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글자 크기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제 448 호 2026년 8월 16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설교
하나님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
조도희 담임목사 | 시편 103:1–5
오후설교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기도하신다.
조도희 담임목사 | 요한복음 17:11–26
수요설교
참된 만족을 주는 빵
조도희 담임목사 | 요한복음 6:35–40
오전설교

하나님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

조도희 담임목사
시편 103:1–5
본문 말씀
1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고 그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 3 그는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며 네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고 4 너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 자애와 온유한 자비들로 네게 관을 씌우시고 5 좋은 것들로 네 입을 흡족케 하시니 네 젊음이 독수리의 젊음같이 새로워지는도다.

  명제 : 그분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혼을 일깨워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를 송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큰 위험 가운데 하나는 드러난 반역만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조용히 잊어버리는 것이 큰 위험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를 건져 주신 일을 잊고, 용서하신 죄들을 잊으며, 수많은 위험에서 보호해 주신 은혜도 잊어버린다. 날마다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이 은혜라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다. 특히 어려움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 실제보다 크게 보이는 반면, 하나님의 은혜는 쉽게 뒤로 밀려난다.

다윗은 이 시편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회중에게 말하지도 않고, 원수에게 말하지도 않는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라.”(1) 다윗은 자기 혼을 향하여 명령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기억과 의지를 불러 모아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다윗은 찬양이 언제나 저절로 솟아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찬양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혼을 깨워야 한다.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진리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혼에게 주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라고 명령해야 한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많았다. 그러나 찬양할 이유가 많다고 해서 저절로 찬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의도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용서하신 것, 건져 주신 것, 보호하신 것, 그리고 날마다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혼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고 그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2)

오늘 우리도 다윗과 같이 자신의 혼을 깨워야 한다. 현재의 어려움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어 주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혼을 일깨워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를 송축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혼을 일깨워 송축하라.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1)

  여기에서 “송축하다(bless)”라는 말은 히브리어 “바라크”​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실 때에는 은혜와 호의를 베푸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더해 드린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무한히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한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정하고, 찬양하며, 존귀하게 여기고, 경배하며 높여 드리는 것​이다.

  다윗은 이어서 말한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다윗은 입술만 움직이는 예배를 원하지 않는다. 입술은 찬양하면서 생각은 다른 곳을 헤매고 마음은 차갑게 식어 있는 예배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전 존재를 불러 하나님을 경배하게 한다. 기억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해야 한다. 생각은 하나님을 묵상해야 한다. 감정은 하나님을 기뻐해야 한다. 의지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입술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혼(soul)”은 히브리어 “네페쉬”​를 번역한 말로, 단순히 감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전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다윗은 일시적인 감정적 체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가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부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을 나타낸다. 다윗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신실하시고,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케스트라를 생각해 보라. 오케스트라에는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클라리넷, 트럼펫, 호른, 타악기 등 많은 악기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악기가 지휘자의 지휘 아래 하나의 곡을 연주해야 음악이 된다. 현악기는 한 곡을 연주하고 금관악기는 다른 곡을 연주한다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다. 우리의 혼도 마찬가지다. 생각과 기억과 감정과 의지와 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휘 아래 하나로 모여야 한다. 다윗은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불러 한 곡을 연주하게 한다. 그 곡은 “주를 송축하라.”이다. 생각도 주를 송축하고, 기억도 주를 송축하며, 감정과 의지와 입술도 한목소리로 주를 송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기분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다윗은 자신의 혼에게 예배하라고 명령했다. 우리에게도 마음이 무거운 날이 있다. 생각이 산만하고 감정이 메마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바로 그런 때에 우리는 감정이 아니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말해야 한다.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담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내 안에서 불안해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시 42:5) 그리고 자신의 혼에게 다시 명령해야 한다.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라.”

  참된 예배는 단순한 감정 이상의 것이다. 우리의 전 존재가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무심코 내뱉는 말이나 생각 없이 부르는 찬송, 마음의 절반만 드리는 헌신보다 더 나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다윗과 같이 자신의 혼을 일깨워야 한다.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하나님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 그분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둘째로, 혼을 일깨워 기억하라.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고 그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2)

  다윗은 여기에서 찬양의 큰 원수 하나를 지적하는데 바로 망각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베푸심을 부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너무 자주 경험하다 보니 그것에 익숙해지고, 마침내 그것이 자비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다.

  “베푸심(benefits)”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베푸신 선하신 일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빚지고 계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좋은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잊지 말라”는 말씀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정보를 지우지 말라는 의미 이상이다. 성경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의식적으로 마음 앞에 다시 불러내어, 그 기억이 현재의 태도와 행동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 기억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것에 자주 실패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먹었던 음식은 기억했지만 노예생활은 잊었다. 광야에서 목마른 것은 기억했지만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은 잊었다. 자신들에게 없는 것은 기억했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공급하신 것은 잊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고통은 기억하면서 보호하심은 잊는다. 무거운 짐은 기억하면서 견디게 하신 은혜는 잊는다. 닫힌 문은 기억하면서 그 문을 통하여 어떤 위험에서 보호받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신 것은 기억하면서 이미 주신 것은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때가 많다.

  다윗은 하나님의 베푸심을 하나씩 헤아리기 시작한다. “그분께서 용서하신다.”(3) “그분께서 치유하신다.”(3) “그분께서 파멸에서 구속하신다.”(4) “그분께서 관을 씌우신다.”(4) “그분께서 만족하게 하신다.”(5) 다윗은 자신의 문제를 세지 않고 하나님의 베푸심을 헤아린다. 이것이 영적 망각을 이기는 중요한 방법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기억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응답받은 기도를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건져 주셨는지 돌아보라. 어떤 위험에서 보호하셨는지 생각하라. 가족과 자녀들에게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하라.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라. 현재의 상황만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고난이 과거의 자비를 지울 수 없다. 잠시 동안의 슬픔이 영원한 은혜를 취소할 수 없다. 오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제 신실하지 않으셨던 것이 아니다. 오늘 한 가지 기도가 아직 응답되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까지 응답하신 수많은 기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낙심을 치료하는 방법은 때로 새로운 복을 하나 더 받는 것이 아니다. 이미 받은 복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다시 감사할 텐데.” “이 기도만 응답되면 다시 기뻐할 텐데.” 그러나 다윗은 말한다. 새로운 베푸심을 기다리기 전에 이미 받은 베푸심을 기억하라. 용서받은 것을 기억하라. 건짐받은 것, 보호받은 것, 공급받은 것, 그리고 지금까지 붙들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라. 그리고 자신의 혼에게 다시 말하라.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고 그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 그분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셋째로 받은 은혜를 하나씩 헤아리라. “그는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며 네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고 너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 자애와 온유한 자비들로 네게 관을 씌우시고.”(3–4)

  이제 다윗은 2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모든 베푸심”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열거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가장 깊은 영적 필요인 죄의 용서에서 시작하여, 생명을 구속하시고 자비로 둘러싸시는 은혜까지 나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신다. “그는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며.” “죄악(iniquities)”이라는 말에는 죄책과 도덕적 비뚤어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죄는 단순한 실수나 좋지 않은 습관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범하고 그분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이다. 다윗은 죄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간음과 속임수와 살인이라는 무서운 죄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다. 그러나 다윗은 죄책의 고통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용서의 기쁨도 경험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완전한 용서가 있다.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용서하신다. 갈보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들의 죄값을 완전히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담당하신 죄들을 계속 짊어지고 살지 말라. 죄를 정직하게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충분하심 안에서 안식하라.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리스도는 그보다 더 크신 구주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치유하신다. “네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고.” “치유하시다”는 히브리어 “라파”​에서 나온 말로, 치료하고 회복시키며 온전하게 한다는 뜻이다. 모든 치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나 이 말씀을 모든 성도가 모든 질병에서 즉시 치유받는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윗도 결국 죽었다. 바울에게는 제거되지 않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바울은 트로피모를 밀레토에 병든 채 두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치유의 근원이시다라는 사실이다. 어떤 치유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에게는 장차 완전한 치유가 기다리고 있다. 부활의 날에 우리는 질병과 연약함과 노화와 죽음을 모르는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병들었을 때 치유를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치료의 수단을 사용하라.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의 지혜에 맡기라. 질병을 제거하시면 치유하시는 은혜를 찬양하고, 질병을 남겨 두시면 견디게 하시는 은혜를 의지하라. 어느 경우든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신다 “너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 “구속하시다”는 히브리어 “가알”​에서 나온 말로, 구약의 친족 구속자와 관련된 단어이다. 되찾고, 구조하고, 건져 낸다는 뜻이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주 자신의 생명을 건져 주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었다. 들짐승에게서 건져 주셨다. 골리앗에게서 건져 주셨다. 사울의 창에서 건져 주셨다. 필리스티아인들의 군대와 압살롬의 반역에서도 보존해 주셨다. 그러나 모든 성도에게는 그보다 더 큰 구속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정죄와 영원한 심판의 구덩이에서 구속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참된 구속자가 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우리의 자리에 서셔서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을 지불하셨으며 우리의 영원한 유업을 확보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은 우리의 구원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와 고통까지도 취하셔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실 수 있다. 무너져 버린 세월도 사용하실 수 있다. 고통스러운 경험도 사용하실 수 있다.

  실패했던 시절도 영적인 유익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 실패가 마지막 말을 하게 하지 않으신다. 고통이 마지막 말을 하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구속이 마지막 말을 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애와 온유한 자비들로 우리에게 관을 씌우신다 “자애와 온유한 자비들로 네게 관을 씌우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두 가지 복을 주시고 끝내시는 분이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자애와 자비로 둘러싸고 계신다고 말한다. “자애”는 히브리어 “헤세드”를 번역한 것으로, 하나님의 변함없고 신실한 사랑을 나타낸다. 우리의 자격 때문에 계속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변하지 않는 사랑이다. “온유한 자비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깊고 따뜻한 긍휼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마지못해 견디시는 분이 아니다. 변함없는 사랑과 부드러운 자비로 우리를 둘러싸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 그분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넷째로 주 안에서 만족하고 새 힘을 얻으라. “좋은 것들로 네 입을 흡족케 하시니 네 젊음이 독수리의 젊음같이 새로워지는도다.”(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파멸에서 건져 내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좋은 것들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에게 무엇이 참으로 필요한지를 아신다. 우리의 죄악된 욕망이나 이기적인 소원을 모두 이루어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것을 주신다. 때로는 그것이 음식과 가족과 건강과 일과 휴식처럼 우리가 쉽게 선물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좋은 것이 어려움의 모습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징계와 기다림, 실망과 연약함을 통하여 우리를 바로잡으시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실 수도 있다.

  당장은 왜 그것이 좋은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에게 허락하시는 일들을 궁극적으로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좋은 것들로 만족하게 하실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네 젊음이 독수리의 젊음같이 새로워지는도다.” 성경에서 독수리는 힘과 인내, 높이 날아오르는 능력을 보여 주는 그림으로 사용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새로운 활력과 힘을 공급하신다는 말씀이다. 이사야 40:31도 말씀한다. “오직 주를 앙망하는 자는 자기의 힘을 새롭게 하리니 독수리처럼 날개로 치솟을 것이요.” 우리의 겉사람은 세월이 지나면서 약해진다. 질병과 고난 때문에 힘이 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하실 수 있다. 독수리를 생각해 보라. 독수리가 높이 오를 때 자신의 힘만으로 계속 날개를 퍼덕이는 것은 아니다. 날개를 펼치고 상승 기류를 이용하여 높이 올라간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끝까지 견디는 것은 우리 안에서 끝없이 힘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힘이 없다. 우리는 지치고 낙심하며 때로는 더 이상 감당할 힘이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성도는 위로부터 공급되는 힘을 의지하여 살아간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만족을 얻기 위해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소유물은 우리를 잠시 즐겁게 할 수 있지만 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 성공도 우리를 잠시 흥분시킬 수 있지만 끝까지 붙들어 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줄 수 있지만 우리 혼의 모든 필요를 채워 줄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만족시키실 수 있다. 세상은 계속 말한다. “조금만 더 가지면 만족할 것이다.” “조금만 더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다.” “조금만 더 인정받으면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의 것으로 채워도 하나님을 위해 지음받은 마음은 세상으로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 영적인 힘이 약해졌다면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수단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을 채우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찾으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이라. 그리스도를 묵상하라. 그리고 그분의 모든 베푸심을 기억하라. 참된 새 힘은 자신이 강한 사람인 것처럼 가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고갈되지 않는 힘을 의지할 때 새 힘을 얻는다. 내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게 된다. 내가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족을 누리게 된다.

 

  자기 자신의 혼에게 진리를 선포하라. 양심이 죄 때문에 무거울 때에는 “그는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며”​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몸이 연약하고 힘이 없을 때에는 “네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고”​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앞길이 막히고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너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외롭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애와 온유한 자비들로 네게 관을 씌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혼이 메마르고 힘이 다한 것처럼 느껴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좋은 것들로 만족하게 하시고 독수리처럼 새 힘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라. 현재의 어려움 때문에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오전설교 동영상 설교
오후설교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기도하신다.

조도희 담임목사
요한복음 17:11–26
본문 말씀
11 이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나 이들은 세상에 있나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나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셔서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었을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내가 지키었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로써 성경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가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마침내 자신들의 메시아이신 그분을 결정적으로 거절할 것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마저 자신을 버리고 달아날 것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날 밤 동산에서 자신과 함께 있던 열한 명의 제자들만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자신을 믿게 될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에 관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들어보자.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위해 기도하신다(11-19).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신다. 그곳에서 죽으실 것이며, 사흘 후에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40일 후에는 하늘로 승천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시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사역이 계속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주님은 당신이 안전하게 보호받기를 원하신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나 이들은 세상에 있나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나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셔서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었을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내가 지키었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로써 성경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옵니다.”(11-12) 이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영원한 구원의 보장이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능력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아버지의 능력 안에서 안전하게 지켜지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주님은 당신이 만족하기를 원하신다.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가나이다. 내가 세상에서 이런 것들을 말함은 나의 기쁨을 그들 안에서 충만케 하려 함이니이다.”(13)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그분의 기쁨을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하신다. 이 기쁨은 단순한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좋은 일이 생기면 행복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행복이 사라진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쁨(joy)​은 환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사역에 근거한 기쁨​이다. 갈라디아서 5:22은 기쁨을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 말씀한다. 세상은 온통 행복을 추구한다. 온갖 광고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자동차를 타면 행복해질 것이다.” “이 제품을 가지면 행복해질 것이다.” “이 화장품을 사용하면 행복해질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가지거나 경험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단순한 행복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을 약속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기쁨이 있기 때문에 암이 우리의 몸을 무너뜨리고 있을 때에도 만족할 수 있다. 기쁨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기쁨이 있기 때문에 역경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기쁨은 행복한 환경에 달려 있지 않다.

  주님은 당신이 세상과 분리되기를 원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더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나이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옵니다. 내가 기도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는 것이 아니옵고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시라는 것이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사옵니다.”(14-1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세상과 마귀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받기를 기도하신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주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뜻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살기를 원하시는 나의 구주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우리의 말과 행동, 우리가 보는 것과 듣는 것, 우리가 즐기는 것과 추구하는 것까지도 이 기준 앞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가 육신과 마귀를 대항하여 싸우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마련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악으로부터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주님은 당신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냈사옵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나는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를 통해 거룩하게 되기 위함이니이다.”(17-19)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깨끗하게 되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말씀은 우리의 삶 가운데 고쳐야 할 부분들을 드러내 준다.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드러낸다. 말씀은 우리의 태도를, 우리의 습관,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삶을 빚어 갈 때,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깨끗해지며 주인의 손에 더욱 유용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의무에 관하여 기도하신다.

  우리에게는 하나 됨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들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옵고 그들의 말을 통하여 나를 믿을 사람들도 위한 것이옵니다. 이는 그들 모두가 하나 되게 함이오니,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서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옵니다. 내가 그들 안에,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은 그들을 하나로 온전하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20-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연합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의견이 다를 수는 있지만, 서로 불쾌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든 문제에 대해 언제나 똑같은 의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싸우고, 비난하고, 관계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연합을 유지한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연합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광고판과 같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바라볼 때 그들은 둘 중 하나를 보게 된다. 그들은 우리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보거나, 아니면 ​다툼과 분쟁을 보게 된다. 교회 안에 사랑과 연합이 있다면 세상은 그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다툼과 경쟁과 분열이 있다면 세상은 그리스도보다 우리의 육신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자신의 교회가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우리에게는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 의로우신 아버지시여, 세상은 아버지를 몰랐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또 이들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또한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 알게 하였으며, 또 밝히 알게 하리니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또 내가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하시더라.”(25-2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한 마음을 품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를 마치시면서 우리가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랑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사랑은 단순히 성격이 온화한 사람들이 행하는 좋은 미덕도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 주는 표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짐을 지고, 서로 세워 주며, 서로 섬길 때 세상은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에는 단순히 우리가 어떤 복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만 들어 있지 않다. 그분의 기도에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도 들어 있다. 우리는 연합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연합 없는 교회는 세상에 혼란스러운 증거를 보여 준다. 사랑 없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자신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그 기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세상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최종 목적지에 관하여 기도하신다. “아버지시여, 내가 바라오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셔서 그들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이는 아버지께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옵니다.”(24)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하늘에 있는 그분의 집에서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언젠가 자신이 계신 곳에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마친 후 결국 그분과 함께 하늘에 있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 말씀에는 성도의 미래에 관한 놀라운 확신이 담겨 있다.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머물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여행에는 목적지가 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결국 집으로 가게 된다! 그 집은 이 세상에 있는 집이 아니다. 그곳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다. 그래서 바울도 빌립보서 1:23에서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말했다.

  성도의 궁극적인 소망은 단순히 고통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질병이 사라지는 것만도 아니다. 눈물이 없어지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직접 바라보는 것이다.

  하늘은 준비된 백성을 위하여 준비된 장소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처소를 준비하러 가셨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영접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늘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요한계시록 21–22장은 그곳에 관한 놀라운 모습을 보여 준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 되신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 그곳에는 더 이상 죽음도 없다. 슬픔도 없다. 울부짖음도, 고통도, 저주도 없다. 하나님의 종들이 그분을 섬길 것이며,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를 집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참된 집으로 데려가는 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때, 우리의 현재만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확실한 목적지가 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된다. 우리는 마침내 집에 도착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려고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다! 또한 그분의 기도 대부분이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실 것인지, 그리고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를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도 감사하다. 그러나 오늘 한 가지를 다시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어떤 부분들은 우리의 삶에서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기쁨으로 만족하는 삶,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삶,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 성도들과 하나 되는 삶,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삶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향한 주님의 뜻에 기꺼이 굴복하고 순종하려 할 때 실제로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당신은 성경적인 기도를 하고 있는가? 그분의 기도가 당신의 삶에서도 온전히 응답되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당신이 지켜지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당신이 그분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당신이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당신이 다른 성도들과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당신이 그들을 사랑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주님과 함께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분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 기도의 모든 내용이 지금 당신의 삶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가?

오후설교 동영상 설교
수요설교

참된 만족을 주는 빵

조도희 담임목사
요한복음 6:35–40
본문 말씀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 또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보고서도 믿지 않느니라.’고 했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38 이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자신의 뜻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는 것임이라. 39 이것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니, 즉 그분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 40 또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니,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 그리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고 하시더라.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한적한 곳으로 갔고, 예수님께서는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면 자신들의 필요를 계속해서 채워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왕은 자신들의 배를 채워 주고, 생활을 편안하게 해 주며,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피하셨다. 다음 날, 무리는 다시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 동기를 정확히 드러내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요 6:26) 그들은 예수님 자신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관심을 땅의 빵에서 하늘의 빵으로 돌리셨다. 그들이 모세와 광야의 만나를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는 만나를 준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분이기 때문이니라.”(요 6:33) 그러자 사람들이 말했다. “주여, 이 빵을 우리에게 항상 주소서.”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어떤 것을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어떤 선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 보호, 공급, 건강, 성공, 행복, 그리고 천국은 원하면서도 하나님 자신은 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시는지를 네 가지로 보여 주신다.

 

  참된 만족을 주는 빵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혼을 참으로 만족시키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 또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준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고대 세계에서 빵은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음식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단순히 삶에 무언가를 더해 주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분 자신이 생명이시다. 육신의 빵은 일시적으로 배고픔을 해결한다. 오늘 배부르게 먹어도 내일이면 다시 배가 고프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라고 해도 그것은 육신의 배고픔만 잠시 해결할 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오는 것과 믿는 것을 같은 의미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을 그분께 맡기는 것이다. 사람이 빵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그것을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빵의 재료를 알고, 영양 성분을 분석하고, 맛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에게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알려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먹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오래 다녔을 수 있다. 설교도 많이 들었고 성경도 많이 읽었으며 기독교 용어도 익숙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를 연구하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리라.” 오히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혼의 배고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돈, 명예, 인간관계, 소유, 쾌락, 성공, 성취를 추구한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만족은 언제나 잠시뿐이다. 돈을 얻으면 더 많은 돈을 원한다. 성공하면 더 큰 성공을 원한다. 인정을 받으면 더 많은 인정을 원한다. 세상은 항상 말한다. “조금만 더 가지면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가져도 만족은 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 물론 이 말씀은 성도가 인생에서 다시는 슬픔이나 고통이나 갈망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우리 혼의 가장 깊은 필요가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해답을 찾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말한다. “너에게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나다.”

 

  참된 만족을 주는 빵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보고서도 믿지 않느니라.’고 했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36-37)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보았다. 많은 사람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경험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목격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보고서도 믿지 않느니라.” 기적을 본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외적인 증거가 많다고 해서 불신하는 인간의 마음이 자동적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게 나아오는지를 설명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이 말씀의 순서를 주목해 보라. 아버지께서 주신다. 그들이 온다. 구원은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인간의 반응을 제거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리스도께 나아온다. 그들은 믿는다. 그들은 신뢰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믿음은 서로 대립하는 진리가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뒤를 돌아보면서 깨닫게 된다. “내가 주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찾으셨구나. 내가 은혜를 붙든 것이 아니라 은혜가 먼저 나에게 찾아왔구나.”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자랑을 모두 무너뜨린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로웠다.” “나는 판단력이 더 좋았다.” “나는 영적인 것을 더 잘 깨달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바울의 고백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내가 되었고…”(고전 15:10) 구원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이다. 그러므로 선택과 은혜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교만할 수 없다. 오히려 질문은 이것이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가?” 은혜는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여지를 조금도 남겨 두지 않는다.

 

  참된 만족을 주는 빵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오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또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37)

  이제 우리는 본문 가운데 가장 위로가 되는 약속 중 하나를 만난다. “결코”라는 표현은 아주 강력한 부정이다. “어떤 경우에도 내게 오는 자를 나는 결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자신에게 나아오는 죄인에게 문을 닫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 약속을 누가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라. 어떤 설교자가 아니다. 어떤 교단이 아니다. 어떤 신학자가 아니다. 어떤 종교 기관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약속이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는 너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도 오라! “나는 너무 오랜 세월을 허비했습니다.” 그래도 오라! “나는 너무 많이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오라!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사람을 받아 주실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라.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 우리의 구원의 안전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단단히 붙들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확실하게 붙들고 계시느냐에 달려 있다. 위험한 물속에 빠진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아이는 두려움 때문에 손에 힘이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의 안전은 아이가 얼마나 힘껏 아버지를 붙들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아버지가 얼마나 강하게 아이를 붙잡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믿음은 때로 강하기도 하고 때로 약하기도 하다. 감정도 변한다. 확신도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때로 성도는 자신을 바라보다가 낙심한다. “내 믿음이 충분한가?” “나는 정말 구원받은 것인가?” “주님께서 나를 정말 받아 주셨는가?” 그러나 그때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예수님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중요한 질문은 내가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질 만큼 훌륭한 사람이냐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신뢰할 만한 분이시냐는 것이다. 진리를 말하자면 그분은 신뢰할 만한 분이시다.

 

  참된 만족을 주는 빵인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자를 끝까지 지키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 “이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자신의 뜻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는 것임이라. 이것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니, 즉 그분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 또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니,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 그리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고 하시더라.”(38-40)

  예수님께서는 이제 구원의 약속을 현재에서 영원까지 이어 가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아버지의 뜻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아들께서 오셨다. 그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다. 그렇다면 그 뜻은 무엇인가? “그분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 예수님께서는 단지 죄인을 구원해 놓고 그 이후에는 스스로 살아남으라고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이 구원한 사람을 끝까지 지키신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나도 잃지 않고.” 그리고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 구원은 죄 사함에서 끝나지 않는다. 회심에서 끝나지 않는다. 성화에서 끝나지 않는다. 죽음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약속하신다.

  바울은 빌립보서 3:20–21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우리가 그곳으로부터 오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 우리의 천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같이 변모시키시리라.” 성도의 미래는 무덤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마지막 날에 자신의 백성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다.

  영생은 죽은 뒤에만 받는 생명이 아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영생을 소유한다. 그 생명의 완전한 모습은 부활 때 나타나지만, 그 생명은 지금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결국 사라지는 생명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사람 가운데 결국 버림받는 사람은 없다. 잊혀진 성도도 없다. 지나쳐 버린 무덤도 없다. 부활하지 못하는 사람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모든 사람은 마침내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구속받은 모습으로, 부활한 모습으로, 영화롭게 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다.

 

  무리들은 빵을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주셨다. 그들은 하루를 더 배부르게 해 줄 것을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원토록 참된 만족을 주는 생명을 주셨다. 오늘 본문은 네 가지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준다. 첫째, 참된 만족을 주는 빵은 우리의 혼을 참으로 만족시키신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 둘째, 참된 만족을 주는 빵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셋째, 참된 만족을 주는 빵은 자신에게 오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넷째, 참된 만족을 주는 빵은 구원받은 자를 끝까지 지키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 이 말씀은 배고픈 죄인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으로 시작해서 부활한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서는 것으로 끝난다. 그 가운데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장된다.

수요설교 동영상 설교
1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