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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제 442 호 2026년 7월 05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 성경공부
로마서 강해16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3:19-20
오전설교
복음전파의 어리석음
조도희 담임목사 | 고린도전서 1:17-24
오후설교
비밀스런 제자에서 담대한 증인으로
조도희 담임목사 | 마가복음 15:42-47
수요설교
나를 돕는 분이 누구신가?
강태영 형제 | 시편 121:1-8
오전 성경공부

로마서 강해16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3:19-20
본문 말씀
3:19 이제 율법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 줄 우리가 아노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가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

19-20절은 구약 율법의 목적을 제시한다.

동시에 20절은 신약의 위대한 교리인 의롭게 됨(justification)을 소개한다.

구원의 관점에서 의롭게 됨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옳다, 또는 의롭다고 선언되는 법적 선언이다.

실제로 의롭게 됨이라는 단어는 신약의 단어이며 로마서에서만 발견된다.

이제 율법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 줄 우리가 아노니(19)

그들은 유대인들이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고(20),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진 확신이었다(2:17).

이는 모든 입을 막고(19)

율법은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자랑하지 못하게 입을 막았다(2:19-23).

그러나 율법에 의해 정죄받는 것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다.

율법이 제시하는 완전한 기준에 자기 의를 비교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정죄받는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마찬가지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가 있게 하려 함이니라.(19)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받은 기록된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했고,

이방인들은 자기 양심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둘 다 하나님 앞에 유죄이다. 인류는 자기 양심과 성경에 의해 정죄받는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제 이 말씀을 다음 구절들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율법을 행하는 자들만이 의롭게 될 것임이라.(2:13),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2:21),

이와 같이 창녀 라합도 ...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2:25),

악인은 정죄하시어 그의 행실을 그의 머리로 돌리시며, 의인은 의롭다 하시어 그의 의대로 그에게 베푸소서.”(왕상8:32, 대하6:23)

이는 내가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않을 것임이라.(23:7).

구약에서는 주님께서 의로운 자악인이라는 용어를 신약에서 사용하시는 방식과 다르게 사용하신다는 것이 분명하다.

구약에서 악인은 어떤 면에서든 가끔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습관적이고 중대한 율법 위반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의로운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옳은 일을 행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수천 대까지 자비를 베푸느니라.”(20:6).

그것은 신약의 그리스도인이 선한 행위에 대해 믿는 바와는 정확히 반대이다(2:8-9).

성경이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라고 말할 때, 그것은 구약에서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만으로는 구원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어야 했고, 또한 그것을 행해야 했다.

곧 믿음과 행위가 함께 있어야 했다.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2:20)이며 행함이 없으면 믿음만으로는 죽은 것(2:17)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아무 믿음도 없는 행위 역시 죽은 것이다.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20)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을 성취하실 때까지 죄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면 어찌하여 율법을 섬기느냐? 그것은 범법함 때문에 더해진 것이니, 약속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라.”(3:19).

그리고 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우리의 지도교사가 되었다(3:24).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서들을 통해 증거된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는은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의 위대한 주제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그들(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시고자 율법의 끝이 되셨느니라. (로마서 10:3-4)

그러나 너희는 그분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주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 1:30)

그러므로 바울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할 때, 그는 그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의가 율법 없이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지키셨기 때문이다.

율법과 선지서들을 통해 증거된 것이니라.

바울은 또한 이 율법 없이 나타난 하나님의 의율법과 선지서들을 통해 증거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4장에서 사용하는 두 가지 예 가운데, 아브라함은 율법에서 가져온 예이며(4:3),

다윗은 선지자들에서 가져온 예이다(4:6-7).

그러나 구약성경 전체에는 예언과 사례들이 풍성하게 기록되어 있다.

 

22 곧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나니 차별이 없느니라.

21-22절에서 하나님의 의는 ⑴율법 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⑵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것이고, ⑶구약성경에서 증거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다.

차별이 없느니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유죄이며, 둘 다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 한다면, 그는 이방인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23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값없이(freely) 의롭게 되었음이라.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네가 마음대로(freely) 먹을 수 있으나(2:16).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freely) 마시게 할지어다.(요한계시록 22:17)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오전설교

복음전파의 어리석음

조도희 담임목사
고린도전서 1:17-24
본문 말씀
17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게 하려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보내셨노라. 말의 지혜로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되기를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명철을 없애리라.” 하였느니라.

  고린도 교회는 분열된 교회였다. 그들은 여러 문제로 인해 나뉘어 있었지만, 바울이 가장 먼저 다루는 문제는 서로 다른 설교자들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었다. 한 무리는 말한다. “우리는 아폴로를 좋아한다. 그는 말솜씨가 뛰어나다. 우리가 들어 본 설교자들 가운데 최고다.” 또 다른 무리는 말했다. “우리는 바울을 좋아한다. 그는 깊은 진리를 선포한다. 정말 우리 영을 잘 먹여 준다.” 또 다른 무리는 말했다. “우리는 베드로를 좋아한다. 그는 설교할 때 매우 담대하다. 우리는 그의 설교 스타일이 좋다.” 그리고 또 다른 무리는 말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따른다. 그분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만 듣고 싶다.” 각 무리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설교자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각 무리는 다른 무리들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여겼다. 결국 그들은 사람을 중심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잊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전달자가 아니라 메시지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뉘어 계신 분이 아니시며(13), 그분의 교회 역시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바울도, 아폴로도, 베드로도 우리의 죄를 위해 죽지 않았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바울이나 아폴로나 베드로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침례를 받은 이름도 예수님의 이름이다.

  우리 모두에게 좋아하는 설교자들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어떤 설교자들의 말씀을 특별히 좋아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더 잘 먹여 주고, 더 큰 도전을 주며, 더 많은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은 단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달자에 불과하다. 만일 어떤 설교자를 평가해야 한다면, 그의 설교 스타일로 평가하지 말고 그의 설교 내용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그가 성경을 열어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는가? 그가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그렇다라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결코 사람을 숭배하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진리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진리를 전한다면, 설교를 얼마나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17절에 이르러 바울은 단순히 웅변술을 위한 웅변은 십자가를 효력이 없게 만든다고 말한다. 말의 지혜는 십자가를 헛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지혜를 의지할 때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무효화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능력과 설득력과 방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말솜씨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어떤 결정을 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뛰어난 연설에 감동하여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반응했다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나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일 때뿐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 본문에서 전한 메시지였으며, 또한 믿는 자들인 우리의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를 무너뜨리시고 십자가의 말씀으로 구원하신다(17-19).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영적인 현실을 드러낸다. 또한 바울이 선포한 이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 역시 세상에 전해야 할 메시지이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메시지는 세상의 지혜와는 정반대에 서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충분히 선하다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선행이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받아 주시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이 어리석다고 부르는 바로 그 메시지가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분을 믿는 단순한 믿음만으로 혼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우리의 메시지를 어리석다고 여기는가? 그 이유는 우리의 메시지가 그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믿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23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노니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유대인들은 죄를 위해 죽는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그 복음에 걸려 넘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메시아께서 능력 가운데 오셔서 원수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평화와 권세와 번영의 자리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들에게 죽은 메시아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반면 헬라인들은 이 메시지를 듣고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계몽된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철학과 학문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선행과 지혜와 본래의 선함만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을 듣자 복음에 반발하였다. 그들은 그런 비천하고 터무니없는 메시지를 믿을 만큼 자신을 낮추려 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사고방식은 유대인들보다는 오히려 헬라인들의 사고방식에 더 가깝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자신이 충분히 선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찬양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학문과 지혜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문제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지식과 지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우고 있다.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든 전쟁은 증가한다. 가난은 증가한다. 인종 차별은 증가한다. 증오는 증가한다. 마약 남용은 증가한다. 술 취함은 증가한다. 범죄는 증가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수많은 문제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답을 찾으려 할수록 모든 종류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문제는 수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범위도 커지고, 심각성도 깊어지고, 파괴력도 더욱 커진다. 인간의 문제의 뿌리는 죄성이다.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나며 자신의 본성을 바꿀 수 없다.

  인간의 삶의 문제는 단지 머리를 더 써서 해결책을 찾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재정 상태가 좋아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가 올라간다고 해서 삶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친구 관계가 바뀐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당신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바꿀 수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고, 생각하고, 발버둥 칠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어리석게 여기는 복음 전파로 구원의 길을 여신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학자가 어디 있느냐?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의 어리석음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20-21).

  하나님께서는 복음이라는 영적 치료책을 제시하심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인간의 지혜가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영혼의 구원을 제공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밝힌 후, 바울은 이제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치료책을 제시한다. 바울은 인간의 가장 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복음 전파의 어리석음에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복음전파의 어리석음을 말할 때, 그는 어리석은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설교가 너무 많다. 너무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을 복음 전파자가 아니라 오락 제공자로 생각한다. 그들은 청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기 위해 설교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 주기 위해 경건해 보이는 상투적인 말들과 내용 없는 설교를 늘어놓는다. 죄를 죽이는 설교,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게 하는 설교,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는 성경적인 설교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강단에서는 소위 설교자들이 회중 앞에 서서 어떤 주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지만, 본문을 깊이 파고들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 역시 영원한 영적 진리를 찾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거룩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다음 한 주를 버틸 수 있게 해 줄 감정적인 위안을 원한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의무를 다했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 일부 설교자들은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려고 한다. 바울은 그런 종류의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정직성을 가진 성도들이라면, 교회가 모일 때마다 설교자가 성경 전체를 그 영적 충만함 가운데서 충실하게 선포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인간의 죄, 곧 당신의 죄에 대한 치료책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는 데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데 있다. 그리고 복음의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혼의 구원을 위해 그것만을 신뢰하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노니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또 하나님의 지혜니라.”(22-24).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는 영적 요구 조건에 응답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셨으며,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혼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영원히 안전하게 보호된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 불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우리의 삶은 지금도 변화되고 영원 속에서도 변화된다. 복음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요구하시는 조건이다. 교회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이 만든 종교의식들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여러 교회의 교인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종교적 의식을 행할 수도 있다. 도덕적이고 깨끗한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혼을 구원할 수 없다. 오직 복음에 대한 믿음만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 수 있다. 복음만이, 죄의 현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당신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당신의 죄가 당신의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있는가? 당신은 그 복음을 믿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는가? 언젠가 이 땅에서의 당신의 삶은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며, 그때 당신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서게 되든지, 아니면 잃어버린 죄인으로 서게 되든지 둘 중 하나이다.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인가? 만일 당신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이며 예수님께서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면, 오늘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미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엄청난 감사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분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감사와 경배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오후설교

비밀스런 제자에서 담대한 증인으로

조도희 담임목사
마가복음 15:42-47
본문 말씀
42 이미 저녁이 되었으며 그 날은 안식일 전날인 예비일이었기에 43 아리마대 요셉이 와서,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니,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으로 그 자신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더라. 44 빌라도는 그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놀라 백부장을 불러서 그가 죽은 지 오래 되었는가 물으니라. 45 그가 백부장으로부터 들어 그 일을 알고 난 후 그 시체를 요셉에게 주더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 가지고 와서 주를 내려 세마포로 싼 후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안치하고 나서 무덤 문에 돌을 굴려 놓으니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모친 마리아가 주를 둔 곳을 보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 그분의 상하고 피 흘린 몸은 이제 생명 없이 십자가에 달려 있다. 군중들은 떠나갔다.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도 그 죽음의 현장을 떠났다. 병사들 역시 갈보리를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죽음과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참으로 비통한 장면이다. 그런데 갈보리의 그 어두운 순간 속에서 한 사람의 빛이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려는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이다. 아리마대 요셉의 용기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큰 도전이 된다.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다. “당신도 예수님 편에 서라!”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나타난 이러한 특징들이 당신의 마음에 말씀하게 하며, 당신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깊은 도전이 되기를 바란다.

 

  비밀스런 제자에서 담대한 증거자가 되려면 첫 번째 참된 믿음에서 나오는 신실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사복음서의 모든 기록자들은 이 요셉이라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묘사를 살펴보면, 요셉은 참으로 인격과 정직함을 갖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삶은 오늘 우리도 본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삶이었다. 그는 아리마대 사람이었다. 요셉은 아리마대라는 곳 출신이었다. 그는 부자였다 저녁이 되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는데, 그도 예수의 제자였더라.”(마태복음 27:57) 그가 예루살렘 가까이에 값비싼 개인 무덤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당시 바위를 파서 만든 새 무덤은 극소수의 부유한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보라, 공회원인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더라.”(누가복음 23:50) 요셉은 훌륭한 도덕적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신앙적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이었다(마가복음 15:43). “공회원이라는 표현은 그가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었음을 의미한다. 산헤드린은 7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 의결 기관이었다. 그들은 종교와 사회 전반에 걸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공회의 구성원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결정한 기관이었다. 또한 존경받는이라는 말은 그가 단순한 회원이 아니라 공회 안에서도 높은 신망을 얻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요셉은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지도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성경은 또한 요셉이 그 자신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더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가 시므온과 안나처럼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메시아를 기다렸고, 메시아를 만나기를 갈망했다.

 

  비밀스런 제자에서 담대한 증거자가 되려면 두 번째, 사람을 두려워하여 믿음을 숨기는 삶을 버려야 한다.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인의 지도자였지만,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이기도 했다. 요셉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기로 약속된 오래 기다려 온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었다. 요셉이 정확히 어떤 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들을 기회를 여러 차례 가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어쩌면 산헤드린 공회가 갈릴리에서 온 이 급진적인 설교자를 조사하기 위해 그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왕국과 구원의 길에 대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죽은 종교를 책망하시는 말씀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 도움을 받고 은혜를 입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간증도 들었을 것이다. 어떤 계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가 아리마대 요셉을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요셉은 제자였음에도 자신의 믿음을 숨기고 있었다. “이런 일 후에 예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자신을 숨겨온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빌라도에게 간청하니 빌라도가 허락한지라. 그러므로 그가 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더라.(요한복음 19:38)” 요셉은 제자였으나 다른 유대인들이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했다.

  요셉은 칭찬할 만한 많은 장점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유형의 성도들이 많다. 이웃들은 그들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모른다. 직장 동료들도 모른다. 학교 친구들도 모른다. 그들의 삶을 매일 지켜본다 해도 그들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신실하게 교회에 출석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 자신의 구원을 분명하게 간증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말을 사용하고, 비슷한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숨긴다. 사탄은 당신의 간증을 침묵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할 수 있다. 사탄은 당신이 담대하게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할 함정이다.

  만일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힌 침묵의 제자로 살지 말라. 당신을 구원하신 하나님 편에 담대하게 서라. 당신을 대신하여 죽으신 구주께 입을 열어 찬양과 영광을 돌리라. 지옥으로부터 당신의 혼을 구속하시고, 당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신 주님을 큰 소리로 증거하라. 그분께서 당신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해 신속히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비밀스런 제자에서 담대한 증거자가 되려면 세 번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고 대가를 감수하며 주님 편에 서야 한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루살렘 근처에 자신을 위해 사용할 무덤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당시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은 매우 값비싼 것이었다. 극히 부유한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우선순위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예수님의 생애가 하지 못했던 일을 예수님의 죽음이 이루어 낸 것이다. 그날 요셉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이제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 ‘더 이상 내 믿음을 숨기지 않겠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요셉은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으셨는지 확인한 후 그 시신을 요셉에게 내어주었고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에게 주님의 몸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반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몸은 단지 하나의 시체에 불과했다. 그에게 그것은 처리해야 할 쓰레기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와 무덤 곁에 있던 여인들은 시신을 처리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요한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아마 신분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 역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마도 그 자리에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셉은 누군가 나서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쓰레기처럼 버려질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유대인들은 빌라도와 협의하여 시신들을 십자가에서 내려 처리하기로 해 둔 상태였다(19:31-34).

  이런 상황에서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요구했다. 이 사람은 이전까지 예수님의 제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두려워했던 사람이었으나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본 후 담대해졌다.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해 주자 빌라도는 시신을 요셉에게 내어준다. 그 후 요셉은 니코데모와 함께(19:38-42) 장례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요셉은 더 이상 자신의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제 그는 담대하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한다. 그는 예수님의 몸을 요청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니코데모와 함께 십자가에서 주님의 몸을 내린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몸을 메고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간다. 그들은 주님의 몸을 정성껏 준비한 후 무덤에 안치한다. 그리고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는다. 요셉이 빌라도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몸을 요청한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가 감수해야 할 대가는 매우 컸다. 그는 빌라도의 분노를 살 수 있었다. 그는 반역자로 몰릴 수 있었다. 그는 산헤드린에서 추방될 수 있었다.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산헤드린의 일원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인기도 잃을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16:24) 참된 제자로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이다. 자신의 뜻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죄로부터 구속하시기 위해 죽으신 주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참된 제자의 삶은 세상의 흐름과 다른 삶이다. 세상과 보조를 맞추는 삶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삶이다. 그 차이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세상은 때로 그리스도인을 미워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의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주님께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당신은 어떤 종류의 제자인가? 당신은 자신의 믿음과 간증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하여 침묵하는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최근 당신에게 더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말씀하고 계시지는 않는가? 당신은 구원받았지만 아직 그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은 사람은 아닌가? 당신은 아리마대 요셉처럼 믿음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일어나 세상 앞에 당신의 믿음을 선포하라. 그분을 믿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담대히 서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분 앞에 나아가 순종할 때이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일을 즉시 행하라. 그것이 믿음의 길이며, 제자의 길이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이 마침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더 이상 숨은 제자로 머물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담대하게 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수요설교

나를 돕는 분이 누구신가?

강태영 형제
시편 121:1-8
본문 말씀
1 내가 나의 도움이 오는 산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들어올리리니, 2 나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께로부터 오는도다. 3 그가 너의 발을 실족시키지 아니하실 것이며 너를 지키시는 그는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라. 5 주께서는 너를 지키시는 분이시니 주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는도다. 6 낮에 해가 너를 치지 못할 것이며 밤에 달도 치지 못하리로다. 7 주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너를 보호하시리니 그가 너의 혼을 보호하시리라. 8 주께서 너의 나가고 들어옴을 지금부터 영원무궁토록 지키시리로다.

  우리는 공공기관이나 콜센터를 통해서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해당 기관이 어떤 곳인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등을 알아야 제대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다음은 알아두면 유용한 공공기관 및 콜센터 중 일부이다.

○층간 소음 갈등 중재 1661-2642 층간 소음이웃사이센터: 전문가 방문 및 중재

○해외긴급상황 및 사건, 사고 02-3210-0404 영사 콜센터: 24시간 통역지원

○무료법률상담지원 132 대한법률구조공단: , 형사 소송 상담

○응급의료비 대불 지원 제도 129 보건복지 상담 센터: 국가 병원비 선 대납 후 상환

  이렇듯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 해당 기관이 어떤 곳인지, 어떤 도움을 주는지 알 수 있다면 더욱 신뢰감을 가지고 한결 안정적인 상태에서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잘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성장시키실 목적으로 고난을 주신다. 성도가 죄 가운데 있을 때 돌이키게 하실 목적으로 어려움을 주시며 징계하신다. 성도가 죄 가운데 무너져서 어려움 가운데 주저앉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각자가 처한 다양한 어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를 돕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고 어떻게 나를 도우시는지 알 수 있다면 더욱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하나님 한 분만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나를 돕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나를 도우시는지 살펴볼 것이다. 여기 앉아 계신 성도님들은 그 누구보다 나를 돕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더욱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도우시는가 희미해지고 믿음의 열정이 식은 성도가 있다면 살펴볼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시 되돌아보고 더욱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나를 돕는 분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기억하라.

   1, 창조주 하나님 이심을 기억하라. 121:1~2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이며 지속적인 진정한 도움은 ""로부터 온다. 가장 위쪽에는 셋째 하늘이 있다. 우리의 본향은 바로 셋째 하늘의 "시온산"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계신다. 그분은 하늘과 땅,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카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400년간 노예생활을 견뎌야 했다. 매일 고통스러워 탄식하고 울부짖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구원자 모세를 보내주셔서 그 노예생활로부터 구출해 주셨다.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건너게 해주시는 많은 도우심을 보여주셨다. 광야를 통과할 때 40년간 마실 물, 먹을 것, 입을 것 모두 해결해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들은 눈앞에 어려움이 닥치면 주변 사람들과 자신들이 섬겼던 우상으로 돌이켰다. 그것들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 우상 또한 그렇다. , , , , 발 등 신체가 있어도 어떠한 신체능력조차 발휘할 수 없는 은과 금으로 만들어진 수공 물일뿐이라고 시편 115편에서 말씀하고 있다. 도움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필자는 미국에 갔을 때 비행기에서 바라본 풍경이 있다. 국내에선 볼 수 없던 풍경인데 넓고 끝없이 펼쳐진 대지에 풍력발전소가 널리 퍼져있는 광경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넓은 땅을 창조하신 것인가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도 새 발의 피다. 필자는 우주의 크기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지구의 반지름은 약 6400km,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 약 15천만 km, 1광년이 빛이 진공에서 1년 동안 이동한 거리로 약 94,607km, 태양과 같은 별들이 4000억개가 모인 우리 은하의 한쪽 끝에서 반대편까지 약 10만 광년, 이런 은하가 50여 개 모여있는 국부은하군 지름이 약 1000만 광년, 계속 나아가서 우리가 관측 가능한 은하의 개수는 약 2조 개로 그 범위는 지름이 약 930억 광년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지구는 얼마나 작으며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더 작은 것인가?

  이사야 40:12
  누가 손바닥으로 물들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큰 저울로 산들을 달아보았으며, 작은 저울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겠느냐?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위대하신 분이신가? 하나님께서는 이런 광활한 우주를 붙잡고 계시며 운영하고 계신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붙잡고 계신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붙잡고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우리가 할 일은 진정한 도움을 주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나의 문제를 아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 나를 항상 지키시는 분이시다. 121:3~7

  하나님께서는 실족한 자를 도우신다. 아무리 강건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넘어지게 되어있다. 어떤 사람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 반면에 한번 넘어지면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다. 마귀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아주 잘 알기에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부분을 건드려 무너지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한 부분을 더 잘 알고 계신다. 우리의 모든 부분을 알고 계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처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

  필자는 군대에서 일병을 달고 얼마 안 가 몸살이 난 적이 있었다. 열이 39도 이상 오르고 목은 찢어질 듯 아프고 머리는 깨질 지경이었다. 참고 참다가 저녁시간 의무실에 가서 진료를 보고 의무실에 입실하라는 통보를 받고 입실하게 되었다. 그다음 날 어떤 소식을 들었다. 그때는 윗사람밖에 없었는데 불침번 근무교대하면서 내 상태를 주시하며 식부 중인 물수건을 교체해 주며 간호해 주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가슴이 뭉클해졌고 없던 전우애가 더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을 확장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어있거나 자고 있을 때에도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시며 지켜주신다. 그때 그 불침번 근무자들은 약 1시간마다 한 번이었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24시간 나를, 여러분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든든한가? 심지어는 하나님의 그 시선은 우리가 죄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마귀도 사람이 자는 동안 일을 한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한다. 사람의 수면을 방해하는 요소 중 요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스마트폰이라고 한다. 스마트폰은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의 분비를 방해하고, 블루 라이트로 인한 빛이 시신경을 통해 뇌신경까지 전달되면 체온이 상승되어 잠이 달아난다고 한다. 잠은 주님께서 사랑하는 이에게 주시는 것이다. 잠자리에서 보는 스마트폰의 시청각 내용은 그 사람 안에서 영적 악의 활동 재료가 되며 수면을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 "",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되는 것이다. 말씀의 물로 씻고 기도로 간구하며 죄 가운데 있다면 보혈의 능력을 신뢰하여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있다면 성도가 자는 동안에도 지혜를 주시어 모든 문제의 출구를 열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편에서 그늘이 되어주신다 말씀하신다. 그늘은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내가 어디로 가든지 따라다닌다. 나의 그늘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도 내가 어디로 가든지 항상 함께하시며 지켜주신다. 그늘은 또한 휴식을 의미한다.

  무더운 날 여행자, 피서객은 나무그늘 아래서, 해수욕장 파라솔 밑에서 쉼을 얻는다. 송상현 광장에서 매주 토요일 청년부 형제들이 아주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다. 횡단보도에 엄청 큰 파라솔이 있는데 앉아서 쉴 수 있는 작은 의자도 있다. 한여름에 햇빛에 너무 세서 잠시 그 그늘로 피해있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슬퍼하는 요나를 위로해 주시고자 박 넝쿨의 그늘을 지게 하여 요나가 심히 기뻐하였다 말씀하고 있다. 고난과 역경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고 죄 가운데 빠쳐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영적인 그늘이신 하나님께로 가서 인생의 열기를 식혀야 한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한다.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

  우리는 모든 짐과 문제를 주님께 맡겨드리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기만 하면 된다. 주님의 멍에가 쉽고 짐도 가볍기 때문이다. 삶이 지친다면 조금 더 힘을 내어 진정한 쉼을 주시는 주님의 그늘로 발걸음을 옮기라.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쉼과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

 

  3, 나와 영원히 함께 동행하는 분이시다. 121:8

  사람은 급해지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주변 사람이나 자신의 종교, 우상, 이 세상의 것들을 신뢰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은 한정된 기간만 어느 정도로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의지하는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사람들은 지상에서 한정된 시간을 함께 할 뿐이다. 세상 종교, 우상, 세상의 물질 더더욱 그렇다. 감정적, 정서적으로 또는 삶의 필요에 많은 부분 도움이 되고 안정화가 된다 해도 삶의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것들은 모두 썩어 없어질 것들이며 특히 종교. 우상은 악한 것이며 부질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삶의 모든 문제와 본질적인 죽음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다.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우리의 죽음의 문제는 말끔히 해결되었다. 결코 지옥에 가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받은 동시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데 한번 들어오셨다고 한다면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히 13:5

  너희의 생활방식에 탐욕이 없도록 하고 현재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이는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음이라.

  죄인이 에수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옛 생활방식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게 된다. 성경을 읽고 싶어 하고,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고 싶어 하며, 경배 드리고 싶고, 찬양을 부르고 싶어 하고, 사랑하는 성도들과 교제하고 싶어 한다. 거리로 나가 복음을 전하고 싶어 한다. 성도들이 아주 열심을 내어 잘 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삶을 살수록 세상의 배척 대상이 된다. 삶의 문제들이 생기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으며 나의 가족, 친구, 동료들이 나를 버리고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결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이것은 성경대로 주님을 잘 믿고 섬기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세상 전체가 나를 버리고 고립시킨다 해도 내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 심지어 우리는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되지만 죄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또한 우리 곁에는 같은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동료,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다. 만에 하나 나의 믿음의 동료가 떠난다 하더라도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위해 중보하시고 지켜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 오를 본문 말씀을 통해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살펴봤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알았다고 한다면 더욱도 평온함과 안정감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견고한 믿음으로 신뢰하며 나의 모든 문제를 맡겨드릴 수 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삶의 모든 문제들을 창조주이시며 나와 항상 함께 하시며 항상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께 아뢰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만약 응답이 더디거나 응답받지 못했다면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면 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반드시 듣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면, 기도에 응답받았다면 여러분이 받은 구원의 감사를 포함해서 어떤 응답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감사드려야 한다. 또한 그 간증을 성도들과 나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여 담대함 가운데 맡겨진 일에 헌신하는 신실한 성도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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