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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제 450 호 2026년 8월 30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23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4장
오전설교
한 혼을 찾는 선한 목자의 마음
조도희 담임목사 | 누가복음 15장 1절–7절
오후설교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조도희 담임목사 | 창세기 14장 18절–20절
수요설교
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
조도희 담임목사 | 예레미야 18장 1절–6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23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4장
본문 말씀
6 행함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사람의 복에 관하여 다윗도 말하였으니 7 말하기를 “죄악들이 용서받고 죄들이 가려진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느니라.

다시 한번 전가(imputation)의 교리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전가된 의는 행위 없이, “행함이 없어도”(6절) 주어진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주시는 것이다.

“죄과들을 용서받고 죄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도다. 주께서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영에 간사함이 없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2)

다윗에게는 시편 32:1–2을 기록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에서 희생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두 가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시 51:16).

그는 간음을 범했고(레 20:10), 살인을 범했다(민 35:31).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제하셨고” 그의 죄에 대해 요구되는 형벌을 집행하지 않으셨다(삼하 12:13).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믿음을 행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전가하신 예로 아브라함을 사용한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다윗을 사용하여 그의 “씨”(시 89:25–37 참조)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하게 한다.

미카 6:5은 이렇게 말한다. “오 내 백성아, 이제 모압 왕 발락이 의논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라암이 싯팀에서 길갈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대답하였던 것을 기억하라. 그러면 너희가 주의 의를 알리라.” (미카 6:5)

“보라, 내가 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그가 복 주신 것을 내가 바꿀 수 없도다. 주께서는 야곱의 죄악을 보지 않으시며 또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으셨도다.” (민수기 23:20–21)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당신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이 있다.

바로 그 부분이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롬 8:29) 예정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완전함 안에서 보신다.

동시에 당신은 죄 있는 육신의 몸 안에서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몸을 죽은 시체로 보신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또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 3:3).

바로 여기에서 칭의인 의롭게 됨이 등장한다.

구원받은 죄인인 당신에게 하나님의 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당신에게 계산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전가),

하나님께서는 법적으로 당신의 죄들이 완전히 지불된 것으로 간주하시며,

법적으로 당신을 의롭다고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의 몸을, 죽어 장사된 것으로 보신다.

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한, 곧 하나님과의 교제, 새 본성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 날마다 “옛 사람”을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과 관련해서는, 그리고 죄에 대한 승리를 실제적인 삶에서 이루어 가는 문제에 관한 한, 그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가진 신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확정된 법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8)

이것이 바로 주께서 아기들에게 하시는 일이다.

구약에서는 아무도 “원죄”를 제거받지 않았지만, 구약의 성도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림보”나 “연옥”에 가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품은 그리스도께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실 때까지 존재했던 일시적인 안식처였다(엡 4:8).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막 10:14)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전가하지 않으신다(롬 5:13).

아이의 삶에는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선과 악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시기가 있으며, 그러므로 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 심판 아래 있지 않다.

“또한 너희가 먹이가 되겠다고 말했던 너희의 어린 것들과 그 날에 선악 간에 지식이 없었던 너희 자녀들은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로 그것을 소유하게 하리라.”(신 1:39).

아이가 자신이 행하는 잘못된 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지식이 양심을 통해 오든 성경을 통해 오든,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 앞에 죄책(guilty)을 지게 되고 그의 죄들이 그에게 전가된다.

그 순간부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책임이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

“내가 전에는 율법 없이 살았으나 계명이 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느니라.”(로마서 7: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바로 여기에 당신의 구원과 아브라함의 구원 사이의 차이가 있다.

당신의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희생으로 지불되었다.

당신이 당신의 죄들을 위해 그 희생을 신뢰했을 때, 그 대가는 이미 지불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신에게 전가되는 의가 그 희생에 의해 보장되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의를 받았지만, 여러 해 후 자기 아들을 희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전까지는 의롭게 되지 않았다. 그의 죄들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9 그러면 이러한 복이 할례자에게만이냐? 아니면 무할례자에게도냐? 이는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노라.”고 했음이라.

10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그가 할례 때였느냐? 아니면 무할례 때였느냐? 할례 때가 아니라 무할례 때였느니라.

 

바울이 묻는 질문은 “누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인가(“할례받은 자들에게만”)?

아니면 이방인들(“할례받지 아니한 자들”)도 그 복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간다.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았는가?

할례받기 전이었는가, 아니면 할례받은 후였는가?

그는 할례받지 않은 상태였던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7장에 이르러서야 할례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아브라함에게 전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유대인이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높은 아버지”에서 “많은 민족들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창 17:5).

이 이름의 변화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오직 한 아들인 이삭에게만 이어졌기 때문이다(창 17:21).

할례는 아브라함의 선택받은 씨와 맺은 언약의 표적이었다.

이삭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 둘 다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야곱에게로 이어졌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언약이 그 열두 아들과 그들의 후손 모두에게 이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열두 아들을 선택하셔서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루게 될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았을 때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할례받지 않은 히브리인이었다.

그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았을 때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언약과 할례는 그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전가(imputation)의 교리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전가된 의는 행위 없이, “행함이 없어도”(6절) 주어진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주시는 것이다.

“죄과들을 용서받고 죄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도다. 주께서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영에 간사함이 없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2)

다윗에게는 시편 32:1–2을 기록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에서 희생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두 가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시 51:16).

그는 간음을 범했고(레 20:10), 살인을 범했다(민 35:31).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제하셨고” 그의 죄에 대해 요구되는 형벌을 집행하지 않으셨다(삼하 12:13).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믿음을 행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전가하신 예로 아브라함을 사용한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다윗을 사용하여 그의 “씨”(시 89:25–37 참조)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하게 한다.

미카 6:5은 이렇게 말한다. “오 내 백성아, 이제 모압 왕 발락이 의논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라암이 싯팀에서 길갈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대답하였던 것을 기억하라. 그러면 너희가 주의 의를 알리라.” (미카 6:5)

“보라, 내가 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그가 복 주신 것을 내가 바꿀 수 없도다. 주께서는 야곱의 죄악을 보지 않으시며 또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으셨도다.” (민수기 23:20–21)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당신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이 있다.

바로 그 부분이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롬 8:29) 예정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완전함 안에서 보신다.

동시에 당신은 죄 있는 육신의 몸 안에서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몸을 죽은 시체로 보신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또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 3:3).

바로 여기에서 칭의인 의롭게 됨이 등장한다.

구원받은 죄인인 당신에게 하나님의 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당신에게 계산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전가),

하나님께서는 법적으로 당신의 죄들이 완전히 지불된 것으로 간주하시며,

법적으로 당신을 의롭다고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의 몸을, 죽어 장사된 것으로 보신다.

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한, 곧 하나님과의 교제, 새 본성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 날마다 “옛 사람”을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과 관련해서는, 그리고 죄에 대한 승리를 실제적인 삶에서 이루어 가는 문제에 관한 한, 그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가진 신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확정된 법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8)

이것이 바로 주께서 아기들에게 하시는 일이다.

구약에서는 아무도 “원죄”를 제거받지 않았지만, 구약의 성도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림보”나 “연옥”에 가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품은 그리스도께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실 때까지 존재했던 일시적인 안식처였다(엡 4:8).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막 10:14)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전가하지 않으신다(롬 5:13).

아이의 삶에는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선과 악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시기가 있으며, 그러므로 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 심판 아래 있지 않다.

“또한 너희가 먹이가 되겠다고 말했던 너희의 어린 것들과 그 날에 선악 간에 지식이 없었던 너희 자녀들은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로 그것을 소유하게 하리라.”(신 1:39).

아이가 자신이 행하는 잘못된 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지식이 양심을 통해 오든 성경을 통해 오든,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 앞에 죄책(guilty)을 지게 되고 그의 죄들이 그에게 전가된다.

그 순간부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책임이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

“내가 전에는 율법 없이 살았으나 계명이 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느니라.”(로마서 7: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바로 여기에 당신의 구원과 아브라함의 구원 사이의 차이가 있다.

당신의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희생으로 지불되었다.

당신이 당신의 죄들을 위해 그 희생을 신뢰했을 때, 그 대가는 이미 지불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신에게 전가되는 의가 그 희생에 의해 보장되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의를 받았지만, 여러 해 후 자기 아들을 희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전까지는 의롭게 되지 않았다. 그의 죄들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9 그러면 이러한 복이 할례자에게만이냐? 아니면 무할례자에게도냐? 이는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노라.”고 했음이라.

10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그가 할례 때였느냐? 아니면 무할례 때였느냐? 할례 때가 아니라 무할례 때였느니라.

 

바울이 묻는 질문은 “누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인가(“할례받은 자들에게만”)?

아니면 이방인들(“할례받지 아니한 자들”)도 그 복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간다.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았는가?

할례받기 전이었는가, 아니면 할례받은 후였는가?

그는 할례받지 않은 상태였던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7장에 이르러서야 할례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아브라함에게 전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유대인이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높은 아버지”에서 “많은 민족들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창 17:5).

이 이름의 변화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오직 한 아들인 이삭에게만 이어졌기 때문이다(창 17:21).

할례는 아브라함의 선택받은 씨와 맺은 언약의 표적이었다.

이삭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 둘 다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야곱에게로 이어졌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언약이 그 열두 아들과 그들의 후손 모두에게 이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열두 아들을 선택하셔서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루게 될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았을 때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할례받지 않은 히브리인이었다.

그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았을 때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언약과 할례는 그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이었다.

 

 

오전설교

한 혼을 찾는 선한 목자의 마음

조도희 담임목사
누가복음 15장 1절–7절
본문 말씀
1 그때 모든 세리와 죄인이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주께 다가오니 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평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죄인들을 영접하여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하더라. 3 그러자 주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더라. 이르시기를 4 “너희 가운데 누가 양 일백 마리를 가졌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었다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두고 그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그러다가 그가 그 양을 찾으면 자기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6 집에 돌아와서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함께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아홉 명의 의인들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의 죄인을 더 기뻐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는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1). 그분께서는 “길을 잃은” 양과 같은 당신을 찾으시고(사 53:6)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눅 19:10). 성령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으셨다. 당신이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온다면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받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당시 종교계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세리와 죄인”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미워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이 비유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로 알려졌다. 오늘은 “선한 목자의 마음을 소유하라”는 제목으로 전하고자 한다.

 

  선한 목자의 마음은 죄인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그때 모든 세리와 죄인이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주께 다가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평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죄인들을 영접하여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하더라.”(1–2절).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셨는지를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늘 듣던 공허한 종교적 상투어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설교를 들으려고 찾아왔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 주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왔다. 사람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몽둥이 삼아 그들을 두들겨 패는 데 사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왔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추상적인 진리를 가져다가 명확하게 설명하시고, 그 율법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왔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려고 찾아온 것은 그분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받아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제시하셨다.

  주님의 사역 가운데 예수님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기 있게 만들었던 바로 그 모든 것들이 유대인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분을 미워하게 만들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보다 더 인기가 있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미워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감히 율법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해 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미워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멸시하던 바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미워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는 단순히 교리적인 지식의 부족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잃어버린 사람을 향한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경에 관한 진리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관한 진리까지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미워했다. 본문에 기록된 그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세리와 죄인”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왔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었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향한 깊은 긍휼을 느꼈다. 그분께서는 죄인을 정죄하기 위해 가까이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가까이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왔다.

  그런데 바로 이 죄인들이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왔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것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얼마나 분노했을지 상상해 보라. 술 취한 자들과 창녀들과 거짓말쟁이들과 도둑들과 그 밖의 악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상상해 보라. 분노하여 이를 갈고 있는 모습, 두 손을 주먹으로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면서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워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감히 받아 주시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그분을 미워했다. 그렇다면 이 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것을 들을 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들이 “불평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죄인들을 영접하여 함께 음식을 먹는다.” 예수께서 이 악한 사람들을 받아 주셨으므로 그분 역시 악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드러내놓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잃어버린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들의 모습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감히 세금을 거두는 인간쓰레기들과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죄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죄를 짓지 않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개인적으로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특히 괴롭혔던 한 가지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미워했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거의 그만큼 미워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본래 “이스라엘의 목자들”이어야 했지만 백성을 인도하는 데 실패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은 상태에 있었으며, 자신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미워했다.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하실 수 있었다. 에스겔 34:3–7, 10–17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고발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너희가 살진 양들을 잡아 기름을 먹고 양털로 옷을 입어도 양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환자에게 힘을 돋우어 주지 아니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고 쫓겨난 자를 다시 데려오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였도다. 그 대신 너희가 폭력과 잔인함으로 그들을 다스렸도다. 그들은 목자가 없으므로 흩어졌고 그들이 흩어졌을 때 들의 모든 짐승들에게 먹이가 되었도다. 내 양이 모든 산들과 높은 언덕마다 유리하였으며, 정녕 내 양무리가 땅의 모든 지면에 흩어졌으나 그들을 찾거나 찾아 나선 자가 아무도 없도다.”(에스겔 34:3–6) 그들은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를 거부했다.

  우리가 선한 목자의 마음을 소유한다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달라져야 한다. 술에 빠진 사람을 보면 혐오하기 전에 그의 혼을 보아야 한다. 부도덕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비난하기 전에 그의 혼을 보아야 한다. 돈밖에 모르는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 교회를 조롱하는 사람,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을 볼 때에도 그의 행동 뒤에 있는 잃어버린 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의 죄를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 사람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의인들의 전시장이 아니라 죄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선한 목자의 마음은 죄인을 밀어내지 않는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받아들인다.

 

  선한 목자의 마음은 잃어버린 한 혼을 끝까지 찾아가는 마음이다. “그러자 주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더라. 이르시기를 “너희 가운데 누가 양 일백 마리를 가졌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었다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두고 그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3–4절).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양들이며, 에스겔 34장 전체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 양 떼”라고 부르신다. 이 비유는 한 무리의 유대인들, 곧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2절)이 또 다른 무리의 유대인들, 곧 “세리와 죄인”(1절)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을 불평한 것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마 10:6)들에 대한 자신의 목적을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양 백 마리를 소유한 한 목자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그 정도의 양을 소유했다는 것은 이 목자가 어느 정도 형편이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단순히 계산만 놓고 본다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이 목자에게 그다지 큰 손실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목자는 자기 양들 가운데 한 마리가 우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자 즉시 다른 양들을 남겨 두고 잃어버린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목자는 왜 그렇게 했는가? 분명히 이 목자는 자신이 소유한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소중히 여겼다. 그는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과 심지어 모든 것까지도 기꺼이 희생할 만큼 그 양을 소중히 여겼다.

  죄인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찾아낼 수 없다. 죄인은 자기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종교도 그를 구원할 수 없다. 교회 출석도 그를 구원할 수 없다. 침례도 그를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선한 목자께서 그를 찾아 구원하셔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선한 목자는 기다리기만 하지 않으셨다. 친히 찾아오셨다.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죄인들이 있는 세상으로 들어오셨다. 마침내 십자가까지 찾아오셨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골짜기로 내려간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리를 찾기 위해 이 죄악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찾아가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잃어버린 사람이 교회에 오기만 기다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야 한다. 가족에게 가야 한다. 친척에게 가야 한다. 이웃에게 가야 한다. 직장 동료에게 가야 한다.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다시 가야 한다. 한 번 거절했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두 번 듣지 않았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말한다. “찾을 때까지.” 선한 목자의 마음에는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이 있다. 한 혼은 귀중하다. 한 혼은 영원하다. 한 혼은 온 세상보다 귀중하다.

  이 비유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내용이었다. 랍비들은 회개하는 죄인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을 찾아 나서신다는 개념은 당시로서는 들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우주의 주권자이신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구주로, 또한 고난받으시는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성령님의 강력하고 끈질긴 사랑을 통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우리를 죄와 지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신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셨기 때문이다.

  목자께서 당신을 찾아오셨던 때를 기억하는가? 구원받았다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목자께서 지금 당신을 찾고 계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과 안전과 소망을 얻기 위해 그분께로 달려가야 한다. 세상은 한 사람을 기능으로 계산한다.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토사구팽은 세상 조직이나 정치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한 혼으로 보신다. 그래서 선한 목자의 마음은 잃어버린 한 혼을 끝까지 찾아간다.

 

  선한 목자의 마음은 찾은 한 혼을 품고 기뻐하는 마음이다. “그러다가 그가 그 양을 찾으면 자기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와서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함께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아홉 명의 의인들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의 죄인을 더 기뻐하리라.”(5–7절).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부지런히 찾기 위해 양 떼를 남겨 두고 떠난다. 그리고 그 양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찾는다. 마침내 양을 발견하면 그 양을 들어 올려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향한다. 그는 잃어버렸던 양을 찾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가득하다. 그는 그 양을 사랑했고, 그 양을 찾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 이제 그 양이 안전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기뻐한다. 집에 도착한 목자는 잃어버렸던 양을 찾았다는 소식을 널리 알린다. 그리고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해 낸 일을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자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자신의 양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 “우리 혼들의 목자”를 보내셨다. “이는 너희가 길 잃은 양들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들의 목자와 감독에게로 돌아왔음이니라.”(벧전 2:25) 돈을 잃는 것, 생명을 잃는 것은 혼을 잃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막8:36) 그분께서는 우리를 찾으실 때까지 찾아다니시며, 우리를 찾으신 뒤에는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고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신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으셨는가? 그분께서 당신을 죄 가운데서 들어 올려 부드럽게 자신의 어깨 위에 메어 주셨는가? 그분께서 영광 가운데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곳으로 당신을 데려가고 계시는가? 구원받았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기뻐해야 한다.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께서 당신의 혼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이에 관하여 베드로가 한 말을 들어 보라.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낫게 되었느니라. 이는 너희가 길 잃은 양들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들의 목자와 감독에게로 돌아왔음이니라.”(베드로전서 2:24–25)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혼이 구원받을 때 하늘이 기뻐한다고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한 혼이 집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그분께서는 즐거워하시며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자들로 인해 기뻐하시는 것보다 한 혼이 구원받는 것을 더욱 크게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때 온 하늘도 그 축하에 함께 참여한다. 그들이 기뻐하는 것은 한 혼이 죄와 지옥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 가운데 하나가 발견되었고, 이제 안전하게 되었으며, 본향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선한 목자께서 당신을 찾으시고, 그 결과 당신이 그분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과 하늘의 모든 무리는 당신의 구원과 장차 본향에 도착할 것을 기뻐하며 함께 축하한다.

 

  우리 모두는 길을 잃은 양으로 인생을 시작한다. 그러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리고 기뻐하시며 우리를 본향으로 데려가신다. 우리가 선한 목자에게 구원받았다면 이제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다. 누군가는 우리를 위해 기도했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성경을 보여 주었다. 누군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도 한 혼을 찾아가야 한다.

  먼저, 한 사람을 마음에 품으라. 둘째, 그 사람에게 다가가라. 셋째, 복음을 분명하게 말하라. 넷째, 거절당해도 쉽게 포기하지 말라. 선한 목자의 마음으로 한 혼을 찾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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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조도희 담임목사
창세기 14장 18절–20절
본문 말씀
18 살렘 왕 멜키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을 축복하며 말하기를 “하늘과 땅의 소유주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브람을 복 주시옵소서. 20 너의 원수들을 네 손에 넘겨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송축하라.” 하니, 아브람이 모든 것의 십일조를 그에게 드리더라.

  멜키세덱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창세기 14장에 갑자기 등장하여 몇 마디만 하고,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은 뒤 역사적 기록에서 사라진다. 수백 년 후 다윗은 시편 110편에서 단 한 문장으로 그를 언급한다. 그리고 다시 약 천 년 후,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성경의 이 신비로운 제사장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서 가장 위대한 진리 가운데 하나를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멜키세덱이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중요하시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그 모형을 보여 준다. 시편 110편은 우리에게 그 약속을 보여 준다. 히브리서는 모형으로 보여 주고 약속했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단지 한 제사장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분은 최종적인 제사장이시며, 완전한 제사장이시며,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그분은 단지 당신을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가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을 통하여 당신은 단번에 영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은 멜키세덱의 계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키세덱을 통하여 왕이시며 제사장이신 분으로 예표되셨다(창세기 14:18–20).

  창세기 14장은 여러 왕들이 연루된 군사적 충돌을 기록하고 있다. 롯은 소돔 근처에 정착했다가 그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의 여파에 휩쓸리게 되었다. 아브람은 롯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훈련받은 종들을 모아 침략군을 추격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셨다. 멜키세덱은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며 다가왔다.

  멜키세덱이라는 이름은 “의의 왕”을 의미하는 두 히브리어 요소에서 유래했다. 히브리서는 그 의미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아브라함도 전체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렸으니, 그의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 곧 화평의 왕이라.”(히 7:2) 그는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었다. 이후 이스라엘의 언약적 체계 아래에서는 이 두 직분이 일반적으로 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왕들은 유다 지파를 통해 나왔고, 제사장들은 레위와 아론을 통해 나왔다. 그러나 멜키세덱은 이 두 지파가 존재하기도 전에 등장하여 왕과 제사장이라는 두 직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예비하여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제사장의 옷만 입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또한 왕의 왕관을 쓰시는 분이다. 그분은 왕이시며 제사장이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멜키세덱은 아론보다 훨씬 이전에 등장했다. 당시에는 성막도 없었다. 레위 계열의 제사장직도 없었다. 모세의 언약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존재했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논증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계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분의 제사장직은 그보다 더 오래되고 더 위대한 계열에 속한다.히브리서 7:14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 주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신 것이 분명하니 이 지파에 대해서는 모세가 제사장 직분에 관하여 말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 만일 예수님께서 아론 계열의 제사장직을 주장하셨다면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분은 유다 지파 출신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아론의 계열에 속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멜키세덱의 계열에 속하신다.

  히브리서 7:3은 멜키세덱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으며…” 이 말씀 때문에 멜키세덱이 문자 그대로 영원한 존재였다고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요점은 성경의 기록과 제사장의 계보에 관한 것이다. 창세기는 계보를 매우 주의 깊게 기록한다. 그러나 멜키세덱이 등장할 때 성경은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 계보, 출생이나 죽음에 관하여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성경 기록의 침묵을 예표적으로 사용한다. 멜키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되었다. 멜키세덱이 그리스도와 같이 된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존재에 있어서 멜키세덱과 같이 되신 것이 아니다. 멜키세덱의 기록된 역사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그리스도의 실제 제사장직에는 끝이 없다. 그림자는 실체를 가리킨다. 모형은 그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은 멜키세덱의 계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맹세에 따라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으셨다. “주께서 맹세하셨으니 후회하지 아니하시리라. “너는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편 110:4)

  아브라함으로부터 거의 천 년이 지난 후, 멜키세덱이 갑자기 다시 등장한다. 시편 110편은 명백하게 메시아에 관한 시편이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나이다.”(1)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에게 메시아의 정체에 관하여 질문하실 때 시편 110:1을 직접 인용하셨다. 다윗은 자신의 후손이시면서 동시에 자신의 주이신 분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 시편은 뜻밖에도 왕권에서 제사장직으로 옮겨 간다.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는 단지 통치만 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중보하실 것이었다. 그분은 왕관과 제사장의 옷을 함께 입으실 것이었다.

  그분의 제사장직은 하나님의 맹세에 근거한다. 주께서 맹세하셨으니…”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느낌이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말씀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장직을 단지 선포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맹세로 그것을 확증하셨다. 히브리서 7:20–21은 이것을 강조한다. 그가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되신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들이 되었으나, 이분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그분에 의하여 맹세로 된 것이니 “주께서 맹세하셨으니 후회하지 아니하시리라. ‘너는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하셨도다.)”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은 율법이 그들을 임명했기 때문에 그 직분을 맡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하나님 자신의 맹세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확신은 우리의 감정이 얼마나 강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한가에 달려 있다. 어떤 아침에는 당신이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떤 아침에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어떤 날에는 믿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어떤 날에는 믿음이 약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당신의 감정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 당신의 안전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목적에 근거한다.
그분의 제사장직은 영원하다. 너는 ... 영원한 제사장이라…” 아론은 죽었다. 엘르아살도 죽었다. 피느하스도 죽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제사장들이 섬겼지만 결국 모두 사라졌다. 구약의 제사장들의 모든 무덤은 그 제사장 제도가 최종적인 제사장을 제공하기에는 불충분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그들이 실로 많은 제사장이 된 것은 죽음으로 인하여 직무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나 이분은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불변의 제사장 직분을 가지셨도다.”(히브리서 7:23–24)

  그분의 제사장직은 멜키세덱의 계열에 속한다.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아론의 제사장직은 일시적이었다. 땅에 속한 것이었고, 혈통을 따라 이어졌다. 반복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영원하다. 하늘에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에게 속한 것이다. 완전하다. 옛 제사장 제도는 그분을 미리 바라보았다. 새 언약은 그분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은 멜키세덱의 계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히 살아 계셔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다.

  히브리서는 창세기의 모형과 시편의 약속을 가져와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분은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다. 히브리서 7:26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적합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으며, 더러움이 없고 죄인들에게서 성별되시며, 하늘들보다 더 높이 되심이라.” 아론 계열의 모든 제사장에게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 자신도 죄인이면서 다른 죄인들을 위하여 사역해야 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5:3은 땅의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들을 위해서도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이런 까닭에 그가 백성을 위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신 적이 없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자신을 드리셨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과 같은 죄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을 동정하는 제사장이 아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죄가 전혀 없으시면서도 당신의 연약함을 이해하시는 동정심 많은 제사장이다. 히브리서 4:15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라.”

  그분은 완전한 희생제물을 드리셨다. “그는 대제사장들처럼 먼저 자신의 죄들을 위하고 그 다음에는 백성들의 죄들을 위하여 제사드리는 일을 매일 할 필요가 없으시니, 이는 그가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단번에 이루셨음이라.”(히브리서 7:27) 옛 제사장들은 희생제물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다. 그들은 다른 것의 피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가지고 오셨다. 그들은 반복해서 제단 앞에 섰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단번에 드리셨다. 이 진리는 히브리서 후반부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다. “이는 그가 한 번의 제사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이라.”(히 10:14) 옛 언약 아래에서 반복해서 드려졌던 희생제물들은 계속해서 지불기일이 돌아오는 청구서와 같았다. 새로운 희생제물이 드려질 때마다 이전의 희생제물이 죄를 최종적으로 제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분은 또 한 번의 분할금을 지불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빚을 완전히 갚으셨다.

  이미 완성된 희생에 무엇인가를 더하려는 시도를 그만두라. 당신의 눈물이 그리스도의 피를 더 완전하게 만들 수 없다. 당신의 선한 행위가 그리스도의 순종을 완성할 수 없다. 당신의 종교적인 활동이 그리스도의 의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없다. 회개는 필요하다. 순종은 중요하다. 거룩함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사역에 구원받을 만한 공로를 조금이라도 더할 수 없다.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 “이분은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불변의 제사장 직분을 가지셨도다.”(히브리서 7:24)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영광은 단지 그분께서 갈보리에서 우리의 제사장이셨다는 데 있지 않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제사장이시다. 십자가의 사역은 완성되었지만, 그분의 중보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라.”(히4:14) 당신이 실패할 때, 당신 자신을 바라보지 말라.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바라보라. 사탄이 당신을 고소할 때,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바라보라. 양심이 당신을 정죄할 때,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바라보라. 믿음이 약해질 때,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바라보라. 죽음이 가까이 올 때에도,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바라보라. “이분은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불변의 제사장 직분을 가지셨도다.”(히7:24)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살아 계신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지금도 우리를 대표하신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오신 분이 끝까지 우리를 붙드신다. 그분이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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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

조도희 담임목사
예레미야 18장 1절–6절
본문 말씀
1 주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 이르시니라. 2 일어나서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너로 내 말들을 듣게 하리라. 3 그때 내가 토기장이의 집에 내려갔더니, 보라, 그가 물레들 위에서 한 작품을 만들었더라. 4 그가 진흙으로 만든 그 그릇이 그 토기장이의 손에서 손상을 입었으니 그 토기장이가 그것을 만들기에 좋게 보이는 대로 그것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만들더라. 5 그때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말씀하시니라. 6 주가 말하노라. 오 이스라엘 집아, 내가 이 토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느냐? 보라, 오 이스라엘 집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손에 붙드시고 인생의 모든 과정과 시련을 사용하여 자신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빚어 가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진흙이므로, 우리를 빚으시는 그분의 주권을 신뢰하고, 인생의 모든 환경 가운데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의 손길에 부드럽게 반응해야 한다.

 

  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 우리를 빚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1–3절). “그때 내가 토기장이의 집에 내려갔더니, 보라, 그가 물레들 위에서 한 작품을 만들었더라.”(3절)

  예레미야가 집에 내려가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진흙이 아니었다. 물레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다루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본문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그분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적으로 다루시는 힘이 아니다. 생각하시고, 아시고, 사랑하시고, 목적을 가지고 일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손길에는 지혜가 있고, 그분의 손길에는 사랑이 있고, 그분의 손길에는 목적이 있다. 우리는 우연한 힘의 손에 놓여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분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진흙은 스스로 그릇이 될 수 없다. 진흙에게는 자신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빚는 분에게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것을 유용한 것으로 만드실 수 있고, 망가진 것을 다시 만드실 수 있으며, 연약한 것을 존귀한 그릇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다. “세상의 쓰레기같이 되며 지금까지 만물의 찌꺼기가 되었도다.”(고전 4:13)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버리는 것을 취하여 자신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계획을 가지신 분이시다. 진흙이 물레 위에 놓이기 전에 이미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마음에는 완성될 그릇에 대한 계획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데에는 목적이 있다. 우리를 단지 지옥에서 건져 하늘나라로 데려가기 위해서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자신의 일에 사용하시고, 자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구원하셨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단지 우리의 편안함이 아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분은 인내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실패했다고 우리를 즉시 버리지 않으신다. 4절에서 그릇이 손상되었을 때 그것을 만든 사람은 진흙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을 다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아신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우리를 다루신다. 그분의 인내는 우리의 실패보다 크다. 우리가 여전히 그분의 손에 반응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면, 그분께서는 계속해서 우리를 빚으신다. 첫 번째 교훈은 이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진흙의 질에 있지 않고 그것을 붙들고 계신 분의 손에 있다.

 

  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 우리의 인생은 그분의 손 안에서 빚어지는 과정이다(3–4절). “그가 진흙으로 만든 그 그릇이 그 토기장이의 손에서 손상을 입었으니 그 토기장이가 그것을 만들기에 좋게 보이는 대로 그것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만들더라.”(4절)

  본문에는 세 가지가 함께 등장한다. 진흙, 물레, 그리고 손이다. 이 세 가지가 우리의 삶을 잘 보여 준다.

  우리는 진흙이다.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씀하셨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 진흙은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다. 진흙 자체에는 아름다움이 없다. 진흙 자체에는 모양이 없다. 진흙 자체에는 특별한 가치가 없다. 그 가치가 생기는 것은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롬 3:23)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나 능력을 자랑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평범한 진흙이 존귀한 그릇이 될 수 있다.

  인생은 물레와 같다. 진흙은 가만히 놓인 상태에서 빚어지지 않는다. 물레 위에서 끊임없이 돌아간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한 가지 일이 지나갔다 싶으면 또 다른 일이 찾아온다. 한 시련이 끝났다 싶으면 새로운 문제가 시작된다. 때로는 인생이 같은 자리를 계속 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물레가 돌아가도 그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진흙이 아니다. 그것을 다루는 사람이 결정한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모든 상황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 인생의 물레는 통제되지 않는 우연이 아니다. 물레가 빨리 돌아가더라도 하나님의 손은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시련은 용광로와 같다. 진흙은 모양만 만들어졌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는 불을 통과해야 한다. 불은 그릇을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만들어진 그릇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삶의 시련을 사용하신다.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라.”(고린도후서 4:17) 시련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 좋은 것을 만들어 내신다. 시련은 믿음을 단단하게 만든다. 교만을 깨뜨린다. 세상에 대한 애착을 약하게 만든다. 기도하게 한다. 말씀을 의지하게 한다. 그리스도를 더욱 닮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나를 어떻게 빚고 계시는가?”

 

  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 우리의 반응이 그릇의 유용함을 결정한다(4–6절). “그 토기장이가 그것을 만들기에 좋게 보이는 대로 그것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만들더라.”(4절)

  여기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등장한다. 문제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었다. 문제는 진흙 안에 있었다.

  불순종은 우리를 망가뜨린다. 4절의 그릇은 “손상을 입었다.” 그것을 만든 사람의 손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의 계획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다. 문제는 진흙이었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못 인도하셔서 망가지는 것이 아니다. 불순종, 교만, 고집,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육신의 욕망이 우리를 망가뜨린다. “그러므로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전 10:12)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파선했다. 데마는 이 현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렸다. 아무도 처음부터 망가지려고 계획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멈추면 조금씩 형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깨뜨림은 하나님의 심판이며 동시에 회복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손상된 그릇을 다시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 다시 부서져 깨뜨려져야 한다. 이 과정은 고통스럽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를 징계하실 때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계 3:19)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의 징계가 즐겁지 않고 슬픈 것 같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파멸이 아니다.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깨뜨리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죄를 계속 붙들고 있을 때 그것은 심판이다. 그러나 그 심판에 회개로 반응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회복의 시작이 된다. 다윗이 깨어졌고 다시 사용되었다. 베드로가 깨어졌고 다시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어떤 것을 깨뜨리실 때 “왜 이것을 빼앗아 가시는가?”라고만 묻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제거하려 하시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순종은 우리를 존귀한 그릇으로 만든다. 6절의 핵심은 매우 간단하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 진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손에 맡겨지는 것이다. “진흙이 만드는 자에게 ‘네가 무엇을 만드느냐?’ 말할 수 있으며…”(이사야 45:9) 진흙은 자신이 어떤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위치에 있지 않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설교자로 사용하시고, 누구는 교사로 사용하시며, 누구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신실하게 하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눈에 띄게 사용되는가가 아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2의 권면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안전한 기도는 이것이다. “주님,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만들어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를 만들어 주십시오.”

 

  예레미야가 그 집에서 본 광경은 단순한 도자기 제작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보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빚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인격과 능력과 계획과 인내가 있다. 우리는 진흙이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지만 그분의 손 안에서는 존귀한 그릇이 될 수 있다. 인생은 물레와 같다. 때로 빠르게 돌아가고 때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물레는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 시련은 용광로와 같다. 우리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불순종은 그릇을 망가뜨린다. 그리고 때로 깨뜨림은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동시에 회복을 위한 은혜의 손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다. 그분의 손에서 버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누르실 때 부드러워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고치실 때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방향을 바꾸실 때 따라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좋은 진흙인가가 아니다. 누구의 손 안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보라, 오 이스라엘 집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라.“ 그분께서 원하시는 그릇으로 우리를 빚어 가시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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