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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제 449 호 2026년 8월 23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22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4장
오전설교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의 법칙
손을권 형제 | 갈라디아서 6장 7절-10절
오후설교
섬김이 짐이 될 때
조경재 형제 | 누가복음 10장 38절-42절
수요설교
포기하기를 거부한 사람
조도희 담임목사 | 사무엘하 23장 9절-10절, 역대기상 11장 12절-14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22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4장
본문 말씀
4:4 이제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 보수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빚으로 여겨지지만, 5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를 전가받았던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기 원한다면, 행위와는 별개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는 분을 신뢰해야 한다.

 

6 행함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사람의 복에 관하여 다윗도 말하였으니

7 말하기를 “죄악들이 용서받고 죄들이 가려진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느니라.

 

다시 한번 전가(imputation)의 교리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전가된 의는 행위 없이, “행함이 없어도”(6절) 주어진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주시는 것이다.

“죄과들을 용서받고 죄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도다. 주께서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영에 간사함이 없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2)

다윗에게는 시편 32:1–2을 기록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에서 희생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두 가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시 51:16).

그는 간음을 범했고(레 20:10), 살인을 범했다(민 35:31).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제하셨고” 그의 죄에 대해 요구되는 형벌을 집행하지 않으셨다(삼하 12:13).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믿음을 행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전가하신 예로 아브라함을 사용한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다윗을 사용하여 그의 “씨”(시 89:25–37 참조)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하게 한다.

미카 6:5은 이렇게 말한다. “오 내 백성아, 이제 모압 왕 발락이 의논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라암이 싯팀에서 길갈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대답하였던 것을 기억하라. 그러면 너희가 주의 의를 알리라.” (미카 6:5)

“보라, 내가 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그가 복 주신 것을 내가 바꿀 수 없도다. 주께서는 야곱의 죄악을 보지 않으시며 또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으셨도다.” (민수기 23:20–21)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당신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이 있다.

바로 그 부분이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롬 8:29) 예정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완전함 안에서 보신다.

동시에 당신은 죄 있는 육신의 몸 안에서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몸을 죽은 시체로 보신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또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 3:3).

바로 여기에서 칭의인 의롭게 됨이 등장한다.

구원받은 죄인인 당신에게 하나님의 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당신에게 계산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전가),

하나님께서는 법적으로 당신의 죄들이 완전히 지불된 것으로 간주하시며,

법적으로 당신을 의롭다고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의 몸을, 죽어 장사된 것으로 보신다.

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한, 곧 하나님과의 교제, 새 본성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 날마다 “옛 사람”을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과 관련해서는, 그리고 죄에 대한 승리를 실제적인 삶에서 이루어 가는 문제에 관한 한, 그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가진 신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확정된 법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8)

이것이 바로 주께서 아기들에게 하시는 일이다.

구약에서는 아무도 “원죄”를 제거받지 않았지만, 구약의 성도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림보”나 “연옥”에 가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품은 그리스도께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실 때까지 존재했던 일시적인 안식처였다(엡 4:8).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막 10:14)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전가하지 않으신다(롬 5:13).

아이의 삶에는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선과 악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시기가 있으며, 그러므로 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 심판 아래 있지 않다.

“또한 너희가 먹이가 되겠다고 말했던 너희의 어린 것들과 그 날에 선악 간에 지식이 없었던 너희 자녀들은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로 그것을 소유하게 하리라.”(신 1:39).

아이가 자신이 행하는 잘못된 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지식이 양심을 통해 오든 성경을 통해 오든,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 앞에 죄책(guilty)을 지게 되고 그의 죄들이 그에게 전가된다.

그 순간부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책임이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

“내가 전에는 율법 없이 살았으나 계명이 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느니라.”(로마서 7: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바로 여기에 당신의 구원과 아브라함의 구원 사이의 차이가 있다.

당신의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희생으로 지불되었다.

당신이 당신의 죄들을 위해 그 희생을 신뢰했을 때, 그 대가는 이미 지불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신에게 전가되는 의가 그 희생에 의해 보장되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의를 받았지만, 여러 해 후 자기 아들을 희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전까지는 의롭게 되지 않았다. 그의 죄들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9 그러면 이러한 복이 할례자에게만이냐? 아니면 무할례자에게도냐? 이는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노라.”고 했음이라.

10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그가 할례 때였느냐? 아니면 무할례 때였느냐? 할례 때가 아니라 무할례 때였느니라.

 

바울이 묻는 질문은 “누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인가(“할례받은 자들에게만”)?

아니면 이방인들(“할례받지 아니한 자들”)도 그 복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간다.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았는가?

할례받기 전이었는가, 아니면 할례받은 후였는가?

그는 할례받지 않은 상태였던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7장에 이르러서야 할례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아브라함에게 전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유대인이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높은 아버지”에서 “많은 민족들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창 17:5).

이 이름의 변화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오직 한 아들인 이삭에게만 이어졌기 때문이다(창 17:21).

할례는 아브라함의 선택받은 씨와 맺은 언약의 표적이었다.

이삭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 둘 다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야곱에게로 이어졌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언약이 그 열두 아들과 그들의 후손 모두에게 이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열두 아들을 선택하셔서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루게 될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았을 때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할례받지 않은 히브리인이었다.

그가 전가된 의의 복을 받았을 때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언약과 할례는 그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이었다.

 

오전설교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의 법칙

손을권 형제
갈라디아서 6장 7절-10절
본문 말씀
7 속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 8 자신의 육신에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고 성령에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쓰러지지 아니하면 때가 되어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기회가 닿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할지니라.

  사람들은 흔히 조금쯤은 괜찮겠지 라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심고 거두는 원리를 세우셨다. 농부는 벼를 심고 보리를 거둘 수 없다 콩을 심고 팥을 기대하지 않는다. 심는 것이 그대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원인없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변하지 않는 원리를 세우셨다. 그것은 심는대로 거둔다는 법칙이다 영적인 세계도 이와 같다.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과 시간 물질과 헌신은 모두 하나님 앞에 심는 씨앗이다. 오늘 본문 내용은 성도의 삶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영적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속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세상을 속일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결코 속일 수 없다. 바울은 “속지 말라”라고 강력한 경고를 한다.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속지 말라는 뜻보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영적 자기기만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영적 기만”이란 자신의 영적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잘못 판단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이다 본인 스스로는 하나님과 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교회에 다니므로 영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예배를 드리고 있으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생각, 성경 지식이 많으므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 하는 것, 겉으로 경건해 보이지만 마음속에 죄를 품고 있는 것, 성령의 열매가 없는데도 자신을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영적 자기기만인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속지 말라” 죄는 반드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죄를 심고도 축복을 거두기를 바란다. 육신을 심으면 육신의 열매를 거두고 성령에 심으면 성령의 열매를 거둔다. 자기 기만은 하나님의 법칙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체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율법을 자랑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가운데 심는 것과 거두는 것의 원리를 가볍게 여겼던 것이다. 겉으로는 믿음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삶은 육신을 따라 사는 삶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경배만 잘 드리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맡은 직분을 자랑한다. 믿음 생활을 오래 했으니라고 만족한다. 이런 생각은 자신을 속이는 것들이다. 여러분들은 육신에 심는 것과 성령에 심은 것에 따른 결과들을 놓고 스스로에게 농담을 하거나 하나님을 우롱해서는 안 된다 쾌락 주의자들처럼 죄를 가볍게 다루거나 경솔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즐거운 것으로 여기지만 그 결과는 동일한 타락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조금 죄를 지어도 괜찮아 남이 모르니깐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반드시 너희의 죄가 너희를 찾아낼 것임을 알라.”(민32:23)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반드시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신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살피고 날마다 성령을 따라 씨를 심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렇다면 어디에다 심을 것인가? “자신의 육신에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라고 말씀한다. 육신은 단순히 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본성 옛사람을 따라사는 삶을 말한다. “이제 육신의 일들은 분명히 나타나나니 곧 간음과 음행과 더러운 것과 음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질투와 분노와 투쟁과 분열과 이단들과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거림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미리 말하노니 그런 짓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갈5:19-21) 이런 것들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육신에 씨를 심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말한다. 하나님보다 내 뜻을 더 강조하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명예를 더 추구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추구하는 삶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반대로 자기 욕심을 가장 우선시하는 삶은 자기 육신에 심는 삶을 말한다. 육신은 항상 하나님보다 세상을 선택하게 만든다 육신에 심는 삶은 죄를 합리화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자신의 육신에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라고 말씀한다. 우리 모두는 육신에 심는 삶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런 짓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는 준엄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잊지 말아야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성령에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성령에 심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성령에 심는 삶이란? 하나님 말씀에 가까이하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위로자이신 성령을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들을 가르치시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들을 기억나게 하시리라.”(요14:26)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결단하는 것이 성령에 심는 삶이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 말씀을 읽고 듣고 믿고 순종하며 자신에게 적용하고 실행해 나가는 삶을 살아 가야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먼저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한다. 성령에 심는 삶이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말씀 묵상은 성경을 읽거나 생각하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의 묵상은 지식을 쌓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삶을 다스리시도록 하는 영적행위인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의 의미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을 말한다. “그의 즐거움이 주의 법에 있으니, 그가 주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2) 묵상한다는 것은 중얼거리다 깊이 생각 한다는 뜻이다. 말씀을 반복하여 마음속에 새기고 붙드는 것을 말한다. 성경묵상의 목적은 순종이다. 묵상은 행동으로 이어질 때 와성된다 묵상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또 묵상은 죄를 이기게 한다. 묵상은 말씀을 마음속에 저장하는 것이다 유혹이올 때 마음에 저장된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 성령에 심는 삶은 기도의 삶이다. 기도는 성령과의 교제이다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의지하는 삶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6:18)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보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다. 기도하는 삶은 단순히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다. 또 기도는 쉬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다. 이는 하루 종일 무릎만 꿇으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기쁠 때도 감사하고 어려울 때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이 기도하는 삶이다. 성령에 심는 것은 순종하는 삶이다. 순종하는 삶은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음으로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순종하는 삶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이다. 순종은 말씀을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순종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붙드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 순종함을 잘 심었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성경은 보장한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그러한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의 열매는 인간이 억지로 만들어내는 덕목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과 기도와 순종을 통해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것이다 이러한 열매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영적인 수확을 거두게 하신다. 이 열매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자신을 맡길 때 맺히는 열매들인 것이다.

 

  두 번째로 낙심하지 말라. 성령의 열매들을 심었다면 포기해서는 안 된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쓰러지지 아니하면 때가되어 거두리라”(갈6:9) 우리의 믿음의 생활은 장거리 마라톤과 같다. 처음에는 열심히 믿음을 지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열심을 내어도 인정받지 못하며 선을 행해도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때 우리마음에 찾아오는 것이 낙심이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계속 선을 행하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낙심한다는 것은 마음이 약해지고 지쳐서 포기 하는 것을 말한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착한 일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세상이 원하는 선이 있다. 이선은 사람이 규정한 도덕과 윤리에 근거를 둔다. 이런 세상적인 선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둘째,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말씀을 지키는 것 기도하는 것 경배 드리는 것 사랑을 베푸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지역교회를 섬기는 것 이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보면 지칠 때가 있다. 왜 나만 헌신 하는가? 왜 내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가? 왜 선을 행하는데도 어려움이 계속되는가? 이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들도 낙심할 때가 있었다. 모세는 광야에서 완악한 백성들로 인해 낙심했었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칼멜 산의 승리 후 한 여인의 저주로 인해 크게 낙심했었다. 바울도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일어섰던 것이다. 성도의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싸움이다. 혹시 오늘 여러분 가운데 낙심한 사람이 있는가? 기도를 포기하고 싶고 섬김을 그만두고 싶고 믿음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으로 낙심하지 말라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쓰러지지 아니하면 때가되어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부는 씨를 심고 바로 추수하지 않는다. 비가오고 햇빛이 비치고 시간이 지나야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정하신 때가 있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에도 때가 있다. 복음전파의 열매도 헌신의 열매에도 때가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눈에는 늦어 보여도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백배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선은 거창한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사랑과 섬김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 낙심은 마음이 약해진 상태이고 포기는 믿음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을 귀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주님도 십자가를 끝까지 지셨고 사도바울도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고백했다. 믿음은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조금만 더 기도하여라 참고 사랑하라 충성하고 열심을 내라고 하신다. 그리하면 때가 되면 거둔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과 수고를 기억하신다.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낙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게 하신다.

 

  세 번째로, 기회를 선용하는 성도의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회가 닿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우리의 인생은 기회의 연속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시간과 물질 재능 건강 만남의 기회를 허락 하신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다. 본문 10절은 기회가 닿는 대로라고 말한다. 여기서 기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때와 환경과 여건 등을 말한다. 오늘 건강할 때 선을 행해야한다 오늘 물질이 있을 때 나누어야한다 시간이 있을 때 섬겨야한다. 내일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해야한다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때 전해야한다 성경을 읽을 수 있을 때 읽어야한다 부모님을 섬길 수 있을 때 섬겨야한다 경배드릴 수 있을 때 감사함으로 드려야 한다. 기회가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라고 말씀한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들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고 기도하며 세워주어야 한다. 믿음에 가족들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한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온몸이 함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한 성도가 낙심하면 공동체 전체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 병든 성도를 돌아보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도를 돕고 시험과 고난가운데 있는 성도를 격려하고 연약한 성도를 붙들어주고 함께 기도해야한다. 우리 모두는 맡겨주신 지역교회에서 이러한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서로의 필요를 채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재로 나타냈었다. 오늘날 교회역시 동일한 부르심을 받고 있다 교회 안에서의 지체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는 삶은 때로는 손해처럼 보일 수 있다. 시간의 헌신이 필요하고 물질의 나눔이 필요하고 마음에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결코 잊지 않으신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를 잊으실 만큼 불의하지 아니하심이라. 그 사랑은 너희가 성도들을 섬겼고 또 지금도 섬김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향해 보인 것이라.”(히6:10) 우리가 행한 작은 선행하나 작은 섬김 하나 작은 헌신 하나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돌아오지 않는다. 이름 없이 드리는 봉사도 조용히 베푸는 사랑도 복음을 위한 헌신도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고 계신다.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의 법칙은 지금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토임을 정확하게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포기하고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갈 길을 잘 달려가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며 주님 앞에서 영원한 상급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한 풍성한 상급을 받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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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이 짐이 될 때

조경재 형제
누가복음 10장 38절-42절
본문 말씀
38 그들이 길을 가고 있을 때 주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니 이름이 마르다라고 하는 한 여인이 주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녀에게는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도 예수의 발 앞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듣고 있더라. 40 그러나 마르다는 접대하는 일이 많아서 경황이 없더라. 그러므로 그녀가 와서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동생이 접대하는 일에 나 혼자만 남겨 놓은 것을 개의치 아니하시나이까? 그녀에게 말씀하셔서 나를 도와주라고 하소서.”라고 하니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며 수고하고 있으나 4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았지 못하리라.”고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마을의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삼남매를 각별히 사랑하시고 아끼셨다. 이 남매의 기록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발견된다. 그 중 본문의 이 기록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어떤 유형의 인물인지 알려주는 기록인데, 마르다의 관점에서 그녀의 섬김이 주제가 되고 있다. 마르다는 섬기는 사람이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한다. 그리고 그들을 정성껏 접대하고 시중들고 섬긴다. 여기에는 선한 동기와 아름다운 마음이 발견된다. 그러나 그녀는 지쳐간다. 섬김이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돼 버려 더 이상의 기쁨은 발견되지 않고, 원망과 불평이 싹트고 있다. 마르다의 섬김은 분명 잘못이 아니다. 섬김은 선한 일이다. 그런데 왜 마르다는 그 섬김으로 괴로워하게 되었는가? 본문의 말씀을 통해, 마르다와 같이 섬기는 일에 힘쓰는 성도가 어떻게 짐에 눌리게 되는지, 그리고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 알아보길 바란다.

 

  “섬김이 짐이 될 때, 주님의 발 앞에 나아가야 한다.” 첫째로, 짐이 되어버린 섬김은 원망을 낳는다. 마르다가 접대하는 일로 “경황이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40절). 마르다는 왜 경황이 없었을까? 그녀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했을 때의 섬김을 구체적으로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의 맥락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당시 손님을 초대해 대접한다는 것은 오늘날보다 훨씬 중요한 개념이었다.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세 천사를 대접한 경우가 있었다(창18:2,3). 마르다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가장 존귀하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다. 그녀가 얼마나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최선을 다해 대접하고 싶었겠는가. 손님이 집에 방문하면 먼저 발 씻을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한다. 그리고 화평의 입맞춤으로 환대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지쳤을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준다. 이 초대풍습을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눅 7:44~46). 그리고 손님들의 수에 따라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일을 몇 명에게 해야 했을까? 예수님께서는 항상 12명의 사도들과 함께 다니셨다. 초대한 일행은 최소 13명이다. 그리고 이들 외에 다른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본문 10장에서는 70명의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파송하셨고, 이들이 다시 돌아왔다. 이 70명 중 절반 정도가 따라왔다면 35명이 온 것이며, 총원은 약 50명 정도가 된다. 초대한 손님의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들의 수가 마르다를 지치게 하고, 마르다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수였음은 분명하다.

  마르다는 이 많은 접대하는 일들로 경황이 없었는데, 이는 마르다가 일로 인해 스트레스받고, 중압감에 눌리며, 압도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 결과 마르다의 처음 동기는 사라졌다. 그녀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선한 섬김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자신이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이 숨을 막히게 할 뿐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데서 떠난 시선은 사람을 향하게 되어있다. 먼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본다. 많은 일들로 지쳐버린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동정하고 연민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쉬 다른 이들에 대한 원망으로 넘어간다. 마르다의 섬김의 동기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없는 섬김은 아무것도 아니다. “또 내가 내 모든 소유를 주어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3) 마르다는 자신의 동생을 바라본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다. 마르다의 마음이 평소와 같아 사랑으로 넘치고 있었다면 자신의 동생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이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리아가 자신의 바쁜 일은 돕지 않고 앉아만 있음에 분노한다. 그리고 원망한다. 이 원망의 마음은 가족에게 멈추지 않고, 성도들에게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 향한다. 마르다는 주님께 “주여, 내 동생이 접대하는 일에 나 혼자만 남겨 놓은 것을 개의치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하는데 이 말에는 다분히 원망과 불평이 섞여있다. ‘왜 주님께서는 나만 혼자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내버려두십니까?’, ‘왜 주님께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 상황을 허락하십니까?’, ‘왜 주님께서는 이 고난에 개입하지 않으십니까?’ 짐이 되어 버린 섬김은 원망을 낳고, 그 원망은 하나님을 향해 있다.

  성도 또한 마르다와 같이 섬김이 짐이 되어 버릴 수 있다. 분명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끝은 쓰라린 비탄과 공허와 원망만이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처럼 섬기고 수고하지 않아 보이는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원망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낼 수 있다. 그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 지체하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로, 섬김이 짐이 될 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섬김이 짐이 된 마르다는 무겁고 지치고 염려가 가득한 마음을 안고 예수님께 나아가 동생에 대한 원망과 예수님에 대한 불평을 쏟아낸다. 마르다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마르다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섬김을 시작했다. 그녀의 선한 동기 덕분에 많은 이들이 편안함을 얻었고, 대접받았다. 그리고 마리아는 언니 덕분에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왜 이 많은 일들을 한 마르다는 정작 행복하지 않은 것인가? 마르다는 많은 일들로 인해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버렸다. 그녀의 마음속에 더 이상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 일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마음속에 가득 차 있어야 할 예수님의 자리를 무언가 밀어낸다면 그것은 우상이다. 사역이라 할지라도, 섬김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 해도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우상이다.

  마르다는 마침내 참고 또 참다가 분노가 폭발하여 예수님께 나아간다. 잔뜩 성나고 서운한 상태로, 상한 마음으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간다. 이 순간이 마르다가 예수님과 비로소 다시 가까워진 순간이다. 예수님을 만나 집으로 영접했을 때부터 마르다는 많은 일들로 주님의 곁에 있지 못했다. 많은 시간 부엌에서, 때로는 현관에서, 동분서주 바쁘게 다니느라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주님과 멀어진 마르다는 점점 지쳐갔고, 결국 섬김이 감당하기 버거운 짐이 되었다. 그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예수님께 하소연하러 나아온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순간을 기다리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데 왜 마르다의 이 상태를 모르셨겠는가? 마르다가 어떤 마음으로 접대하고 있는지 모르셨을리 없다. 주님께서는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 짐이 어떤 형태의 짐이든, 얼마나 무거운 짐이든, 심지어 하나님의 일이 짐이 되어버린 경우라 할지라도. 어떤 짐이든 그 짐으로 인해 신음하고, 무거워하며, 수고하고 있다면 자신에게 나아오라 명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 고 하시더라. (마11:28~30)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상하고 지친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다. 모세가 그러했고(민11:11~15), 엘리야도 그랬다(왕상19:4).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들을 하다가 지치고 낙심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들을 꾸짖지 않으셨다. 그 정도 일도 못하느냐고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들의 연약함과 한계를 아시고 자상하게 말씀하시고 쉼을 주셨다.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왜 동생에 대해 원망하고, 나에게 불평하냐고 혼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상하게 그녀의 상황을 헤아려 주시고, 위로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며 수고하고 있으나” 그리고 사랑의 말씀으로 마르다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심으로써 바로잡아 주셨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았지 못하리라.” 그 말씀으로 마르다는 회복될 수 있었다.

  혹시 섬김이 짐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자신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지 반드시 돌아봐야 한다.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의 발 앞에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나아가는 것이다. 기도의 골방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경을 묵상하며 말씀을 들으라. 그리고 설교자를 통해 주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는 것만이 필요한 한 가지이다. 그 외 모든 것은 “많은 일들”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섬김이 짐이 될 때, 주님의 발 앞에 나아가야 한다. 셋째로, 필요한 한 가지를 선택하라.

  마르다가 많은 일들로 수고하고 고통받으며 염려할 때, 마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마리아는 주님 앞에 있었다. 예수님의 발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앉아있었다. 언니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괘씸히 여길 수 있다. 집에 손님들이 찾아와서 일이 많으면 당연히 같이 돕는 것이 가족으로서의 도리가 아닌가? 마리아는 앉아서 대접받는 입장이 아니라 언니와 함께 일하는 위치에 놓여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왜 마리아는 앉아 있는 것인가? 그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마르다의 상태를 몰랐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언니가 연신 땀을 닦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수고하는 것을 마리아가 몰랐을리 없다. 마리아는 편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그곳에 앉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의 수고를 도와야 함을 앎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선택한 것이다. 이 순간,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있다. 그 자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이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인이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말씀을 듣는다해도 저 멀리 많은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들어야 하는 위치가 마리아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선택했다. 주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서 듣기로. 많은 제자들을 제치고, 그리고 열두 사도들을 제치고, 마땅히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있어야 할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제치고 마리아가 앉아 있다. 왜 이 여인에게 많은 이들이 시선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마리아는 그것을 이겨낸 것이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서 듣기 위해 가족 간의 도리와 사회적 위치를 내려놓았다. 그것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마리아를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셨다.

  많은 일들이 있다. 집안일이 있고, 빵을 가져오기 위해 해야할 직장의 일, 학교의 일, 교회의 일이 있다. 그러나 필요한 한 가지는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 어떠한 일도 이 한가지를 방해하게 두지 않기로 선택해야 한다. 이 거룩한 결심만이 섬김이 원망으로 변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결과를 방지할 수 있다. 주님과의 교제를 인생의 최우선으로 두는 것만이 인생을 최상으로 살 수 있는 첫단추를 끼우는 것이다. 섬김은 중요하다. 반드시 필요하다. 섬김이 없으면 가정과 교회는 운영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섬김에 앞서 반드시 주님과의 교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힘을 얻고 난 뒤 일을 해야한다.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나서 걸어가야 한다. 일이 급하다고 해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일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주유경고등이 들어왔는데 빨리 가야한다는 이유로 액셀페달을 더 밟는 이는 없다. 차도 망가지고, 더이상 갈 수도 없다. 주님과의 교제가 먼저다. 주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그 힘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할 때, 끝까지 쓰임받을 수 있다.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반면교사와 바람직한 대상의 대조모델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마리아와 마르다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이 주시는 교훈은 우선순위다. 먼저 주님과의 교제로 힘을 얻으라.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하라. 그러면 도중에 지치거나 낙심하거나, 원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어떠한 것도, 심지어 사역이라 할지라도 나와 주님과의 교제를 앞서게 하지 않겠노라 선택하라. 결심하라. 그러면 성도의 모든 수고와 노력과 땀방울은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섬김이 짐이 되어버린 마르다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앞치마를 입지 않고, 섬김에서 떠났을까? 말씀을 듣는 것만이 가장 귀한 일이니, 섬기는 일은 등한시하였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요한복음 11장, 12장을 통해 본문 이후의 베다니 세 남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마르다는 다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시중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요12:2). 그러나 그녀의 섬김의 동기는 다시 회복되었다.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 위로받고, 말씀으로 바로잡혀진 그녀는 다시금 기쁜 마음으로 섬기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도 이처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각자에게 맡겨진 선한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기쁘게 주님을 뵙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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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기를 거부한 사람

조도희 담임목사
사무엘하 23장 9절-10절, 역대기상 11장 12절-14절
본문 말씀
9 그의 다음으로는 아호아인 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한 세 용사 중 하나더라. 그들이 싸우려고 모인 필리스티아인들을 대항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가자 10 그가 일어나 필리스티아인들을 치되, 그의 손이 지칠 때까지, 그의 손이 칼에 달라붙을 때까지 하였더라. 주께서 그 날 큰 승리를 이루셨으니, 백성은 그를 따라 돌아오며 약탈할 뿐이더라. 12 그 다음으로는 아호아인 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그는 세 용사 중 하나더라. 13 그가 파스담밈에서 다윗과 함께 있었는데 그곳은 필리스티아인들이 싸우려고 모여 있는 곳으로, 보리로 가득 찬 땅 한 부분이 있었더라. 그런데 백성이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도망하였으므로, 14 그들이 그 땅 가운데 서서 그 땅을 방어하며 필리스티아인들을 죽였으니 주께서 그들을 큰 구원으로 구원하셨더라.

  본문에 나오는 엘르아살은 다윗의 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비록 성경이 엘르아살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지만, 엘르아살은 포기하기를 거부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왕에게 신실한 사람이었다. 엘르아살이 포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를 크게 사용하셨다. 그리스도인의 당위성은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인생에서 무슨 일이 닥치든 나의 왕 나의 구주 곁에 굳게 서 있기를 원한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욕심과 정욕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주님께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엘르아살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들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굳게 서서 그분께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도록 도와줄 수 있다.

 

  포기하기를 거부한 사람은 맡겨진 것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다. 포기하기를 거부한 사람이 되려면 왕 곁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 장면은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시작된다. 엘르아살은 다윗 왕 곁에 자기 자리를 잡았다. 그는 칼을 뽑아 들고 다윗과 이스라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엘르아살의 자리는 그의 왕 곁이었다! 엘르아살은 다윗을 따르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다윗과 함께 섰다. 그러나 엘르아살이 다윗과 함께 섰던 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엘르아살은 자신의 생명과 건강과 안전보다 자기 왕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다윗과 함께 섰다. 엘르아살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자리가 다윗 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요구한다 해도 엘르아살은 다윗 곁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전쟁 가운데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진리와 거룩함을 대적하는 세상 체계와 싸운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는 죄와 싸운다. 우리는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마귀와 싸운다(벧전 5:8).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일함과 무관심과도 싸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우리는 전쟁 가운데 있다. 에베소서 6:10–18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고 우리를 패배시키고 지배하려는 마귀의 공격에 맞서 굳게 서라고 배운다. 디모데전서 6:12에서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5:17에서 바울은 우리가 싸우고 있는 전쟁에 관하여 더욱 자세하게 말한다.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며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들은 서로 반목하여서 너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느니라.” 바울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마치 적들과 싸워 승리한 노련한 전사처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말한다.

  우리는 전쟁 가운데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깨어나야 한다. 또한 전쟁의 날에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은 우리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가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분 가까이에 있으면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도 가까워진다.

  이스라엘 군대의 다른 병사들이 도망쳤다. “그런데 백성이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도망하였으므로”(대상11:13) 그러나 그때 엘르아살은 자기 자리를 지켰다. 엘르아살이 자기 왕 곁에 머물렀던 것은 두 가지 사실이 그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는 왕이 자신의 삶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가치 있었기 때문에 왕 곁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왕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왕 곁에 머물렀다.

  인생의 전투가 우리 주위에서 격렬하게 벌어질 때 우리 역시 바로 이 두 가지 사실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그 어떤 것보다 더 가치 있는 분이 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엘르아살에게 그의 왕은 자기 생명보다 더 가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왕 곁에 있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 되실 때, 그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나 활동들이 우리와 주님 사이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삶은 균형을 잃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고 무엇을 다시 정리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예수님보다 앞서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을 인생의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마 22:37–38).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할 수 있는 한 그분께 가까이 있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을 다른 것들에게 주면 그것들이 우리를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당신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붙들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에서 그 무엇도 그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의 자리는 가능한 한 왕께 가까이 있는 곳이다. 당신의 길이 평탄할 때 그분과 함께 걸으라.

  압박이 밀려올 때 그분 곁에 머물라. 원수가 와서 당신을 왕에게서 유인하여 멀어지게 하려고 할 때 온 힘을 다해 그분을 붙들라. 또 다른 전투의 한복판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반드시 그분 가까이에 서 있으라. 그곳이 당신의 자리이다. 그 밖의 어떤 곳도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엘르아살은 자신의 자리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떠나실까 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히 13:5). 그러나 우리가 그분에게서 멀어질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예방책은 왕 가까이에 머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흠뻑 젖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로 끊임없이 그분과 교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찾으며, 우리와 그분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멀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셨을 때 21절에서 “보라, 내 옆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한 바위 위에 설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그분 곁에는 한 자리가 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당신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

그곳은 기쁨의 자리이며, 화평의 자리이며, 안전의 자리이며, 능력의 자리이며, 복의 자리이다. 엘르아살처럼 당신도 자신의 자리에 있기 위해 힘쓰라!

 

  포기하기를 거부한 사람은 왕과 맡겨진 것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다. 포기하기를 거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맡겨진 것을 다음 세대를 위해 지켜야 한다.

  역대기상 11:12은 이 전투가 “보리가 가득한 땅 한 부분”이 있는 곳에서 벌어졌다고 말한다. 다윗은 이 땅에서 자기 자리를 지켰고, 엘르아살도 그와 함께 섰다. 다윗과 엘르아살은 원수로부터 이 땅을 지키려고 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스라엘의 곡식 수확기에 공격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가꾸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곡식이 수확할 때가 되면 공격하여 그 곡식을 자기들의 것으로 빼앗으려고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스라엘 백성은 식량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다. 다윗과 엘르아살은 필리스티아인들이 이 땅을 빼앗도록 내버려 두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그 땅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엘르아살의 목적은 분명했다. 그는 수확이 끝난 뒤 자기 백성이 먹을 양식을 확보함으로써 그들을 돕고자 했다. 엘르아살은 자기 왕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동시에 자기 백성을 돕기 위해서도 싸웠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위해 우리의 자리를 지킬 때, 우리의 첫 번째 우선순위는 언제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위해, 그리고 그분과 함께 설 때 또 하나의 목적도 이루게 된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 굳게 서면, 우리 뒤에 오는 세대가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갖도록 지켜 주는 것이다.

  진리의 원수들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한다. 그들은 교회를 침묵시키려 한다. 그들은 우리의 손과 마음에서 성경을 빼앗으려 한다. 그들은 성경적 기독교 신앙이 신속하게 죽어 사라지기를 원한다. 그들은 우리가 사라지기를 원한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진리를 둘러싼 싸움에서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교회에서 밝게 빛나던 빛이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그 빛이 완전히 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자기 자리를 지키며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진리를 위해 서고, 그 진리를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사도들은 예수님에게서 그 메시지를 받았다. 그들은 그것을 지켰고, 선포했으며, 다음 세대에 전해 주었다. 그들에게서 진리를 받은 사람들도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해 주었다. 그렇게 진리는 여러 시대를 거쳐 마침내 우리의 손에까지 전달되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가 받은 진리를 붙들고, 사랑하고, 살아 내고, 선포하고, 지키며,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의무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굳게 서서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먹을 수 있다.” 엘르아살이 보리로 가득한 땅을 지켰듯이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성경, 복음, 바른 교리, 교회,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잃어버릴 것이며,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물려줄 것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목적이 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 목적을 이루자!

 

포기하기를 거부한 사람은 왕과 맡겨진 것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다. 포기하기를 거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싸워야 한다.

  사무엘하 23:10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일어나 필리스티아인들을 치되, 그의 손이 지칠 때까지, 그의 손이 칼에 달라붙을 때까지 하였더라.” 엘르아살은 단순히 싸움을 시작한 사람이 아니었다. 싸움을 끝낸 사람이었다. 엘르아살은 너무 오랫동안 싸운 나머지 전투가 끝났을 때 칼을 내려놓기 위해 손가락을 펼 수조차 없었다. 엘르아살은 원수가 패배할 때까지 싸웠다. 그는 필리스티아인 군대의 위협이 남아 있는 한 싸움을 그만두기를 거부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러한 끈질김을 사용하셔서 “그 날에 큰 승리”를 이루셨다고 말한다. “주께서 그 날 큰 승리를 이루셨으니”(삼하 23:10).

  엘르아살에게서 우리가 보는 것은 원수가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을 알 때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완강한 결심이다. 그와 같은 끈질김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있어야 한다. 진리와 복음을 위한 싸움에 관한 한, 싸움을 포기하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태도는 모든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성품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무엇이 나를 멈추게 할 수 있는가? 무엇이 나를 주님에게서 돌아서게 할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두 “아무것도 없다!”여야 한다. 그 무엇도 우리와 우리의 왕 사이에 들어오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 무엇도 우리를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이탈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 무엇도 전투가 끝나고 우리가 영광의 본향에 이를 때까지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싸우는 것을 막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싸움을 시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싸움을 마치는 것이다. 칼을 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승리할 때까지 칼을 놓지 않는 것이다. 한때 신실했던 것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신실한 것이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한동안 잘 싸우다가 결국 전투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있다. 안타깝다. 어떤 사람들은 죄로 인해 전투에서 쓰러졌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쓰러졌다. 다른 사람들의 거친 말과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시선을 돌려 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싸움에 지쳐 쓰러졌다. 오늘 당신을 격려하고 싶다. 우리가 싸우는 전투는 힘들고, 길고,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가 싸우는 이 전투는 우리가 치르는 모든 희생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전투는 이길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용기와 헌신이 필요하다. 계속 싸우라. 굳세게 서 있으라.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린다면, 주께서는 우리의 싸움에 복을 주시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쓰러지지 아니하면 때가 되어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58)

 

  그날 전투가 끝났을 때 다윗과 엘르아살은 승리자가 되어 있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패배했고, “보리로 가득 찬 땅”은 지켜졌다. 사무엘하 23:10은 이렇게 말한다. “백성은 그를 따라 돌아오며 약탈할 뿐이더라.” 처음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도망쳤던 사람들이 승리를 거둔 뒤에 돌아왔다. 그들은 돌아와 죽은 원수들에게서 가치 있는 것들을 거두어 갔다.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굳게 지켰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큰 승리의 유익을 누렸다. 현실적으로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싸워야 하는 것처럼 싸우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마땅히 예수님과 함께 서야 하는 것처럼 서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든 싸움을 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그들이 싸워 얻은 유익만 누릴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큰 승리를 이루어 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마땅히 싸워야 하는 것처럼 싸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 전체가 함께 주님의 복을 누릴 수 있다. 엘르아살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수고로 얻은 유익을 누리는 것에 대해 화를 냈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승리는 이미 이루어졌고, 모든 사람이 그 승리의 유익을 누렸다. 우리가 우리의 왕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왕과 함께 싸우는 전투에는 승리가 있다. 그리고 그 승리는 우리가 치르는 전투와 희생과 싸움의 고통을 모두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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