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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 주보
제 443 호 2026년 7월 12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17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3:19-20
오전설교
불의가 진리를 심판하다
조도희 담임목사 | 누가복음 23:1-7
오후설교
양자 됨의 특권
조도희 담임목사 | 갈라디아서 4:1-7
수요설교
평범한 사람을 들어 크게 쓰시는 하나님
조도희 담임목사 | 재판관기 3:31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17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3:19-20
본문 말씀
이제 율법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 줄 우리가 아노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가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 로마서 3:19~20

19-20절은 구약 율법의 목적을 제시한다. 
동시에 20절은 신약의 위대한 교리인 의롭게 됨(justification)을 소개한다. 
구원의 관점에서 의롭게 됨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옳다, 또는 의롭다고 선언되는 법적 선언이다. 
실제로 “의롭게 됨”라는 단어는 신약의 단어이며 로마서에서만 발견된다. 
“이제 율법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 줄 우리가 아노니”(19) 
그들은 유대인들이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고(20절),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진 확신이었다(롬 2:17).
“이는 모든 입을 막고”(19) 
율법은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자랑하지 못하게 입을 막았다(롬 2:19-23). 
그러나 율법에 의해 정죄받는 것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다. 
율법이 제시하는 완전한 기준에 자기 의를 비교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정죄받는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마찬가지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가 있게 하려 함이니라.”(19)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받은 기록된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했고, 
이방인들은 자기 양심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둘 다 하나님 앞에 유죄이다. 인류는 자기 양심과 성경에 의해 정죄받는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제 이 말씀을 다음 구절들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율법을 행하는 자들만이 의롭게 될 것임이라.”(롬 2:13),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 2:21), 
“이와 같이 창녀 라합도 ...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 2:25), 
“악인은 정죄하시어 그의 행실을 그의 머리로 돌리시며, 의인은 의롭다 하시어 그의 의대로 그에게 베푸소서.”(왕상8:32, 대하6:23) 
“이는 내가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않을 것임이라.”(출 23:7).
구약에서는 주님께서 “의로운 자”와 “악인”이라는 용어를 신약에서 사용하시는 방식과 다르게 사용하신다는 것이 분명하다.
구약에서 “악인”은 어떤 면에서든 가끔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습관적이고 중대한 율법 위반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의로운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옳은 일을 행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수천 대까지 자비를 베푸느니라.”(출 20:6). 
그것은 신약의 그리스도인이 선한 행위에 대해 믿는 바와는 정확히 반대이다(엡 2:8-9).
성경이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라고 말할 때, 그것은 구약에서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만으로는 구원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어야 했고, 또한 그것을 행해야 했다. 
곧 믿음과 행위가 함께 있어야 했다.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0)이며 “행함이 없으면 믿음만으로는 죽은 것”(약 2:17)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아무 믿음도 없는 행위 역시 죽은 것이다.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20)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을 성취하실 때까지 죄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면 어찌하여 율법을 섬기느냐? 그것은 범법함 때문에 더해진 것이니, 약속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라.”(갈 3:19). 
그리고 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우리의 지도교사”가 되었다(갈 3:24).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서들을 통해 증거된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는”은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의 위대한 주제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그들(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시고자 율법의 끝이 되셨느니라.” (로마서 10:3-4)
“그러나 너희는 그분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주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 1:30)
그러므로 바울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할 때, 그는 그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의가 “율법 없이”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지키셨기 때문이다. 
“율법과 선지서들을 통해 증거된 것이니라.”
바울은 또한 이 율법 없이 나타난 “하나님의 의”“율법과 선지서들을 통해 증거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4장에서 사용하는 두 가지 예 가운데, 아브라함은 율법에서 가져온 예이며(롬 4:3), 
다윗은 선지자들에서 가져온 예이다(롬 4:6-7). 
그러나 구약성경 전체에는 예언과 사례들이 풍성하게 기록되어 있다. 

22  곧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나니 차별이 없느니라.
21-22절에서 “하나님의 의”는  ⑴“율법 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⑵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것이고,  ⑶구약성경에서 “증거된” 것이며,  ⑷“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⑸“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다.
“차별이 없느니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유죄이며, 둘 다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 한다면, 그는 이방인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23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값없이(freely) 의롭게 되었음이라.”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네가 마음대로(freely) 먹을 수 있으나”(창 2:16).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freely) 마시게 할지어다.”(요한계시록 22:17)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오전설교

불의가 진리를 심판하다

조도희 담임목사
누가복음 23:1-7
본문 말씀
무리가 모두 일어나서 주를 빌라도에게로 끌고 가서 고소하기 시작하여 말하기를 “이 자가 우리 민족을 현혹하고, 카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더이다.”라고 하니 빌라도가 그에게 물어 말하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하니,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렇도다.”라고 하시니라. 그때 빌라도가 선임 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하더라. 그러나 그들은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여 말하기를 “그는 갈릴리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 지방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므로 백성을 선동하였나이다.”라고 하더라. 빌라도가 갈릴리라는 말을 듣자,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인가 묻더라. 그런 후에 그가 헤롯의 통치 구역에 속한 줄을 알자마자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헤롯에게로 그를 보내니라. 누가복음 23:1~7

  본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시는 장면인데 단순한 법정 장면이 아니다. 참된 권위를 가진 만왕의 왕께서 반역자로 고발당하고 계신다. 의로우신 재판관께서 불의한 사람들에게 재판을 받고 계신다. 죄 없으신 어린양께서 흉악한 범죄자처럼 취급받고 계신다. 세상은 예수님을 재판석 앞에 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드러난 것은 예수님의 죄가 아니라 사람들의 죄였다. 종교 지도자들의 거짓, 빌라도의 비겁함, 사람들의 불의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모든 불의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흠 없는 대속물로 세상 앞에 제시하셨다.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한 복음을 보여 준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들에게 부당하게 재판받으신 것은, 죄 없으신 왕께서 죄 있는 자들을 대신하여 정죄받으심으로 그들을 의롭게 하시기 위함이다.

  불의는 진리를 거짓으로 고소한다(1-2).
  “무리가 모두 일어나서 주를 빌라도에게로 끌고 가서”(1) 여기서 “무리”는 주로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종교 지도자들이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공회원들이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그들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로마 총독의 승인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간다. 그리고 2절에서 세 가지로 고소한다.
  첫째, “이 자가 우리 민족을 현혹하고”라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백성을 혼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다. 예수님은 백성을 현혹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순수한 진리를 선포하셨다. 죄인들에게 회개를 외치셨고,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셨고, 위선을 책망하셨으며,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문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거짓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위선과 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죄인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진리가 자기 죄를 드러낼 때, 진리를 미워한다.
  둘째, “카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라고 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신 것과 정반대이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해가 아니다. 의도적인 왜곡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몰라서 잘못 말한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거짓으로 뒤집어 말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부패하면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까지 왜곡한다. 이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정보가 아니었다. 순종이 부족했다. 그들은 들었으나 믿지 않았다. 그들은 알았으나 복종하지 않았다.
  셋째,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더이다”라고 했다. 여기에 놀라운 역설이 있다. 그들은 악한 의도로 말했지만, 이 말만큼은 사실이었다. 예수님은 참으로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참으로 왕이시다. 그분은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씨이시다. 신명기 18장 15절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시다. 사무엘하 7장의 다윗의 아들이시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이시다. 시편 2편의 왕이시다. 다니엘 7장의 인자이시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위협하셨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9장 14절의 말처럼 그들의 마음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통치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이것이 모든 죄인의 본질이다. 사람은 예수님을 좋은 선생으로는 받아들이려 한다. 기적을 행하시는 분으로는 흥미를 가진다. 위로를 주시는 분으로는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왕으로 다스리시는 예수님 앞에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님께 권위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다. 그분께는 모든 권위가 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었는가?

  불의 속에서도 진리는 나타난다(3-4).
  3절에서 빌라도가 묻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그렇도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왕 되심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불쌍한 피해자로 죽으시는 것이 아니다. 실패한 개혁가로 죽으시는 것도 아니다. 힘없는 죄수로 시대의 폭력에 희생되시는 것도 아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다. 그러나 만왕의 왕으로 죽으실 것이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는 이런 명패가 붙는다.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이라.” 군인들은 그 왕 되심을 조롱했다. 종교 지도자들도 그 왕 되심을 비웃었다. 한 강도도 그분을 조롱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은 재판받는 왕이시다. 고발당하는 왕이시다. 결박당한 왕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신 왕이시다. 죽음 가운데 계신 왕이시다. 그리고 부활하신 왕이시다.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태어났고, 이런 연유로 내가 세상에 왔으니 진리를 증거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진리이시다. 그 진리이신 분께서 불의한 법정 앞에 서신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패배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정죄받으심으로 승리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고난을 통해 승리하신다. 그분은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그 후에 왕관을 쓰신다. 골로새서 2장 15절은 그분께서 십자가로 정사들과 권세들을 이기셨다고 말씀한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패배를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를 이루셨다. 이어 4절에서 빌라도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였노라.” 이 선언은 매우 중요하다. 빌라도는 경건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다. 진리의 수호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로마 총독조차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누가는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헤롯도 예수님을 정죄하지 못했다. 십자가의 강도도 “이분은 아무 잘못을 행한 것이 없도다”라고 증언했다. 백부장도 “참으로 이 사람은 의인이었도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은 “그는 죄를 짓지도 아니하셨고 그의 입에는 간사함도 없으셨으며”라고 말씀한다. 죄 있는 대속자는 죄인을 구원할 수 없다. 흠 있는 어린양은 희생 제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다. 죄 없으신 마지막 아담이시다. 여기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다. 빌라도는 재판석에 앉아 있다. 그러나 죄인은 빌라도이다. 예수님은 피고석에 서 계신다. 그러나 죄 없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빌라도는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빌라도는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이시다. 이 법정은 완전히 뒤바뀐 법정이다. 온 세상의 재판장이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에게 재판받고 계신다. 
  빌라도는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신학적 선언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의 말은 복음을 증언하는 선언이 되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였노라.” 성도의 구원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흠 없으심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가 완전하게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순종이 완전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시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드는 손일 뿐이다. 구원의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께 있다.

  불의는 진리를 십자가로 이끈다(5-7).
  5절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더욱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갈릴리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 지방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므로 백성을 선동하였나이다.” 빌라도는 이미 무죄를 선언했다. 정상적인 법정이라면 그 한마디로 재판은 끝났어야 한다. 그러나 완고한 불신앙은 진리가 선포되었다고 해서 무릎 꿇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소리를 낸다. 그들의 증거는 약했다.
그래서 목소리는 더 커졌다. 그들은 예수님의 죄를 증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강하게 고발했다. 예수님의 무죄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거칠게 몰아붙였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죄인의 집단적 광기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백성을 선동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난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 것을 계속 보여 주었다. 누가복음 9장 51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확고하게 정하셨다고 말씀한다.  “주께서는 하늘로 들리움을 받으실 때가 오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확고하게 정하시더라.” 예수님은 우연히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 아니다. 끌려오신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십자가를 향해 걸어오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고소하고 있었지만, 자신들도 모르게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성취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6절과 7절에서 빌라도는 “갈릴리”라는 말을 듣고 기회를 발견한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면 헤롯의 관할에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낸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았다. 그러나 책임은 회피했다. 그는 예수님을 석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정치적 결과를 두려워했다. 빌라도의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었다.
도덕적 비겁함이었다. 그는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종교 지도자들이 시기심으로 고발한다는 것도 알았다. 정의가 석방을 요구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옳은 일을 하지 않았다.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은 중립이 아니다. 죄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낸 것은 영적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대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언제나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저주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큰 소리로 부인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단지 미룬다. “나중에 믿겠다.” “내 혼의 문제는 다음에 다루겠다.” “삶이 안정되면 하나님을 찾겠다.” “나이가 들면 순종하겠다.” “좀 더 쉬워지면 그때 헌신하겠다.”
  그러나 예수님을 미룬다고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냈지만, 예수님을 다시 만나야 했다.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를 미룰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 사도행전 4장 27–28절은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적하여 모였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말씀한다. “과연 주께서 기름부으신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를 대적하여 헤롯과 폰티오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모였으니 이는 주의 손과 주의 계획대로 이루기로 예정된 온갖 일을 행하려 함이니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 위에서도 주권적으로 역사하셨다. 그들은 살인을 의도했다. 하나님은 구속을 이루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다. 예수님은 행정 절차의 희생자가 아니시다. 하늘이 혼란스러워서 이리저리 끌려다니신 것도 아니다. 그분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미리 정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누가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공회에서 빌라도에게, 빌라도에게서 헤롯에게, 헤롯에게서 다시 빌라도에게, 그리고 군병들에게, 마침내 십자가로 넘겨지신다. 그러나 하늘의 시선은 혼란스럽지 않다. 하나님의 목적은 구주를 갈보리로 인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을 본다. 누가는 단지 불의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대속을 보여 준다. 왜 하나님께서는 불의가 진리를 재판하도록 허용하셨는가? 죄 없으신 분이 죄인처럼 취급받으심으로, 죄인들이 의로운 자처럼 받아들여지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 서심으로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고소당하심으로 자기 백성이 하늘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셨지만 정죄받으심으로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보내심을 받으심으로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셨다.
  열심으로 포장된 종교적 증오를 경계하라. 진리를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일을 경계하라. 예수님을 뒤로 미루지 말라.

  본문은 우리를 법정으로 데려갈 뿐 아니라 갈보리로 인도한다. 고소자들은 거짓말한다. 빌라도는 머뭇거린다. 헤롯은 기다린다. 무리는 곧 광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굳게 서 계신다. 그분은 죄 없으신 분으로 서 계신다. 필요할 때에는 침묵하시고, 질문을 받으실 때에는 진리를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불의 아래에서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서 계신다. 그분은 왕으로 서 계신다. 그리고 곧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정죄를 받으신다.
왜 그러셨는가? 죄인들을 위하여. 반역자들을 위하여. 거짓말하는 자들을 위하여. 비겁한 자들을 위하여. 위선자들을 위하여. 베드로와 같은 부인하는 자들을 위하여. 빌라도와 같은 타협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오전설교 동영상 설교
오후설교

양자 됨의 특권

조도희 담임목사
갈라디아서 4:1-7
본문 말씀
이제 내가 말하노니 그 상속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어린아이일 동안은 종과 다를 바 없으며 아버지가 미리 정해 놓은 때까지 보호자와 청지기 아래 있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서 종 노릇 하였으나 그 때가 차니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셔서 우리로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갈라디아서 4:1~7

칭의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의롭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스스로 의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거룩하고, 순결하며,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자로 받아 주신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과 속죄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바로 그 연합으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결해 주며,
그 믿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통로가 된다.
그런데 바로 같은 문맥에서 사도 바울은 칭의를 말한 후 곧이어 양자 됨을 말한다.

  “양자 됨”이라는 말은 바울이 특별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신약성경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단어이다. 한 소년이 있다. 그는 버림받은 아이이다. 낯선 사람이다. 고아이다. 세상에서 원하지 않는 아이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아이를 자기 가족 안으로 받아들여 자기 아들로 삼는다. 바로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양자 됨이다.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사람들이 누리는 놀라운 특권들을 소개한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받아들여진 사람들에게는 어떤 특권이 있는가?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그들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요1:12-13) 이제 그 특권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양자 됨의 첫 번째 특권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갈4:7) 당신은 더 이상 종이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일하는 품꾼도 아니다. 당신은 더 이상 삯을 받기 위해 일하는 종이 아니다. 당신은 아들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사람이다. 믿음의 가족에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당신은 왕의 자녀이다.

  양자 됨의 두 번째 특권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 앞부분에서 바울은 어린아이가 후견인들과 청지기들 아래 있는 모습을 설명한다. “이제 내가 말하노니 그 상속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어린아이일 동안은 종과 다를 바 없으며 아버지가 미리 정해 놓은 때까지 보호자와 청지기 아래 있느니라.”(갈4:1-2)
  “파이다고고스”(paidagogos)는 어린아이를 감독하고 훈련시키는 보호자를 말한다. 당시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는 어린아이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항상 보호자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로마 사회에서는 스물다섯 살이 되면 성년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보호자 아래 있지 않았다. 정식 시민으로 인정받았으며, 그 표시로 ‘토가’라는 시민의 옷을 입었다.
  바울은 바로 이 모습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설명한다. “그리하여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우리의 지도교사가 되었으니 이는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려 함이라.”(갈3:24) 그러나 믿음이 온 후에는 우리는 더 이상 그 지도교사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7)고 말한다. 침례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습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 물이 우리를 덮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덮으신다. 옷이 우리의 몸을 감싸듯,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감싸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두 번째 특권이다. 우리는 더 이상 그림자 아래 있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실체를 소유한 사람이다. 약속이 이루어진 사람이다.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성숙한 상속자이다.

  양자 됨의 세 번째 특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속에 보내셨다는 것이다.
  “너희가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갈4:6) 이 또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사람들이 누리는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성경은 성령님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성령이라고 하며, 어떤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분의 아들의 영이라고 부른다.
  왜 성령님을 예수님의 영이라고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다. 오순절에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셨고, 오늘도 성령님께서 세상을 책망하신다.
그래서 성령님을 예수님의 영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을 우리의 마음속에 보내셨다.
  성령님은 어디에 거하시는가? 우리의 머리 속에만 계시는가? 우리의 지성 속에만 계시는가?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도 다스리신다. 그러나 성경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거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거처를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10장은 이렇게 말씀한다.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롬10:9-10)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사람들이 누리는 또 하나의 위대한 특권이다.

  양자 됨의 마지막 네 번째 특권은 기도의 특권이다. “너희가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6)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마지막 위대한 특권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다. 당신은 이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담대히 나오라.” 왕의 홀은 이미 당신을 향하여 내밀어져 있다. 당신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당신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실 뿐 아니라, 당신이 드리는 기도도 기쁘게 받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간구를 들으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큰 특권입니까?” 그렇다. 지금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큰 슬픔이 찾아올 때, 감당할 수 없는 환난이 밀려올 때, 늙음이 찾아오고, 질병이 찾아오고, 죽음이 문을 두드릴 때, 그때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가장 큰 특권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을 우리의 마음속에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하고 부르짖게 하신다. 성경에서 "아바, 아버지" 라는 표현은 세 번만 나온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빠!”하고 부르는 것과 같다. 성경에서 “아바, 아버지” 라는 표현이 나오는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의 생애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그 밤이다. 로마 군병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제사장들도 알지 못했다.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으로 그 밤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 보라. 군중을 지나, 여덟 제자가 잠들어 있는 곳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세 제자가 잠들어 있는 곳을 지나면, 마침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게 된다. 그분은 땅에 엎드려 계셨다. 그분의 얼굴은 땅에 닿아 있었고, 그분의 눈물은 그분께서 친히 창조하신 땅을 적시고 있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라.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더욱 찢어 놓는 것은 그 장면이 아니라, 그분의 음성이다. 그분은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막14:36) 얼마나 친밀한 기도인가. 얼마나 간절한 기도인가.
  두 번째로 이 표현이 나오는 곳은 로마서 8장이다. “너희는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 되는 영을 받았으므로 그에 따라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그런데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에서는 조금 다르게 말씀한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너희가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한다. 반면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고 말씀한다. 왜 이렇게 표현이 다른가?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라.”(롬8:26,27) 바로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을 우리의 마음속에 보내셨고, 그 영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고 싶지만 기도할 말을 찾지 못할 때가 있다. 마음은 찢어지는데, 입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가슴속 깊은 탄식은 있는데, 그 탄식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바로 그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대신 부르짖으신다.
  한나는 실로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녀가 기도하면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입술은 움직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제사장 엘리는 그녀를 술 취한 여인으로 오해하였다. 그녀의 고통이 너무 깊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가 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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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을 들어 크게 쓰시는 하나님

조도희 담임목사
재판관기 3:31
본문 말씀
○ 에훗 후에 아낫의 아들 샴갈이 있었는데 그가 소 몰이 막대기로 필리스티아인 육백 명을 죽였으며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재판관기 3:31

  성경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나와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을 받은 후, 대부분 다시는 언급되지 않은 채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에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이름 없는 사람들과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선택하셨다. 본문에서 우리는 샴갈, 곧 싸워서 승리한 농부를 만나게 된다. 샴갈은 하나님의 말씀에 잠시 등장하는 이름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뒤, 다시 자신이 나왔던 그림자 속으로 돌아간다. 샴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샴갈에 대해 기록된 내용은 그의 인격과 용기를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맡겨진 자리에서 부지런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샴갈에 대해 분명히 아는 한 가지는 그가 농부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소모는 “소 몰이 막대기”를 들고 싸웠다. 소 몰이 막대기는 원래 무기가 아니라 농기구였다. 그것은 길이 약 2.5~3m, 지름 약 5cm 정도 되는 긴 장대였다. 한쪽 끝에는 길게 뾰족한 쇠 촉이 달려 있었다. 이 끝은 소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소는 말이나 고삐에는 잘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소 몰이 막대기의 날카로운 끝에는 반응하였다. 반대쪽 끝은 삽처럼 생긴 금속 날이 달려 있었다. 이 부분은 쟁기의 끝에 달라붙은 젖은 흙이나 뿌리와 같은 장애물을 긁어내는 데 사용되었다.
  샴갈에 대해 우리가 아는 또 다른 사실은 그가 살던 시대이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재판관기 4장과 5장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은 카나안 왕 야빈의 압제를 받고 있었다. 야빈은 철 병거 900대를 가진 강력한 원수였다(판4:3).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였다. 판 5:6은 이렇게 말한다.  “아낫의 아들 샴갈의 날에 야엘의 날에 대로들은 비어 있었고, 여행자들은 샛길로 다녔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수들의 압제 때문에 큰길을 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침략하여 공격하는 자들 때문에 자기 집에서 사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 카나안의 압제를 받는 동안, 이스라엘은 동시에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공격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샴갈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바쁘게 일하고 있는 사람을 사용하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샴갈을 부르셨을 때, 그분은 이미 바쁘게 일하고 있던 사람을 부르셨다. 샴갈은 자기 가족을 먹이고 돌보기 위해 성실히 일하던 사람이었다. 원수가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샴갈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게으른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바라보시고 자신의 그릇을 선택하실 때에는 언제나 이미 그분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택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을 섬기도록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작은 일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는 더 크고 더 중요한 섬김의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작은 일도 맡길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결코 더 큰 일에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누가복음 16:10은 이렇게 말씀한다.  “지극히 작은 일에 신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신실하며, 또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하니라.”
  지금은 주의 종들에게 어려운 시대이다. 정부와 사회는 점점 더 주님과 그분의 사역을 미워하고 있다.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은 복음의 메시지와 구원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에 더욱 완고해지고 있다. 증거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도 주님의 섬김의 부르심에 대해 차갑고 무관심해졌다. 오늘날에는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가정을 세우기도 어려운 시대이다. 사역하기도 어려운 시대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권면한다. 가정에서 주님을 섬기라. 주일학교에서 섬기라.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든 주님을 섬기라. 그분은 여러분의 신실한 섬김을 주목하시며, 이곳에서 여러분을 복 주시고 사용하실 것이다. 그리고 본향에 이르렀을 때 반드시 여러분에게 상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담대히 싸우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야빈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군사적으로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것은 지중해 연안에 살던 호전적인 민족인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사람들을 노예로 사로잡고, 곡식을 약탈하며, 마을들을 파괴하였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쳐들어오면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백성은 공포에 질려 도망하였다. 그들은 죽거나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샴갈은 도망하기를 거부하였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는 자기 자리를 지키며 싸웠다. 그에게는 전쟁 무기가 없었지만, 소 몰이 막대기 하나는 가지고 있었다. 소 몰이 막대기는 농기구였지만, 적합한 사람의 손에 들리자 치명적인 무기가 되었다. 한쪽 끝은 창처럼 사용할 수 있었고, 다른 한쪽 끝은 도끼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양쪽 끝 사이의 긴 자루는 적의 칼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샴갈은 자기 자리를 지켰고, 자기가 가진 것을 사용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셔서 그의 백성에게 승리를, 그의 가족에게 안전을 주셨다. 샴갈은 살아 있는 동안 필리스티아의 약탈자 600명을 죽였다. 그 소 몰이 막대기로 600명을 죽였다는 것은 놀라운 육체적 위업이었다. 그는 최고의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샴갈의 능력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영적인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샴갈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 능력을 부여받았다. 하나님의 영께서 샴갈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가 그렇게 굳게 서서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도망칠 때 샴갈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싸운 것은, 어떤 것들은 싸울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집을 위해 싸웠다. 자기 가족을 위해 싸웠다. 자기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자기의 땅을 위해 싸웠다. 자기의 하나님을 예배할 권리를 위해 싸웠다. 샴갈은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사용하신 전사였다.
  우리는 일꾼이어야 할 뿐 아니라 전사이기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군대에 입대시키셨고, 영적 전쟁의 사명에 참여하게 하셨다. 우리는 오늘도 전쟁 중에 있다. 우리는 사탄과 전쟁하고 있다. 옛날 카나안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귀는 우리를 압제하려 한다. 우리는 세상과도 전쟁하고 있다. 옛날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은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여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 한다. 우리는 전쟁 중에 있다. 그리고 어떤 문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싸울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문제들은 우리가 굳게 서서 싸워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원수에게 빼앗겨 파괴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싸울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가정이다. 여러분의 결혼, 배우자, 자녀는 싸우고 죽을 만큼 가치 있는 대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지나치지 않으며, 어떤 대가도 너무 크지 않다. 우리는 그들의 구원과 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 필요하다면 세상과 사탄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죽기까지 싸워야 한다.
 그 다음은 교회다. 세상은 교회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 우리의 설교, 우리의 예배, 우리의 교리, 교제, 우리의 영적 분리는 모두 사탄과 세상의 공격을 받고 있다. 세상은 날마다 교회를 공격한다. 우리는 옳다고 믿는 것들을 위해 기꺼이 싸우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잃어버린 혼들은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가치가 있다. 우리 주변의 잃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께 관심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들을 수 있도록 누군가는 무너진 곳을 막아 서서 옛길을 지켜야 한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비천함과 죄악 때문에 도망치지 않고 예수님을 전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위해 싸워 줄 사람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싸워 주었다. 여러분이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을 때 여러분을 위해 싸운 사람이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나는 한 분의 이름을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가장 위대한 싸움을 싸우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지옥의 고통을 통과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굳게 서서 싸우는 것이다. 오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싸울 가치가 있는 것들을 위해 기꺼이 나설 하나님의 성도들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샴갈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의 용기는 자기 주변의 백성을 자유롭게 하였고, 그들이 평화와 자유 가운데 살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자신이 싸웠던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도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때로는 이 땅에서 승리가 매우 적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그 싸움은 여전히 싸울 가치가 있다.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기꺼이 싸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순수한 복음과 거룩한 교회를 물려줄 수 있다면, 우리는 성공한 것이다.
  마지막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잘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면, 우리는 성공한 것이다. 특히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이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그 싸움이 가치 있는 것이었음을 안다. 신실한 성도들이 평생 동안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다. 누군가가 성령의 책망 아래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소 몰이 막대기, 곧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갈아서 또다시 전쟁터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오늘 여러분을 격려하고 싶다. 전쟁터에 남아 있으라. 우리 주변에서는 많은 사람이 소 몰이 막대기를 내려놓고 원수를 두려워하여 도망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원수 편에 가담하기 위해 달아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계속 싸우기를 권면한다. 설교자들이여, 계속 설교하기를 권면한다. 교사들이여, 계속 가르치기를 권면한다.
하나님의 성도들이여, 계속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기를 권면한다. 증인들이여, 계속 증거하기를 권면한다. 경건을 압도하려는 악의 물결에 맞서 싸울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여, 정말 중요한 것들을 위해 계속 싸우기를 권면한다. 우리는 이제 본향에 너무 가까이 와 있다. 지금 포기해서는 안 된다. 샴갈처럼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라.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쓰러지지 아니하면 때가 되어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예수님을 바라보고 다시 용기를 얻어 계속 나아가라.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가장 큰 역경에 맞서셨다. 그분은 사람이 치른 싸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싸움을 싸우셨다. 그분은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키셨고, 자신의 소 몰이 막대기, 곧 낡고 거친 십자가를 사용하여 마귀의 일들을 무너뜨리셨다. 그분의 본을 따라 계속 싸우라. 그리하여 여러분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어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며 또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라.”(딤후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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