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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제 441 호 2026년 6월 27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 성경공부
로마서 강해15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3:9-18
오전설교
적은 무리야, 두려워 말라.
조도희 담임목사 | 누가복음 12:32
오후설교
성숙으로 가는 길
조도희 담임목사 | 고린도전서 2:14 - 3:1
수요설교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조경재 형제 | 시편 34편 6-15절
오전 성경공부

로마서 강해15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3:9-18
본문 말씀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도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증거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와 같으니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12 모두가 탈선하여 함께 무익하게 되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들이 자기 혀로는 속였으며 그들의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 차고 15 그들의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비참함이 그들의 길에 있고 17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으며 18 그들의 눈 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도다.”라고 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가?”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10)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12)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23).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11).

우리는 다 불결한 것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으며,”(64:6).

진실로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이니이다.”(39:5).

 

그렇다면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영적인 의미에서 을 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행동할 때는 반드시 거룩한 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선한 행위는 올바른 영으로 행해져야 한다.

,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행해져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두려워서 선한 일을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선행을 한다.

그러나 그런 동기는 선한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동기가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늙었거나, 너무 약하거나, 너무 쇠약해져서 악한 일을 하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뿐이다.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깨닫는 자도 없고

이 말씀은 영적인 것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고전 2:11-14).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세상에 종교가 그렇게 많은 것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는 있지만,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12 모두가 탈선하여 함께 무익하게 되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이것은 온 인류를 향한 완전히 부정적인 기소장이다.

성경은 전 인류를 일괄적으로 정죄한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들이 자기 혀로는 속였으며 그들의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들이 자기 혀로는 속였으며 그들의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 차고

바울이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라고 말할 때 그는 시편 5:9을 인용하고 있다.

시편 5:9그들의 입에는 신실함이 없고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는 데 신실하지 못하다.

시편 5:9에서 혀의 속임은 아첨을 말한다.

솔로몬은 아첨하는 자가 사람을 속인다고 계속해서 경고한다(2:16, 7:5, 20:19, 26:28, 28:23, 29:5).

혀의 죄는 우상숭배를 제외하면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죄이다.

혀에 대한 결정적인 본문은 야고보서 3장이다.

거기서 혀는 죄악의 세상이라고 불리며, “온몸을 더럽히며”(3:6)라고 말한다.

 

14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 차고

같은 입에서 축복과 저주가 나오는도다.”(3:10)

나의 형제들아,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되느니라.

 

15 그들의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른지라

잠언 6:18에서 주께서 미워하시는 여섯 가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악으로 달려가는 데 빠른 발이다.

 

16 파멸과 비참함이 그들의 길에 있고

17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으며

사람의 길(way) 도 올바르지 않다.

사람들이 가는 길들”(16) 파멸과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들이니라.”(잠언 14:12)

 

18그들의 눈 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도다.

사람이 주를 두려워하기를 버릴 때 그는 모든 지혜(28:28; 9:10)와 모든 지식(1:7)을 버린 것이다.

귀도 선하지 못하다. “그들의 귀는 듣는 데 둔하고”(28:27)

손도 선하지 못하다. “그를 너희가 붙잡아 무법자들의 손을 통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2:23)

두뇌도 선하지 못하다. “그들의 생각은 죄악의 생각이요” (59:7). 

오전 성경공부 동영상 설교
오전설교

적은 무리야, 두려워 말라.

조도희 담임목사
누가복음 12:32
본문 말씀
적은 무리야, 두려워 말라. 너희에게 그 왕국을 주시는 것이 너희 아버지의 참된 기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세상 사람들의 눈에 부유하지도, 강하지도, 영향력이 크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았던 제자들에게 하셨다. 그들은 거부당한 메시아를 따르는 적은 무리였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해 있었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두려움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누가복음 12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위선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과 탐욕과 염려에 대해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큰 무리가 모여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제자들에게 시선을 돌려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2:4-7에서 주님은 몸은 죽일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누가복음 12:15에서는 탐심을 경고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의하고, 탐심을 조심하라. 이는 사람의 생명이 자기가 소유한 것의 풍부함에 있지 않음이라.” 그리고 이어서 많은 재물을 쌓아 두었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염려에 대해 말씀하신다. 주님은 생명과 음식과 의복과 내일의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까마귀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먹이신다. 또한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백합화를 입히신다. 주님의 논리는 매우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새들과 꽃들을 돌보신다면, 하물며 그분의 자녀들을 얼마나 더 돌보시겠는가? 그리고 이어서 누가복음 12:31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하여지리라.” 바로 이 약속 직후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적은 무리야, 두려워 말라. 너희에게 그 왕국을 주시는 것이 너희 아버지의 참된 기쁨이니라.” 따라서 누가복음 12:32는 단순히 따로 떨어져 있는 위로의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두려움과 염려와 탐욕과 세상적인 불안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절정에 이르는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 이상 고아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버지께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왕국을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성도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왕국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성도는 목자의 양 떼이기에 두려워 말아야 한다. “적은 무리야, 두려워 말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적은 양 떼인 적은 무리라고 부르신다. 이 표현은 매우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이다. 그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작고, 약하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적은무리였다. 양 떼의 모습은 성경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림이다. 위대한 목자를 가진 작은 양 떼는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강력한 군대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 세상은 숫자를 센다. 세상은 재산을 센다. 세상은 권력을 센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세신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양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신다. 영적인 현실을 눈에 보이는 크기나 힘이나 영향력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한 가지 명령으로 말씀을 시작하신다. “두려워 말라.” 이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다. 감상적인 위로의 말도 아니다. 이것은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목자이신 주님께서 주신 권위 있는 명령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두려운 상황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아무런 위험도 없는 곳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들에게 두려움의 지배를 받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두려움은 믿음을 밀어내기 시작할 때 죄가 된다. 두려움은 상황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게 만들 때 위험해진다. 두려움은 우리의 순종을 통제하기 시작할 때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 제자들에게는 두려워할 이유가 많았다. 그들은 적은 무리의 소수였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현실적인 자원은 매우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라.” 왜 그런가? 두려움은 결코 성도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삶을 지배해야 하는 것은 믿음이다. 시편 563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서워할 때에 주를 신뢰하리이다.” 또 이사야 4110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임이라.” 주님께서는 단순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홀로 남겨 두지 않으신다.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함께 주신다. 누가복음 1232절에서 그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은혜로운 계획이다. 불안이 밀려올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라. “나는 지금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진리를 잊어버리고 있는가?” 두려움은 종종 영적인 망각이라는 토양 속에서 자란다. 마음이 아버지의 돌보심을 잊어버릴 때, 두려움은 점점 자라난다. 목자의 함께하심을 잊어버릴 때, 두려움은 점점 자라난다. 왕국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잊어버릴 때 두려움은 점점 자라난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자신의 혼에게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나는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환경에 맡겨진 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나를 아시고, 나를 돌보시며, 나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다.” 이러한 진리를 기억할 때 두려움은 약해지고 믿음은 강해진다.

 

  성도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왕국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성도는 왕국의 상속자이기에 두려워 말아야 한다. “너희에게 그 왕국을 주시는 것이

  제자들은 음식과 의복과 일상의 필요 때문에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시선을 일시적인 필요에서 영원한 유업으로 들어 올리신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뿐만 아니라, 빵과 옷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왕국을 주신다. 여기서 주다라는 단어는 은혜를 강조한다. 왕국은 인간의 공로나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행위로 사는 것도 아니다. 왕국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로마서 623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 여기서 말하는 왕국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통치와 구속의 복들, 현재 자기 백성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으로 통치하시며 자기 백성이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될 미래의 완성을 포함한다. 야고보서 25절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경청하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시어 믿음 안에서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으신 것이 아니냐?” 또한 요한계시록 1115절은 선언한다. “이 세상의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어서 그분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라.”

  이 약속은 우리의 세상적인 염려를 올바른 관점에서 보게 한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왕국을 주셨다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잊으시겠는가? 아버지께서 우리의 영원을 보장하셨다면 이 땅의 삶 가운데 우리를 버리시겠는가? 아버지께서 자신의 아들을 주셨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아끼시겠는가? 로마서 832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왕국에 대한 이 약속은 성도를 두려움과 탐욕과 절망에서 자유롭게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의 전부인 것처럼 집착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보물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손실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악인들이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들인 것처럼 부러워할 이유도 없다. 그리스도인은 상속자이다.

 

  성도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왕국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성도는 자녀의 상속을 기뻐하시는 아버지가 계시기에 두려워 말아야 한다. “너희 아버지의 참된 기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이 표현은 은혜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은 단순히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이나, 왕 앞에 선 신하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버지 앞에 선 자녀들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 사실이 하나님의 위엄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경이로움을 더욱 깊게 만든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백성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이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진리를 생각하게 한다. 관계, 애정, 권위, 공급, 징계, 그리고 상속이다. 아버지는 자기 자녀를 돌본다. 그들의 필요를 안다.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바르게 교훈하며,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마태복음 68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심이라.” 또한 로마서 815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 되는 영을 받았으므로 그에 따라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물론 이러한 아버지 되심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라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속한 특권이다. 본래 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입양된다.

  염려하는 마음은 종종 고아처럼 생각한다. 그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 자신을 지켜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 “내가 모든 짐을 혼자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자녀처럼 생각하라고 가르치신다. 당신의 아버지는 마지못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무관심하신 분도, 가난하신 분도 아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기쁨으로 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경을 바라보며 낙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안식을 누려야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냉담함이 아니라 사랑이며, 무관심이 아니라 돌보심이며, 거절이 아니라 은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왕국을 주시는 것이 참된 기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표현은 기쁨과 뜻과 은혜로운 의도와 주권적인 만족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못해 왕국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자신의 백성을 복주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에베소서 15절은 믿는 자들이 양자 삼으심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빌립보서 213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너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그분은 너희로 그분의 선한 기쁘심에 따라 뜻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 아버지의 구원 계획은 그분 자신의 은혜로운 뜻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많은 성도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시기보다 겨우 참아 주시는 것처럼 살아간다.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한다. 쉽게 노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 복주시기를 꺼려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신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왕국을 주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 말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세상적 안락함을 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을 주신다. 그분 자신을 주신다. 그분의 은혜를 주신다. 그리고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인색한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선하신 아버지이시며, 자신의 백성을 축복하는 일을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은 억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 가운데 기쁨으로 주시는 선물이다.

 

  두려움이 당신의 순종을 지배하게 하지 말라. 연약함이 버림받았다는 뜻은 아님을 기억하라. 아버지의 마음 안에서 안식을 누리라. 세상적인 안전보다 하나님의 왕국을 먼저 구하라. 고아처럼 살지 말고 상속자처럼 살라.

  성도는 연약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다. 걸어가는 길은 험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지는 확실하다. 당신의 목자인 아버지는 당신이 왕국을 상속받을 것을 기뻐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왕국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걸어가라. 당신을 부르신 분은 신실하시며, 선한 목자이시며, 하늘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미 당신에게 왕국을 주시기로 기뻐하셨다. “적은 무리야, 두려워 말라. 너희에게 그 왕국을 주시는 것이 너희 아버지의 참된 기쁨이니라.”

오후설교

성숙으로 가는 길

조도희 담임목사
고린도전서 2:14 - 3:1
본문 말씀
14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들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3: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어서 육신적인 사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기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명제 : 성숙으로 가는 길은 자연인의 상태를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육신적인 삶을 극복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며, 구원을 받은 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성숙에 이르는 성장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성숙으로 가는 길은 자연인의 상태를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육신적인 삶을 극복하는 것이다. 성숙으로 가는 길은 먼저 자연인의 상태를 벗어냐야 한다.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2:14)

  자연인은 죄를 짓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타락한 존재이다. 그의 본성 안에는 악을 향해 기울어지는 성향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물과 전기는 언제나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따라 흐른다. 마찬가지로 자연인은 거룩함보다 죄를 향해 흘러간다. 로마서 3:10-12에서 말했듯이, 자연인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으며, 생각 없는 꼭두각시처럼 육신과 마귀의 온갖 욕망을 따라 살아간다. 그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죄와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그는 영적 무지의 어둠 가운데 있다. 니코데모는 유대인들의 선생이었지만 영적으로는 깊은 어둠 속에 있었다. 자연인은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하며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연인은 교회나 예배의 일 부 요소를 좋아할 수는 있다. 교회의 분위기나 사람들, 음악이나 프로그램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인 진리는 그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판하고 조롱하기도 한다. 그것이 왜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마치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 음악을 비평하는 것과 같고, 눈먼 사람이 그림을 비웃는 것과 같다. 그는 어둠 가운데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바꾸실 수 있다.

 

  성숙으로 가는 길은 자연인의 상태를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육신적인 삶을 극복하는 것이다. 성숙으로 가는 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들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2:15-16)

  영적인 사람은 두 번 태어난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 있고, 성장하며, 활력 넘치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성령님께서 그의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사실은 그의 삶의 방식 속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을 따라 살아간다. 영적인 사람은 마음속에 계신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도록 허락한다.

  그는 성령으로부터 배운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영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성경을 깨달을 수 있고, 주님의 임재를 즐길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에게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양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물 창고가 열리면 그는 가능한 한 많은 보화를 모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그 말씀을 통해 성장한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으로 인해 자유롭게 된다. 영적인 사람은 육신과 세상과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판단하고” “분별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 쉽게 끼워 맞춰지지 않는다. 그는 다른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는 문자 그대로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각을 소유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종종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때로는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거나 미친 사람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각을 다스리신다. 그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그의 손과 발을 다스리신다. 그의 혀를 다스리신다. 그의 육신을 다스리신다. 그의 삶 전체가 성령님의 통치 아래 놓여 있다. 그는 자신의 삶 가운데 어떤 부분도 주님께 숨겨 두거나 붙들어 두지 않는다. 모든 것을 주님의 주권 아래 내어드린다.

  이것은 모든 성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수준의 영적 성숙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하게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구원받은 성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성숙한 성도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가?” 나는 여전히 육신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의 통치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가?

 

  성숙으로 가는 길은 자연인의 상태를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육신적인 삶을 극복하는 것이다. 성숙으로 가는 길은 육신적인 삶을 극복해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어서 육신적인 사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기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3:1)

  육신적인 사람은 구원은 받았지만 거의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늘 육신과 세상과 마귀에게 패배하며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매우 육신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육신적인 사람은 영적으로 걷지 못한다. 그는 끊임없이 육신과 세상과 마귀에게 패배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걷기보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이끌려 살아간다. 영적 승리보다 반복되는 실패가 그의 삶의 특징이 된다.

  그는 영적으로 싸우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온전히 입지 못한다. 갑옷의 일부는 아예 갖추고 있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부분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른다. 결국 악과 맞서 싸우지 못한다. 유혹이 오면 쉽게 무너지고, 시험이 오면 쉽게 포기하며, 영적 전쟁에서는 늘 패배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영적으로 일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혼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회를 적극적으로 섬기지 않는다. 가르치지 않는다.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다. 책임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수고 위에 올라타 있기만 한다. 남들이 기도해 주고, 남들이 섬겨 주고, 남들이 희생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그는 영적 유아로서 늘 의존적이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고기로 먹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지금까지 소화시킬 수 없었음이요, 아직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2)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적 양식을 얻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는 가르칠 수 없고 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는 섬길 수 없고 늘 섬김을 받아야 한다. 그는 스스로 말씀을 연구하여 영적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는 분열을 일으킨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늘 다툴 대상을 찾는다. 사소하고 유치한 문제 때문에 교회를 흔들고 분열시키려 한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화를 내며, 쉽게 기분이 상한다. 또한 자신이 결코 얻지 못한 권리들을 주장하며 방어하는 데는 매우 빠르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은 특별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육신적 성향은 개인에게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오늘날에도 매우 많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많다. 만일 당신이 그런 상태에 있다면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영적으로 정체된 채 머물러 있도록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분을 섬기도록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오늘은 육신의 행위들을 벗어 버리기에 좋은 날이다. 오래된 육신적인 태도, 게으름, 자기중심적인 생각, 영적 무관심,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애물을 내려놓고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에 좋은 날이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구원받은 성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성도, 섬기는 성도,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당신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이제 당신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자연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영적인 사람이라면,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말고 계속해서 성장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육신적인 사람이라면, 회개하고 변화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말씀하신 것이 있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고, 성장하고 있는 사람은 더욱 성장하며, 육신적인 사람은 회개하여 성숙한 성도로 변화되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에게 원하시는 삶이며, 바로 성숙으로 가는 길이다.

수요설교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조경재 형제
시편 34편 6-15절
본문 말씀
6 이 불쌍한 사람이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들으시고 그를 그의 모든 고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 주의 천사가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둘러 진치고 그들을 구해 내는도다. 8 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오 너희 주의 성도들아, 주를 두려워하라.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굶주려도 주를 찾는 자들은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11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게 경청하라. 주를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리라. 12 생명을 갈구하고 많은 날들을 사랑하여 좋은 것을 볼 사람이 누구인가? 13 네 혀를 악으로부터 지키며 네 입술을 교활을 말함에서 지키라. 14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그것을 추구하라.

  맛을 본다는 것, 입으로 음식을 집어 넣어 미각으로 느끼고, 배를 채우는 것은 다른 행위들과 비교될 수 없는 독특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맛을 본다는 것은 거의 모든 감각이 동원된다. 먼저 미각으로 다양한 맛을 보고 (오미를 구분한다), 향을 맡고(후각), 눈으로 음식을 먼저 맛보고(시각), 음식이 조리되거나 씹을 때에 나는 다양한 소리도 맛에 포함된다(청각). 그리고 단순히 맛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질감을 혀로 접촉하고 턱과 치아로 씹을 때에 변화되는 음식의 느낌을 느낀다(혀와 구강으로 느끼는 촉각이라 할 수 있겠다). 맛보는 것은 다른 경험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중요성을 지니는데, 그것은 생명에 직결된 문제라는 것이다. 음악을 듣지 않는다 해서 죽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그러나 먹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하는 것은 젖을 힘차게 빠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주의 선하심을 알았을 때에 그 경험을 미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로우심과 선하심, 자비하심을 경험했을 때, 이를 표현하는 감각이 단순히 보는것, 듣는것, 만져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이 동원되는 맛을 보는 경험을 하라고 비유함으로써 주의 선하심이 얼마나 풍요롭고 다채로우며 신선한 경험인지 알라고 권하는 것이다.

 

  첫번째로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위해서는 배가 고파야 한다. 6~8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배가 고플 때에는 밥에 김치만 있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이미 배가 부르면 그 어떤 산해진미를 갖다주어도 시큰둥해진다. 다윗이 시편 34편을 기록했던 배경은 그가 아키스왕에게 미친척을 하다가 쫓겨나 떠난 상황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이 몹시도 굶주려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필요한 때에 나타나신 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고, 그 맛이 꿀보다도 더 달았던 것이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쓴 것이라도 단 법이다. 다윗은 사울왕의 곁에 서 있었던 영광을 잃어버리고 한순간에 도피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고, 하루 하루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걱정을 해야했다. 가족도, 친구도 떠나서 방황해야 했다. 사자와 곰에 맞서고, 골리앗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다윗은 사람을 두려워했다. 단순히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이방왕 앞에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미친척을 해야 했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승리했던 다윗은 이제 수염에 일부로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사람 척을 하고 있다. 높이 올라갈 수록 떨어지는 것이 크다고 했던가, 다윗의 영광은 가장 드높았다가, 가장 큰 폭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나타나신 주의 선하심이 다윗을 고난에서 구했고, 그의 마음을 기쁨과 찬양으로 채웠다. 그리하여 다윗은 이 불쌍한 사람이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들으시고 그를 그의 모든 고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고백한다. 다윗은 스스로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을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스스로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이만이 은혜와 자비를 발견할 수 있다.

  굶주리고 배고픈 이가 주의 선하심을 참되게 맛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때의 시장기는 복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님을 찾게 만드는 배고픔, 질병, 실패, 고난, 환난, 핍박, 스트레스 등 이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이 몹시 필요한 이라는 정직한 고백을 흘러나오게 한다. 그리고 그가 그 상태에서 비로소 주의 선하심을 맛보았을 때에 그 선하심의 진정한 맛을 느끼고 경탄하는 것이다.

  다윗이 본문에 하나님의 구원과 선하심을 맛본 경험은 그가 골리앗을 쓰러트렸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사울왕 앞에 서는 영광을 입었을 때 흘러나온 것이 아니어었다. 그가 인생의 어두움 한가운데 있었을 때, 스스로를 불쌍한 이로 여길 때, 오직 위를 바라보고 구원을 바랄 때, 그 때 맛보아 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접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때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배부른 상태였는가? 아니면 인생에서 바랄 것이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던 때였는가? 그 어느때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가깝고 친밀하며 수많은 간증들을 남긴 때는 언제였는가? 모든 것이 충족하고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고 근심과 걱정이 없는 때였는가? 아니면 고난의 한복판에서 주님께서만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이 불쌍한 이를 도와주소서라고 고백했던 때였는가?

  배고픈 상태에 있는가? , 하나님이 몹시도 필요하고 주의 선하심이 반드시 필요한 상태에 있는가? 주의 선하심을 맛볼 차례이다. 그분께 부르짖으라, 그분은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자신에게 부르짖는 음성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친히 구원하신다. 그 구원을 맛본자는 고백할 수 밖에 없다. “,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리고 이 구원의 간증을 다른 이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를 맛본이가 그 사실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이에게도 맛보라고 권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있게 제시할 것이다. 아직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한 죄인에게 그를 영접하라고, 그리고 구원받았지만 아직 진정한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지 못한 주의 자녀에게 더욱 심오하고 깊은 맛을 느끼라고, 주만을 의지하는 삶을 경험해보라고 강권할 것이다.

 

  두번째로, 주의 선하심을 맛본 자는 참된 만족을 할 수 있다. 9~11

  다윗은 시편 23편에서도 아름다운 시로 고백하기를,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한 것이 없으리로다.”고 했다. 본문에는 젊은 사자가 나온다. 젊은 사자는 기력이 넘치고 강하여 백수의 왕이라 불린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턱과 날카로운 송곳니, 위엄있는 갈기가 있는 사자도 궁핍하여 굶주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 주를 찾는 자, 주를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굶주리지 않고 마음껏 먹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풍성함으로 우리를 복주셨다. 젊은 사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간다. 때에 따라 자신의 능력으로 사냥해서 먹을 수 있지만, 사냥에 실패하거나, 경쟁자에게 빼았기거나, 먹이를 찾지 못하거나, 부상을 당했거나 등의 여러 이유로 먹지 못하고 굶주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 그분을 의지하고 늘 찾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먹이신다. 그것도 좋은 것으로 먹이신다.

  이 세상의 신인 마귀도 자신의 자식들을 먹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만족이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나는 만족한다라고 하는 것은 거의 죄악시된다. 끊임없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가져도 더 가져야 할 것처럼, 많이 가져도 내가 갖지 못한 한 가지를 갖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거기에 끝이 있겠는가? 마치 목마른 자가 바닷물로 갈증을 해소했을 때, 더욱더 타는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마귀가 주는 음식을 먹은 자들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의 입에서는 결코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부와 재물로, 인기와 명예로, 쾌락과 재미로 사람들의 배를 채워줄 수 있으나, 이런 것들은 더욱 굶주리고 목마르게 만들 뿐이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 주의 선하심을 맛본 자들만이 만족하고 내가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말그대로 다 있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 필요를 공급하신다. 이 악한 세상에서 부를 쌓는 무의미한 행위를 이루게 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보시기에 진정 좋은 것을 부족함 없이 공급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좋은 것으로 먹이신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이다.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죄인의 죄문제를 해결하셨다. 죄문제가 해결되고 죄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 것, 이것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마귀의 자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이 실로 좋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확신,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과 용기와 위로,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은혜와 자비,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임받을 수 있는 특권, 이 것들이 실로 좋은 것들이다. 이런 좋은 것들을 부족함없이 공급해 주신다.

  이 순간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는가? 그분께서 주시는 더없이 풍요하며 풍성한 선하심을 맛보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나는 기쁨과 화평과 평안이 부족하고, 만족이 없고, 목마르며 기진해 있으며 지쳐있고 활기가 부족한가? 그분께서는 다 오라고 초청하신다. 그분께로가면 부족함이 없다. 모든 좋은 것이 부족함없이 공급된다. 심지어 값도 없다. 조건도, 자격도 없다! 단지 배고프고 목마르거든, 그분께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주님께로 나아가라. 그리고 그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이 불쌍한 자가 주님께 나아옵니다, 저의 배고픔과 저의 목마름을, 저의 부족을 채워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라. 그분께서 넘치게 채워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의 선하심을 맛본 자들은 행복한 삶을 누린다. 12~15

  사람의 입은 자동적으로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어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들, 기름지고, 많이 달고, 짜고, 너무 매운 음식들만을 먹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명하게 건강을 잃을 것이다. 세상의 음식들이 갈수록 더욱 자극적이게 되어가는 것처럼, 이 세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지 못하도록 온통 자극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런 재미있고 쾌락적인 음식을 경험하다가 예수님이라는 생명의 빵을 보면 구미가 하나도 당기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이미 여러가지 세상적인 것들로 어두워져있고, 본문의 관점에서는 입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본문은 네 혀를 악으로부터 지키며 네 입술을 교활을 말함에서 지키라 명하신다. 그리고 악에서 떠나라고 명하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혀에 악을 두고서는 주님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온통 불량식품들로 배를 채우면 이미 혀는 자극에 길들여져 있고, 좋은 음식이 들어갈 위장의 공간도 남아있지 않기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는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없으며, 근본적인 영양이 공급되지는 않고 온통 건강을 해치는 해로운 음식만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마귀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하게 죄악이라는 아주 해로운 맛을 개발해냈다. 그 악으로 죄인들의 마음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입맛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한다. 주의 선하심을 갈급해야 마땅하거늘, 이미 나의 혀와 입을 채우는 악은 무엇인가? 주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것, 그분과 동행함으로 얻는 참된 만족과 기쁨, 이 참되고 건강한 맛을 찾지 못하게 하는 악은 무엇인가? 그것이 발견된다면 그것에서 떠나고 피해야 한다. 어떤 싸구려불량음식들이 나의 입맛을 잃게 하고 있는가? 잠깐의 쾌락만 줄 뿐, 어떤 유익도 주지 않는 그 음식을 끊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음식으로 눈을 돌리라.

생명을 갈구하고 많은 날들을 사랑하여 좋은 것을 볼 사람”(12) 이는 진정으로 복받은 사람의 인생을 묘사한다. 많은 날을 사는 것, 장수하는 것은 복이 분명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긴 인생이 어떤 시간들로 채워지는가이다. 오랜 기간을 살았지만 그의 인생에서 풍파만이 가득하고 재앙만이 넘쳤다면,결코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장수를 허락하셨고, 그리고 그 날들에 좋은 것들을 많이 본 이가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장수의 비결은 무엇인가? “좋은 것을 많이 먹고, 나쁜것 먹지 않고, 꾸준히 운동하면서 스트레스를 피하는 것누구나 알고 있는 법칙일 것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 그 삶은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위해 날마다 그분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를 나누고, 악을 피하는 삶이다. 그리고 주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화평으로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운 삶이다.

 

  부모는 자녀가 굶는 것을 보고 있지 않는다. 자녀가 몸에 안좋은 음식을 먹는데 내버려두는 부모가 없듯, 하나님께서는 더더욱 그분의 소중한 자녀들이 가장 좋은 것을 맛보고 섭취하길 바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좋은 것을 담아 우리에게 주셨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 주님께 부르짖고 구하는 삶, 이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할 것이며, 우리를 가장 좋은 삶으로, 영생으로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신다. 와서 먹으라고, 맛보고 알라고, 향유하고 기뻐하라고 초청하신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라고(벧전2:3) 하시며, “, 너희 목마른 자들은 누구든지 물들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고”(55:1) 말씀하신다. 그분은 오늘도 당신에게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가득 준비하시고서 그것을 값없이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갈급하면 된다. 배고픈 자가 맛볼 수 있다. 당신은 주의 선하심에 대해 필요를 느끼는가? 숫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주님과의 만족스러운 동행의 기쁨을 갈급하는가? 주께 오늘 부르짖으라.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귀를 열어두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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