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씀
다시 한번 전가(imputation)의 교리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전가된 의는 행위 없이, “행함이 없어도”(6절) 주어진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주시는 것이다.
“죄과들을 용서받고 죄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도다. 주께서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영에 간사함이 없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2)
다윗에게는 시편 32:1–2을 기록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에서 희생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두 가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시 51:16).
그는 간음을 범했고(레 20:10), 살인을 범했다(민 35:31).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제하셨고” 그의 죄에 대해 요구되는 형벌을 집행하지 않으셨다(삼하 12:13).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믿음을 행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전가하신 예로 아브라함을 사용한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다윗을 사용하여 그의 “씨”(시 89:25–37 참조)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하게 한다.
미카 6:5은 이렇게 말한다. “오 내 백성아, 이제 모압 왕 발락이 의논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라암이 싯팀에서 길갈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대답하였던 것을 기억하라. 그러면 너희가 주의 의를 알리라.” (미카 6:5)
“보라, 내가 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그가 복 주신 것을 내가 바꿀 수 없도다. 주께서는 야곱의 죄악을 보지 않으시며 또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으셨도다.” (민수기 23:20–21)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당신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이 있다.
바로 그 부분이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롬 8:29) 예정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완전함 안에서 보신다.
동시에 당신은 죄 있는 육신의 몸 안에서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몸을 죽은 시체로 보신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또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 3:3).
바로 여기에서 칭의인 의롭게 됨이 등장한다.
구원받은 죄인인 당신에게 하나님의 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당신에게 계산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전가),
하나님께서는 법적으로 당신의 죄들이 완전히 지불된 것으로 간주하시며,
법적으로 당신을 의롭다고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의 몸을, 죽어 장사된 것으로 보신다.
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한, 곧 하나님과의 교제, 새 본성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 날마다 “옛 사람”을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과 관련해서는, 그리고 죄에 대한 승리를 실제적인 삶에서 이루어 가는 문제에 관한 한, 그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가진 신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확정된 법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8)
이것이 바로 주께서 아기들에게 하시는 일이다.
구약에서는 아무도 “원죄”를 제거받지 않았지만, 구약의 성도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림보”나 “연옥”에 가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품은 그리스도께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실 때까지 존재했던 일시적인 안식처였다(엡 4:8).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막 10:14)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전가하지 않으신다(롬 5:13).
아이의 삶에는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선과 악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시기가 있으며, 그러므로 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 심판 아래 있지 않다.
“또한 너희가 먹이가 되겠다고 말했던 너희의 어린 것들과 그 날에 선악 간에 지식이 없었던 너희 자녀들은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로 그것을 소유하게 하리라.”(신 1:39).
아이가 자신이 행하는 잘못된 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지식이 양심을 통해 오든 성경을 통해 오든,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 앞에 죄책(guilty)을 지게 되고 그의 죄들이 그에게 전가된다.
그 순간부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책임이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
“내가 전에는 율법 없이 살았으나 계명이 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느니라.”(로마서 7: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바로 여기에 당신의 구원과 아브라함의 구원 사이의 차이가 있다.
당신의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희생으로 지불되었다.
당신이 당신의 죄들을 위해 그 희생을 신뢰했을 때, 그 대가는 이미 지불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신에게 전가되는 의가 그 희생에 의해 보장되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의를 받았지만, 여러 해 후 자기 아들을 희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전까지는 의롭게 되지 않았다. 그의 죄들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9 그러면 이러한 복이 할례자에게만이냐? 아니면 무할례자에게도냐? 이는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노라.”고 했음이라.
10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그가 할례 때였느냐? 아니면 무할례 때였느냐? 할례 때가 아니라 무할례 때였느니라.
바울이 묻는 질문은 “누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인가(“할례받은 자들에게만”)?
아니면 이방인들(“할례받지 아니한 자들”)도 그 복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간다.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았는가?
할례받기 전이었는가, 아니면 할례받은 후였는가?
그는 할례받지 않은 상태였던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7장에 이르러서야 할례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아브라함에게 전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유대인이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높은 아버지”에서 “많은 민족들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창 17:5).
이 이름의 변화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오직 한 아들인 이삭에게만 이어졌기 때문이다(창 17:21).
할례는 아브라함의 선택받은 씨와 맺은 언약의 표적이었다.
이삭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 둘 다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야곱에게로 이어졌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언약이 그 열두 아들과 그들의 후손 모두에게 이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열두 아들을 선택하셔서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루게 될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았을 때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할례받지 않은 히브리인이었다.
그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았을 때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언약과 할례는 그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전가(imputation)의 교리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전가된 의는 행위 없이, “행함이 없어도”(6절) 주어진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주시는 것이다.
“죄과들을 용서받고 죄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도다. 주께서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영에 간사함이 없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2)
다윗에게는 시편 32:1–2을 기록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에서 희생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두 가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시 51:16).
그는 간음을 범했고(레 20:10), 살인을 범했다(민 35:31).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제하셨고” 그의 죄에 대해 요구되는 형벌을 집행하지 않으셨다(삼하 12:13).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믿음을 행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전가하신 예로 아브라함을 사용한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다윗을 사용하여 그의 “씨”(시 89:25–37 참조)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하게 한다.
미카 6:5은 이렇게 말한다. “오 내 백성아, 이제 모압 왕 발락이 의논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라암이 싯팀에서 길갈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대답하였던 것을 기억하라. 그러면 너희가 주의 의를 알리라.” (미카 6:5)
“보라, 내가 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그가 복 주신 것을 내가 바꿀 수 없도다. 주께서는 야곱의 죄악을 보지 않으시며 또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으셨도다.” (민수기 23:20–21)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당신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이 있다.
바로 그 부분이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롬 8:29) 예정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완전함 안에서 보신다.
동시에 당신은 죄 있는 육신의 몸 안에서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몸을 죽은 시체로 보신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또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 3:3).
바로 여기에서 칭의인 의롭게 됨이 등장한다.
구원받은 죄인인 당신에게 하나님의 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당신에게 계산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전가),
하나님께서는 법적으로 당신의 죄들이 완전히 지불된 것으로 간주하시며,
법적으로 당신을 의롭다고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의 몸을, 죽어 장사된 것으로 보신다.
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한, 곧 하나님과의 교제, 새 본성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 날마다 “옛 사람”을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과 관련해서는, 그리고 죄에 대한 승리를 실제적인 삶에서 이루어 가는 문제에 관한 한, 그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가진 신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확정된 법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8)
이것이 바로 주께서 아기들에게 하시는 일이다.
구약에서는 아무도 “원죄”를 제거받지 않았지만, 구약의 성도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림보”나 “연옥”에 가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품은 그리스도께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실 때까지 존재했던 일시적인 안식처였다(엡 4:8).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막 10:14)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전가하지 않으신다(롬 5:13).
아이의 삶에는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선과 악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시기가 있으며, 그러므로 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 심판 아래 있지 않다.
“또한 너희가 먹이가 되겠다고 말했던 너희의 어린 것들과 그 날에 선악 간에 지식이 없었던 너희 자녀들은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로 그것을 소유하게 하리라.”(신 1:39).
아이가 자신이 행하는 잘못된 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지식이 양심을 통해 오든 성경을 통해 오든,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 앞에 죄책(guilty)을 지게 되고 그의 죄들이 그에게 전가된다.
그 순간부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책임이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
“내가 전에는 율법 없이 살았으나 계명이 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느니라.”(로마서 7: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바로 여기에 당신의 구원과 아브라함의 구원 사이의 차이가 있다.
당신의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희생으로 지불되었다.
당신이 당신의 죄들을 위해 그 희생을 신뢰했을 때, 그 대가는 이미 지불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신에게 전가되는 의가 그 희생에 의해 보장되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의를 받았지만, 여러 해 후 자기 아들을 희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전까지는 의롭게 되지 않았다. 그의 죄들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9 그러면 이러한 복이 할례자에게만이냐? 아니면 무할례자에게도냐? 이는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노라.”고 했음이라.
10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그가 할례 때였느냐? 아니면 무할례 때였느냐? 할례 때가 아니라 무할례 때였느니라.
바울이 묻는 질문은 “누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인가(“할례받은 자들에게만”)?
아니면 이방인들(“할례받지 아니한 자들”)도 그 복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간다.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았는가?
할례받기 전이었는가, 아니면 할례받은 후였는가?
그는 할례받지 않은 상태였던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7장에 이르러서야 할례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아브라함에게 전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유대인이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높은 아버지”에서 “많은 민족들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창 17:5).
이 이름의 변화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오직 한 아들인 이삭에게만 이어졌기 때문이다(창 17:21).
할례는 아브라함의 선택받은 씨와 맺은 언약의 표적이었다.
이삭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 둘 다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야곱에게로 이어졌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언약이 그 열두 아들과 그들의 후손 모두에게 이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열두 아들을 선택하셔서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루게 될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았을 때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할례받지 않은 히브리인이었다.
그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았을 때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언약과 할례는 그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