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을 본다는 것, 입으로 음식을 집어 넣어 미각으로 느끼고, 배를 채우는 것은 다른 행위들과 비교될 수 없는 독특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맛을 본다는 것은 거의 모든 감각이 동원된다. 먼저 미각으로 다양한 맛을 보고 (오미를 구분한다), 향을 맡고(후각), 눈으로 음식을 먼저 맛보고(시각), 음식이 조리되거나 씹을 때에 나는 다양한 소리도 맛에 포함된다(청각). 그리고 단순히 맛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질감을 혀로 접촉하고 턱과 치아로 씹을 때에 변화되는 음식의 느낌을 느낀다(혀와 구강으로 느끼는 촉각이라 할 수 있겠다). 맛보는 것은 다른 경험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중요성을 지니는데, 그것은 생명에 직결된 문제라는 것이다. 음악을 듣지 않는다 해서 죽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그러나 먹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하는 것은 젖을 힘차게 빠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주의 선하심을 알았을 때에 그 경험을 미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로우심과 선하심, 자비하심을 경험했을 때, 이를 표현하는 감각이 단순히 보는것, 듣는것, 만져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이 동원되는 맛을 보는 경험을 하라고 비유함으로써 주의 선하심이 얼마나 풍요롭고 다채로우며 신선한 경험인지 알라고 권하는 것이다.
첫번째로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위해서는 배가 고파야 한다. 6~8절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배가 고플 때에는 밥에 김치만 있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이미 배가 부르면 그 어떤 산해진미를 갖다주어도 시큰둥해진다. 다윗이 시편 34편을 기록했던 배경은 그가 아키스왕에게 미친척을 하다가 쫓겨나 떠난 상황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이 몹시도 굶주려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필요한 때에 나타나신 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고, 그 맛이 꿀보다도 더 달았던 것이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쓴 것이라도 단 법이다. 다윗은 사울왕의 곁에 서 있었던 영광을 잃어버리고 한순간에 도피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고, 하루 하루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걱정을 해야했다. 가족도, 친구도 떠나서 방황해야 했다. 사자와 곰에 맞서고, 골리앗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다윗은 사람을 두려워했다. 단순히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이방왕 앞에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미친척을 해야 했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승리했던 다윗은 이제 수염에 일부로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사람 척을 하고 있다. 높이 올라갈 수록 떨어지는 것이 크다고 했던가, 다윗의 영광은 가장 드높았다가, 가장 큰 폭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나타나신 주의 선하심이 다윗을 고난에서 구했고, 그의 마음을 기쁨과 찬양으로 채웠다. 그리하여 다윗은 “이 불쌍한 사람이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들으시고 그를 그의 모든 고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고백한다. 다윗은 스스로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을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스스로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이만이 은혜와 자비를 발견할 수 있다.
굶주리고 배고픈 이가 주의 선하심을 참되게 맛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때의 시장기는 복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님을 찾게 만드는 배고픔, 질병, 실패, 고난, 환난, 핍박, 스트레스 등 이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이 몹시 필요한 이라는 정직한 고백을 흘러나오게 한다. 그리고 그가 그 상태에서 비로소 주의 선하심을 맛보았을 때에 그 선하심의 진정한 맛을 느끼고 경탄하는 것이다.
다윗이 본문에 하나님의 구원과 선하심을 맛본 경험은 그가 골리앗을 쓰러트렸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사울왕 앞에 서는 영광을 입었을 때 흘러나온 것이 아니어었다. 그가 인생의 어두움 한가운데 있었을 때, 스스로를 불쌍한 이로 여길 때, 오직 위를 바라보고 구원을 바랄 때, 그 때 맛보아 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접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때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배부른 상태였는가? 아니면 인생에서 바랄 것이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던 때였는가? 그 어느때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가깝고 친밀하며 수많은 간증들을 남긴 때는 언제였는가? 모든 것이 충족하고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고 근심과 걱정이 없는 때였는가? 아니면 고난의 한복판에서 “주님께서만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이 불쌍한 이를 도와주소서”라고 고백했던 때였는가?
배고픈 상태에 있는가? 즉, 하나님이 몹시도 필요하고 주의 선하심이 반드시 필요한 상태에 있는가? 주의 선하심을 맛볼 차례이다. 그분께 부르짖으라, 그분은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자신에게 부르짖는 음성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친히 구원하신다. 그 구원을 맛본자는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리고 이 구원의 간증을 다른 이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를 맛본이가 그 사실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이에게도 맛보라고 권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있게 제시할 것이다. 아직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한 죄인에게 그를 영접하라고, 그리고 구원받았지만 아직 진정한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지 못한 주의 자녀에게 더욱 심오하고 깊은 맛을 느끼라고, 주만을 의지하는 삶을 경험해보라고 강권할 것이다.
두번째로, 주의 선하심을 맛본 자는 참된 만족을 할 수 있다. 9~11절
다윗은 시편 23편에서도 아름다운 시로 고백하기를,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한 것이 없으리로다.”고 했다. 본문에는 젊은 사자가 나온다. 젊은 사자는 기력이 넘치고 강하여 백수의 왕이라 불린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턱과 날카로운 송곳니, 위엄있는 갈기가 있는 사자도 궁핍하여 굶주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 주를 찾는 자, 주를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굶주리지 않고 마음껏 먹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풍성함으로 우리를 복주셨다. 젊은 사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간다. 때에 따라 자신의 능력으로 사냥해서 먹을 수 있지만, 사냥에 실패하거나, 경쟁자에게 빼았기거나, 먹이를 찾지 못하거나, 부상을 당했거나 등의 여러 이유로 먹지 못하고 굶주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 그분을 의지하고 늘 찾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먹이신다. 그것도 좋은 것으로 먹이신다.
이 세상의 신인 마귀도 자신의 자식들을 먹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만족이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나는 만족한다”라고 하는 것은 거의 죄악시된다. 끊임없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가져도 더 가져야 할 것처럼, 많이 가져도 내가 갖지 못한 한 가지를 갖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거기에 끝이 있겠는가? 마치 목마른 자가 바닷물로 갈증을 해소했을 때, 더욱더 타는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마귀가 주는 음식을 먹은 자들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의 입에서는 결코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부와 재물로, 인기와 명예로, 쾌락과 재미로 사람들의 배를 채워줄 수 있으나, 이런 것들은 더욱 굶주리고 목마르게 만들 뿐이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 주의 선하심을 맛본 자들만이 만족하고 “내가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말그대로 다 있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 필요를 공급하신다. 이 악한 세상에서 부를 쌓는 무의미한 행위를 이루게 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보시기에 진정 좋은 것을 부족함 없이 공급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좋은 것으로 먹이신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이다.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죄인의 죄문제를 해결하셨다. 죄문제가 해결되고 죄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 것, 이것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마귀의 자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이 실로 좋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확신,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과 용기와 위로,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은혜와 자비,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임받을 수 있는 특권, 이 것들이 실로 좋은 것들이다. 이런 좋은 것들을 부족함없이 공급해 주신다.
이 순간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는가? 그분께서 주시는 더없이 풍요하며 풍성한 선하심을 맛보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나는 기쁨과 화평과 평안이 부족하고, 만족이 없고, 목마르며 기진해 있으며 지쳐있고 활기가 부족한가? 그분께서는 다 오라고 초청하신다. 그분께로가면 부족함이 없다. 모든 좋은 것이 부족함없이 공급된다. 심지어 값도 없다. 조건도, 자격도 없다! 단지 배고프고 목마르거든, 그분께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주님께로 나아가라. 그리고 그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이 불쌍한 자가 주님께 나아옵니다, 저의 배고픔과 저의 목마름을, 저의 부족을 채워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라. 그분께서 넘치게 채워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의 선하심을 맛본 자들은 행복한 삶을 누린다. 12~15절
사람의 입은 자동적으로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어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들, 기름지고, 많이 달고, 짜고, 너무 매운 음식들만을 먹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명하게 건강을 잃을 것이다. 세상의 음식들이 갈수록 더욱 자극적이게 되어가는 것처럼, 이 세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지 못하도록 온통 자극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런 재미있고 쾌락적인 음식을 경험하다가 예수님이라는 생명의 빵을 보면 구미가 하나도 당기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이미 여러가지 세상적인 것들로 어두워져있고, 본문의 관점에서는 입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본문은 네 혀를 악으로부터 지키며 네 입술을 교활을 말함에서 지키라 명하신다. 그리고 악에서 떠나라고 명하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혀에 악을 두고서는 주님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온통 불량식품들로 배를 채우면 이미 혀는 자극에 길들여져 있고, 좋은 음식이 들어갈 위장의 공간도 남아있지 않기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는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없으며, 근본적인 영양이 공급되지는 않고 온통 건강을 해치는 해로운 음식만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마귀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하게 죄악이라는 아주 해로운 맛을 개발해냈다. 그 악으로 죄인들의 마음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입맛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한다. 주의 선하심을 갈급해야 마땅하거늘, 이미 나의 혀와 입을 채우는 악은 무엇인가? 주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것, 그분과 동행함으로 얻는 참된 만족과 기쁨, 이 참되고 건강한 맛을 찾지 못하게 하는 악은 무엇인가? 그것이 발견된다면 그것에서 떠나고 피해야 한다. 어떤 싸구려불량음식들이 나의 입맛을 잃게 하고 있는가? 잠깐의 쾌락만 줄 뿐, 어떤 유익도 주지 않는 그 음식을 끊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음식으로 눈을 돌리라.
“생명을 갈구하고 많은 날들을 사랑하여 좋은 것을 볼 사람”(12절) 이는 진정으로 복받은 사람의 인생을 묘사한다. 많은 날을 사는 것, 장수하는 것은 복이 분명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긴 인생이 어떤 시간들로 채워지는가이다. 오랜 기간을 살았지만 그의 인생에서 풍파만이 가득하고 재앙만이 넘쳤다면,결코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장수를 허락하셨고, 그리고 그 날들에 좋은 것들을 많이 본 이가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장수의 비결은 무엇인가? “좋은 것을 많이 먹고, 나쁜것 먹지 않고, 꾸준히 운동하면서 스트레스를 피하는 것” 누구나 알고 있는 법칙일 것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 그 삶은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위해 날마다 그분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를 나누고, 악을 피하는 삶이다. 그리고 주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화평으로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운 삶이다.
부모는 자녀가 굶는 것을 보고 있지 않는다. 자녀가 몸에 안좋은 음식을 먹는데 내버려두는 부모가 없듯, 하나님께서는 더더욱 그분의 소중한 자녀들이 가장 좋은 것을 맛보고 섭취하길 바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좋은 것을 담아 우리에게 주셨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 주님께 부르짖고 구하는 삶, 이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할 것이며, 우리를 가장 좋은 삶으로, 영생으로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신다. 와서 먹으라고, 맛보고 알라고, 향유하고 기뻐하라고 초청하신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라고(벧전2:3) 하시며, “아, 너희 목마른 자들은 누구든지 물들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고”(사55:1) 말씀하신다. 그분은 오늘도 당신에게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가득 준비하시고서 그것을 값없이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갈급하면 된다. 배고픈 자가 맛볼 수 있다. 당신은 주의 선하심에 대해 필요를 느끼는가? 숫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주님과의 만족스러운 동행의 기쁨을 갈급하는가? 주께 오늘 부르짖으라.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귀를 열어두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