떠나 단단한 음식과 전투와 헌신의 영역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가지고 계신 계획은 그들 모두가 영적으로 성숙하는 것이다! 성숙해 가는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다.

 

  성숙해 가는 그리스도인은 진리 위에 굳게 섬으로써 교회를 세운다(14–16).

  그는 교리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제부터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요, 사람들의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으로 그들이 속이려고 숨어서 기다리는 온갖 교리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다니지 아니하고”(14) 성숙해 가는 성도는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알고, 왜 그것을 믿는지도 아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원수의 거짓말과 속임수와 올무에 미혹되지 않는다(딤후 2:15; 3:16–17).

  그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꾸준히 성장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우리가 모든 일에 성장하여 그에게 이르리니 그는 머리시며 곧 그리스도시니라.”(15). 성장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강한 이끌림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성경의 가르침에 맞추어 간다.

  그는 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다. “그로부터 온몸이 각 부분의 분량 안에서의 효과적인 역사를 따라 각 마디를 통하여 공급을 받아 알맞게 결합되고 체격이 형성되어 몸을 성장시키며 사랑 안에서 몸 자체를 세워 나가느니라.”(16) 성장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자신의 능력을 다하여 그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기를 원한다. 성도가 위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는 것은 영적 성숙의 표시이다. 성숙해 가는 성도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다! 진리 위에 굳게 서 있는 성도가 교회를 세운다.

 

  성숙해 가는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감으로써 교회를 세운다(17–24).

  그는 이전에 걸었던 어둠의 길을 떠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고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너희는 더 이상 다른 이방인들처럼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지 말라. 그들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 안에 있는 무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떨어졌고 그들의 명철은 어두워졌으며 감각을 상실하여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어 욕심으로 모든 불결한 것을 행하느니라.”(17–19절) 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면, 그는 문자 그대로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받는다. 새로운 출생을 통해 성숙해 가는 성도는 더 이상 어둠 가운데 있지 않다. 이제 과거의 삶의 방식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어린아이같이 말하고 어린아이같이 이해하며 어린아이같이 생각하였으나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어린아이의 일들을 버렸노라.”(고전13:11)

  그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바와 같이 과연 너희가 그에게서 듣고 또 그에 의해 배웠을진대 이전 행실에 관해서는 기만의 욕망에 따라 썩어진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20–22절) 성도는 새로운 생명을 받았으며, 그 생명의 변화는 그의 행실의 변화로 나타난다.

  그는 생각이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는다. “너희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23–24절) 날이 갈수록 그 시체가 죽어 있다는 증거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새로운 성도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게 된다. 그는 마음의 변화를 경험했으며, 그 변화는 생각의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그 결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 안에 새로운 열망을 넣어 주셔서 그들이 과거에 살던 방식과는 다르게 살기를 원하게 하신다.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교회를 세운다.

 

  성숙해 가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함으로써 교회를 세운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더 이상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일하게 하라. 그가 손수 선한 일을 하여 궁핍한 자를 구제할 수 있게 하라.”(28절)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대신, 성도는 자신의 손으로 일하여 돈을 벌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는 권면을 받는다. 성숙해 가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이다. “각자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남의 일도 돌아보라.”(빌 2:4).

  그는 상처받았을 때 그리스도처럼 반응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기 위해서이다. “화를 내되 죄는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노를 품지 말며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26-27) “모든 신랄함과 분개와 분노와 고함지르는 것과 욕설을 모든 악의와 함께 너희로부터 버리라. 너희는 서로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며 서로 용서하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31-32) 성숙해 가는 성도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자신의 영적인 삶에 문제를 일으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27절은 죄를 짓지 않으면서 분노하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분노는 마귀가 우리의 삶을 공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해 준다. 마귀에게 조금이라도 틈을 내어 주면 그는 결국 우리를 지배하려 들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방식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각자 자기의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이기 때문이라.”(25) 우리가 다른 성도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게 거짓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입에서 쏟아져 나오려고 하는 악한 말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말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을 세워 주기 위해 말해야 한다. “너희 입에서 어떠한 더러운 말도 나오지 아니하게 하고 오직 서로를 세우는 데 필요한 좋은 것만을 말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29) 왜 말을 조심하는가? “서로를 세우는 데 필요한 좋은 것만을 말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은 말은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하며(30) 교회를 방해한다! 성숙한 성도는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혀를 통제하려고 힘쓴다(약 1:26; 3:1–12).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하는 성도가 교회를 세운다.

 

  어떤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인가? 많이 아는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 위에 굳게 서 있는 사람이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자신만 성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 때문에 교회가 세워진다. “나는 이 교회를 세우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 교회가 나를 계속 돌보아 주어야만 하는 사람인가?” 성숙의 궁극적인 증거는 단순히 “내가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가”가 아니라, “나의 성장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이 얼마나 세워지고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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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

조도희 담임목사
디모데후서 2장 15절
본문 말씀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잘 공부하여 신실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꾼을 찾으신다.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올바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을 양육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잃어버린 혼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세우며, 교회를 세우고, 다음 세대의 일꾼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 말씀을 사랑하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 좋은 교사가 되기 전에 먼저 좋은 학생이 되어야 한다. 성경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경을 배우기를 멈춘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르칠 것도 고갈된다. 성경 교사의 가장 위험한 순간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이제 성경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평생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이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을 펼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 앞에 앉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태도는 지적인 호기심보다 말씀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성경 교사에게 성경은 먼저, 교재가 아니라 음식이어야 한다. 설교하기 위해서만 성경을 읽는 사람은 위험하다. 가르칠 내용을 찾기 위해서만 성경을 읽는 것도 위험하다. 먼저 내가 먹어야 한다. 먼저 내가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먼저 말씀이 나를 책망해야 한다. 먼저 말씀이 나를 바로잡아야 한다. 먼저 말씀이 내 생각과 태도와 생활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올바른 본문, 올바른 해석, 올바른 적용이 있어야 말씀이 효과적으로 역사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질문해야 한다. 누가 말하고 있는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언제 말하고 있는가? 어떤 상황에서 말하고 있는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이 말씀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는가, 아니면 영적인 교훈으로 적용되는가? 성경을 잘못 다루는 것은 위험하다 베드로후서 3:16은 무식하고 불안정한 사람들이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경고한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았다. 이것이 성경 교사 과정에서 길러야 할 습관이다. 성경으로 성경을 확인하는 습관이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성경 교사가 빠지기 쉬운 가장 큰 함정이 하나 있다. 지식과 영적 능력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알면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성경 지식이 증가하는데 인격이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성경 구절을 많이 외우는데 교만해질 수도 있다.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성경 토론에서는 이기면서 자신의 육신에게는 질 수도 있다. 나 자신에게 먼적 적용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기 전에 먼저 나에게 설교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기 전에 먼저 내가 순종해야 한다. “내가 갈 때까지 읽는 것과 권고하는 것과, 교리에 전념하라.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하라.” “네 자신과 교리”, 교리만 주의하라고 하지 않았다. 자신도 살피라고 했다. 성경 교사에게는 바른 교리와 바른 삶,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만 하면 학자는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까지 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 배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이것이 성경 교육의 목표다. 배우는 사람을 넘어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경교사 과정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린이에게 가르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청소년에게 가르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새신자를 가르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정에서 자녀에게 가르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일대일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구령자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주일학교 교사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공부를 인도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어떤 사람은 설교자가 될 수도 있다. 모두가 목사가 될 필요는 없다. 모두가 강단 설교자가 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받은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 혼들을 사랑하는 말씀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최종 목적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다.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의 나무니, 혼들을 이겨오는 자는 현명하니라.”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잃어버린 혼들에게 복음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며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답변할 것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기회는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정말 많이 아는 사람이다.” “저 사람의 설교는 탁월하다.” “질문하면 무엇이든 대답한다.” 이런 평가가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평가는 하나다. 하나님의 인정이다. “청지기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이라.”

 

계속 성경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복음을 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성경을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으라.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에 더 합당한 일꾼이 되라. 성경을 공부하되 단순히 많이 알기 위해 공부하지 말라.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공부하라. 공부하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공부하지 말라. 공부하되 자신만 성장하기 위해 공부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도록 공부하라. 공부하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공부하지 말라. 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공부하라.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 이것이 우리의 목표다. 하나님 도우심으로 인하여 평생토록 하나님으로부터 쓰임받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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