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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제 447 호 2026년 8월 09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21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4장
오전설교
우리의 대제사장의 기도
조도희 담임목사 | 요한복음 17장 1절-10
오후설교
우리의 대제사장의 기도 제목들
조도희 담임목사 | 요한복음 17:6절-19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21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4장
본문 말씀
4:1 그러면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육신에 관하여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게 되었다면 그에게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바울은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게 되었다면”(2절) 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야고보서 2:21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야고보서 2:21은 계속해서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을 때”라고 말한다.

즉, 야고보가 다루고 있는 사건은 창세기 22장의 사건이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3)

이 말씀은 창세기 15:6을 인용한 것이다.

야고보도 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약 2:23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는 성경이 이루어졌고”).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건의 시간적 배경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로마서 4:11을 보라. “그가 할례의 표적을 받은 것은”

이 일은 언제 일어났는가? 그것은 창세기 17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무할례 때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그 의를 받은 상태였다.

“아브라함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이나 그의 씨에게 율법을 통하여 하신 것이 아니요” (로마서 4:13)

여기서 논의되는 율법은 할례에 관한 율법, 곧 창세기 17장의 사건을 가리킨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믿음의 의를 통하여 하신 것이니라.”

이것은 바로 창세기 15:6과 18-21에서 나타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브라함이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 전가된 의를 받았다고 말한다.

반면 야고보는 훨씬 여러 해가 지난 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을 때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서로 여러 해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 개의 별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당신의 구원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당신의 구원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표(모형)일 뿐이며, 그의 구원이 곧 당신의 구원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실 것을 미리 보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네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느니라.” (갈3:8)

“모든 민족”(all nations)이지, 창세기 12:3의 “모든 족속들”(all families)이 아니다.

성경이 그 복음을 선포한 곳은 창세기 18:18이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위대하고 막강한 민족이 될 것이며,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의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 아니냐?”

구약의 구원은 신약의 구원과 같지 않다.

그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이다.

구약 시대(창세기부터 말라키까지, 더 나아가 마태복음 27장까지. 히브리서 9:16-17 참조)에는 새로운 출생(new birth)이 없고, 영적인 할례(spiritual circumcision)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몸(Body of Christ)이 없고, 한 죄인 개인에 대한 영적인 구속(spiritual redemption)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야고보가 야고보서 2:21을 기록했을 때,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을 때, 그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신약 교리를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널리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약 1:1)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으며, 그 대상은 환란 시대의 이스라엘(계시록 12:17)이다.

야고보서 2:21을 보라.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야고보는 자신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인 민족, 즉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 말하는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의 아브라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는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일을 말씀하셨을 때,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진 개인적인 신뢰였다.

그래서 하박국 2:4은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았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명령과 약속을 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메시지가 주어진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

신약에서는 단순히 “너희 믿음”(롬 1:8)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신실하심)”(롬 3:3)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갈 2:16)에 대해서도 말한다.

오전설교

우리의 대제사장의 기도

조도희 담임목사
요한복음 17장 1절-10
본문 말씀
1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들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시여, 그 시간이 왔나이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아들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육체 위에 권세를 주신 것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영생은 이것이니, 곧 사람들이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옵니다. 4 내가 땅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완성하였나이다. 5 오 아버지시여,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갖고 있던 그 영광으로 이제 나를 아버지와 함께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시여, 그 시간이 왔나이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아들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

  십자가는 하나님의 시간표였다. “아버지시여, 그 시간이 왔나이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그 시간”을 말씀하셨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한복음 2:4) 원수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을 때에도 붙잡을 수 없었다. “이는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요한복음 7:30)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 시간이 왔나이다.” 십자가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유다에게 속으신 것도 아니고, 로마에게 압도당하신 것도 아니며, 종교 지도자들에게 패배하신 것도 아니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계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확한 때에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 “이제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시여, 이 시간으로부터 나를 구해 주소서. 그러나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이 시간까지 왔사옵니다.”(요한복음 12:27) 갈보리는 아버지께서 세우신 구속 계획의 성취였다.

  세상은 십자가를 실패로 보았다.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원수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사탄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말한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심을 따라 내어주신 그를”(행 2:23) 십자가는 인간의 음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된 구속 계획이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위로를 준다. 우리도 종종 하나님의 시간이 너무 늦다고 생각한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질병이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계속될 수도 있다. 사역의 열매가 쉽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계는 결코 늦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간이 왔나이다.”라고 담대히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시간표를 완전히 신뢰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면, 우리는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장 정확한 때에 가장 선한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계획을 앞당기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순종하는 데 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때를 신뢰해야 한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자신의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기도하셨다. 두 번째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도하셨다(1, 5).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영광이었다. 죽음, 부활, 승천을 통하여 영광이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영광이 없어서 영광을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영광을 가지고 계셨다.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갖고 있던 그 영광으로 이제 나를 아버지와 함께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요한복음 17:5)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존재하기 시작하신 분이 아니다. 창조 이전에,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천사와 사람이 존재하기 전부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영광 가운데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심을 통하여 자신의 신성한 영광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세상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수치를 보았다. 그러나 하늘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영광을 보았다. 갈보리에서는 죄가 심판받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났고, 죄인을 위해 구주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으며, 공의와 자비가 함께 만남으로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고, 죽음을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십자가는 겉으로는 그리스도의 가장 큰 낮아지심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분의 영광이 가장 찬란하게 드러난 무대가 되었다.

  희미한 빛 아래 놓인 다이아몬드는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보석 세공사의 강한 조명 아래 놓이면 모든 면이 눈부시게 빛난다. 빛이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이미 존재하던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다. 갈보리에서 우리는 그분의 순종의 영광, 사랑의 영광, 거룩함의 영광, 구원의 능력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자신의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기도하셨다. 세 번째로 자신의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기도하셨다(2-3).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육체 위에 권세를 주신 것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 하심이니이다.”(2) 여기서 “권세”(power)는 정당한 권한과 통치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육체, 곧 모든 사람 위에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이 권세는 보편적이다. 그러나 그분의 구원의 목적은 특별하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권세를 주셨고, 백성을 주셨으며, 사명을 주셨고, 말씀을 주셨으며, 영광을 주셨고, 사랑을 주셨다. 구원은 인간의 자격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에서 시작된다. 아들에게 주어진 사람들은 단지 영생을 받을 가능성만 제공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권세와 그분이 완성하신 사역 위에 굳게 서 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사람들이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옵니다.”(3) 영생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모를 수 있다. 성경 구절을 많이 알고, 신학 용어를 잘 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영적으로는 죽어 있을 수 있다. 기독교는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믿는 종교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분리시키지 않으셨다. 영생은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아들은 떠나서는 누구도 참으로 아버지를 알 수 없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나는 단지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사람인가? 나는 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나는 고난을 단지 수치와 실패로만 보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을 신뢰하는가? 나는 나의 종교적인 행위에 의지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 위에 안식하고 있는가? 우리의 가장 높은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목적과 동일하다. 곧 우리의 삶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안전을 구하지 않으셨다. 원수들의 심판을 구하지도 않으셨다.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셨고, 자신의 백성의 영원한 생명을 구하셨다. 우리의 위로는 우리의 믿음이 강한 데 있지 않다. 우리의 위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연약하다. 우리는 자주 실패한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부활하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히 7:25).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종교적인 지식에 만족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아 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손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위대한 대제사장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담대히 살아가야 한다.

 

오전설교 동영상 설교
오후설교

우리의 대제사장의 기도 제목들

조도희 담임목사
요한복음 17:6절-19절
본문 말씀
6 나는 아버지께서 이 세상으로부터 나에게 주신 그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 보였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나이다. 7 이제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이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나이다. 8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말씀들을 그들에게 전하였으니, 그들은 그 말씀들을 영접하여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분명히 알았으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나이다.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 나는 세상을 위하여는 기도하지 아니하고 다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 이는 그들이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니이다. 10 나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오며 또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내가 그들 안에서 영화롭게 되었나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루신 사역에서 시선을 돌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에게로 향하신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참된 믿음 안에 굳게 서도록 기도하셨다(6-10).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본성과 성품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아버지를 나타내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런데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라고 말하느냐?”(요한복음 14:9)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기적을 보았으며, 그분의 자비를 경험했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가까이에서 목격하였다. 아들을 통하여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참된 계시를 받았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말씀들을 그들에게 전하였으니, 그들은 그 말씀들을 영접하여”(요한복음 17:8)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주 혼란스러워했고, 두려워했으며, 믿음이 더디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음을 믿었다. 믿음은 아직 연약하고 미숙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참된 믿음일 수 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 나는 세상을 위하여는 기도하지 아니하고 다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 이는 그들이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니이다.”(9) 예수님께서는 중보자요 대제사장으로서 특별히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백성을 대표하신다.

  이 사실은 모든 믿는 자에게 큰 위로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마치신 후에도 중보 사역을 멈추지 않으셨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심이라.”(히브리서 7:25) 우리의 안전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완전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가 얼마나 완전한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마음이 산만해질 때도 있고, 믿음이 약해질 때도 있으며, 드릴 말조차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함없이 대표하고 계신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기도하셨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나 이들은 세상에 있나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나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셔서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었을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내가 지키었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로써 성경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옵니다.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가나이다. 내가 세상에서 이런 것들을 말함은 나의 기쁨을 그들 안에서 충만케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더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나이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옵니다. 내가 기도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는 것이 아니옵고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시라는 것이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사옵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1-1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곧 어떤 일을 겪게 될지를 알고 계셨다. 눈에 보이는 목자가 그들 곁을 떠나실 것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미워할 것이고, 사탄은 그들을 공격할 것이며, 그들 자신의 마음도 무너질 것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고, 다른 제자들도 모두 도망갈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보호는 결국 그들의 끝까지 견디는 삶을 이루어 낼 것이다. 그들은 넘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최종적으로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었을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12)

  “내가 세상에서 이런 것들을 말함은 나의 기쁨을 그들 안에서 충만케 하려 함이니이다.”(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기도를 듣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곧 가장 어두운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음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어려움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려움 한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계신다는 확고한 확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기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기쁨을 주신다. 그분의 기쁨은 아버지와의 교제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분의 기쁨은 아버지께 대한 순종, 아버지의 계획에 대한 확신 위에 세워져 있었다. 바로 그와 같은 기쁨이 환경이 고통스러울 때에도 믿는 자 안에 존재할 수 있다.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더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나이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옵니다.”(14) 제자들은 육체적으로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었지만, 더 이상 세상의 영적 체계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장 세상을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어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삶이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 사랑과 야망과 도덕 기준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은 증인들이다. 배는 물 위에 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세상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복음 17:17) 믿는 성도는 삶 속에서 점점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간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성화의 일을 이루시는 도구는 바로 진리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진리라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드러내고,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며, 양심으로 인도하고, 삶을 변화시킨다.

  목수는 벽이 똑바른지를 확인하기 위해 수직 추를 사용하는데 추를 벽에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벽을 추에 맞춘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는 기준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맞도록 성경을 비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의 삶이 성경에 맞추어져야 한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도록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냈사옵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나는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를 통해 거룩하게 되기 위함이니이다.”(18-19).

  제자들은 단지 세상으로부터 구원만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교회의 사명의 본이 된다. 그분은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 오셨고,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셨으며, 아버지의 일을 이루셨고,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셨다.

  교회도 동일하게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세상을 흉내 내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도 아니다.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도록 기도하지 않으셨다. 세상으로 보내셨다. 보호의 목적은 편안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은 단지 과거 어느 날 밤에 예수님께서 드리신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현재도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중보 사역을 보여 주는 창과 같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은, 오늘도 하늘에서 계속되고 있는 그분의 중보 사역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우리가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끝까지 보호받으며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아버지 앞에서 중보하고 계신다(히 7:25, 롬 8:34).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의 연약한 기도를 도우신다(롬 8:26-27).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의 신음과 기도를 하나님의 뜻에 합하도록 중보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중보는 하늘에서의 대제사장 사역이고, 성령님의 중보는 우리 안에서의 위로자 사역이다. 이 두 중보 사역 덕분에 성도는 연약할지라도 버림받지 않으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보존된다.

  자신의 기도가 연약하게 느껴질 때에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신뢰하라. 영적으로 연약하다고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능력을 의지하라. 문화와 세상의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지 말라. 자신의 생각과 야망과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라. 세상과 구별되는 삶이 사명을 포기하는 삶을 의미하지 않음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나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는가?”만 묻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무엇을 위해 보내셨는가?”도 함께 물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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