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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제 446 호 2026년 8월 02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20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4장
오전설교
약함 가운데 온전해지는 능력
조도희 담임목사 | 고린도후서 12장 7절–10절
오후설교
만나가 주는 교훈
조도희 담임목사 | 출애굽기 16장 1절-6절
수요설교
교만은 영적 거장의 마지막 시험이다.
조도희 담임목사 | 사무엘하 24장 1절-25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20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4장

주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게 됨

의롭게 됨”(칭의 justification)은 법정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하나님 앞에 완전히 의로운 신분으로 서게 된 우리의 법적인 지위를 가리킨다.

이 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사용하여 의롭게 됨에 관한 세 가지 위대한 사실을 증명한다.

 

I. 의롭게 됨(칭의)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로마서 4:1-8).

의의 선물은 행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주어졌다.

 

의롭게 됨이란 하나님의 의가 내 계정에 전가(imputed)되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가 내 것으로 계산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하게 됨, 성화(Sanctification)란 의가 내 삶 속에 실제로 전달되고(imparted), 내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 결과 사람들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게 되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게 된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인 다윗 역시 행위와는 무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가르쳤음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우리의 계정에 전가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계정에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적으로 은혜에 근거하여 우리의 계정에 전가해 주신다.

 

II. 의롭게 됨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받는다 (로마서 4:9-17).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율법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어떻게 되는가?”

바울은 이에 대해 아브라함이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은 그가 할례를 받기 14년 전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대답한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

다시 말해, “믿음의 가족에 속한 모든 사람의 조상이다.

갈라디아서 3:7, 29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으로 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알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들이니라.”

또한 바울이 로마서 2:27-29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육체적으로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참된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것은 아니다.

 

13-17절에서 바울은 율법과 은혜를 대조한다.

이는 1-8절에서 믿음과 행위를 대조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 부분의 핵심 단어는 약속”(promise)이다(13, 14, 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이는 장차 약속된 씨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영광스러운 왕국을 가리킨다), 율법이나 할례와 관련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약속을 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곧 자신의 한계에 이른 상태에 있었다.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은 오직 믿는 것뿐이었다!

율법은 결코 누구도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율법은 오직 진노를 가져오며, 죄를 드러낼 뿐이다.

율법은 은혜를 완전히 무효로 만들며, 마치 행위가 믿음을 무효로 만드는 것과 같다.

이 둘은 서로 나란히 공존할 수 없다.

율법이 아직 주어지지도 않았는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것이 은혜를 따라 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되거니와 마침내 그 약속을 모든 씨에게 확고히 하려 함이며 율법에 속한 자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에게도니라. 그는 우리 모두의 아비라.”(16)

의롭게 됨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주어진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단지 유대인의 육신적인 조상일 뿐 아니라, 그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조상, 우리 모두의 아비이다.

 

III. 의롭게 됨은 인간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부활의 능력으로 받는다 (로마서 4:18-25).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명을 낳을 능력이라는 면에서 이미 죽은 것과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육신이 죽었을 때, 비로소 성령의 부활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게 된다.

 

 

 

 

 

 

오전설교

약함 가운데 온전해지는 능력

조도희 담임목사
고린도후서 12장 7절–10절
본문 말씀
7 지극히 위대한 계시들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내가 자고하지 않도록 육체에 한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내게 주셨으니 그가 나를 쳐서 자고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8 이를 위하여 세 번이나 그것을 내게서 제거해 달라고 주께 간구하였는데 9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게 됨이니라.”고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매우 기쁘게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거하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경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 곧 내가 강하기 때문이라.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꼭 바꾸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 가지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육체적인 장애일 수도 있고, 아픈 인간관계일 수도 있으며, 반복되는 낙심일 수도 있다.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일 수도 있고, 재정적인 부담이나 마음 깊은 상처, 혹은 오랫동안 계속되는 어떤 고통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이것 하나만 없애 주신다면, 나는 훨씬 더 효과적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을 텐데. 훨씬 더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사용하여 자신의 종이 스스로 높아지는 것을 막으셨으며, 참된 사도직과 사역은 인간의 뛰어남이나 인상적인 능력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드러내셨다. 약함 가운데 온전해지는 능력은 자신의 강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분한 은혜를 의지할 때 나타나는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스러운 약함을 허락하심으로 우리가 교만해지는 것을 막으신다. “지극히 위대한 계시들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내가 자고하지 않도록 육체에 한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내게 주셨으니”(7)

  위험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높이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진정한 위험은 바울 자신이 스스로를 높이는 것에 있었다. 영적인 특권을 누린다고 해서 교만의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별한 은혜는 특별한 시험을 가져올 수 있다. 위대한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교만으로부터 면역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올리실수록,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낮아져야 했다.

  육체의 가시가 어떤 형태였든 간에, 바울은 그 배후에 사탄의 적대적인 공격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탄의 목적은 악의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자비로웠다. 사탄은 바울을 계속해서 쳐서 무너뜨리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공격을 사용하여 바울을 겸손하게 만드셨다. 사탄은 고통을 의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통해 바울을 영적으로 보존하셨다. 원수는 사도를 방해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사용하여 자신의 종을 교만으로부터 보호하셨다.

  “나를 쳐서라는 동일한 단어가 마태복음 26:67과 마가복음 14:65에서 예수님께서 재판받으실 때 사람들에게 주먹으로 맞으신 장면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신을 강하게 내리치는 고통스러운 시련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받은 영적인 특권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라. 성경 지식이 당신을 더욱 겸손하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단지 논쟁하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성경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알량한 지식으로 판단하는가? 사역의 성공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이어졌는가, 아니면 자신의 중요성을 과시하는 마음으로 우월해졌는가? 모든 고난을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징계라고 단정하지 말라.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부끄러운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만을 막기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베푸신 자비로운 보호 장치였다. 당신의 약함이 지금 무엇을 막아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당신이 원망하는 그 짐이, 어쩌면 교만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는 마음을 길러 주며, 너무 빠른 삶의 속도를 늦추고, 기도를 더욱 깊게 만들며,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도록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섭리에도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기억하라. 지금은 인생의 방해물처럼 보이는 일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빚어 가시는 도구일 수 있다.

 

  약함 가운데 온전해지는 능력은 자신의 강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분한 은혜를 의지할 때 나타나는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으로 드리는 간절한 기도에 충분한 은혜의 약속으로 응답하신다. “이를 위하여 세 번이나 그것을 내게서 제거해 달라고 주께 간구하였는데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게 됨이니라.”고 하셨느니라.”(8-9).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아프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지 않았다. 그는 고통을 즐거운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 가시가 자신에게서 떠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감정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가 고난을 부인하거나 환난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픈 곳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으며, 고통을 덜어 달라고 솔직하게 간구할 수 있다.

바울은 주께 간구하였다.”

  바울은 분명한 응답을 받을 때까지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계속 주님께 나아갔다. 여기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 앞에 놓인 잔에 대하여 세 번 기도하셨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도다.”(9) 바울은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충분한 은혜를 약속하셨다. 바울은 가시가 떠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는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바울은 자신의 환경이 바뀌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임재를 더욱 깊이 경험하는 삶을 허락하셨다.

  어려움의 때에 정직하게 기도하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리스도께 숨기지 말라. 치유를 구하라. 위로를 구하라. 화해를 구하라. 필요한 공급을 구하라. 지혜를 구하라. 끈기 있게 기도하라. 응답이 늦어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질 때까지 계속 주님을 찾으라. 순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 뜻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뜻 아래 두는 것이다. 붙드시는 응답에 귀를 기울이라. 때로 주님은 내가 그것을 제거하겠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또 어떤 때에는 내가 그 가운데서 너를 붙들겠다.”라고 말씀하신다. 두 응답 모두 완전한 지혜에서 나오는 응답이다.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자신의 자원을 평가하라. 당신의 힘은 부족할 수 있다. 당신의 지혜도 부족할 수 있다. 당신의 감정적인 여유도 바닥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는 언제나 충분하다.

 

  약함 가운데 온전해지는 능력은 자신의 강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분한 은혜를 의지할 때 나타나는 능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약함 가운데 자신의 능력을 온전하게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매우 기쁘게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거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경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 곧 내가 강하기 때문이라.”(910).

  그리스도의 능력은 약함을 통하여 나타난다. 인간의 힘이 분명히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참된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물론 이것이 약함 자체가 미덕이라는 뜻은 아니다. 게으름이나 부주의, 피할 수 있었던 무능력을 약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영적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바울이 말하는 약함은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섬기다가 겪는 연약함과 고난, 박해와 환난을 가리킨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 자신의 무능력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무대가 되었다.

  바울의 자랑이 바뀌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매우 기쁘게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억지로 참고 견디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약함을 자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의 약함은 자신의 필요와 그리스도의 능력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바울은 더 이상 육체의 가시를 사역을 방해하는 장애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그리스도의 능력이 사역 가운데 나타나는 기회로 보게 되었다.

  바울은 고난 자체를 기뻐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견디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에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경의 가장 위대한 역설 가운데 하나를 선언한다. “이는 내가 약할 때 곧 내가 강하기 때문이라.” 바울이 자기 자신 안에서 약해질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자기 확신이 사라질 때, 그리스도를 향한 확신은 더욱 커졌다. 자신의 자원이 완전히 바닥났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자원은 결코 바닥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만큼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스스로 강한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기를 요구하신다. 눈에 보이는 약함을 영적인 실패와 혼동하지 말라. 세상과 하나님의 기준은 다르다. 세상은 외모와 말솜씨, 재물과 건강, 영향력과 자신감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러한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약함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더욱 기도하라.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으며, 성도들을 양육했고, 복음을 변호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실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었다. 자신의 약함으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라. 사람들은 당신의 강점을 존경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때, 비로소 당신과 깊이 공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을 붙드셨는지를 솔직하게 간증하는 것은,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망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랑하라.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그를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이끌었다. 약함은 바울을 낮추었고, 낮아진 바울은 기도했으며, 기도하는 바울에게 은혜가 주어졌고, 그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의 연약함은 기도를 낳았다. 기도는 그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충분한 은혜를 공급하셨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바울로 하여금 기쁨으로 끝까지 견디게 하였다.

  오늘 당신의 가시도 당장 제거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환경도 즉시 바뀌지 않을 수 있다. 고통은 계속될 수도 있고, 연약함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으며, 당신이 간절히 바라던 응답도 기대했던 방식으로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도다.” 그분의 은혜는 살아가는 동안에도, 사역하는 동안에도, 고난을 견디는 동안에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그리고 영원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충분하다.

 

오전설교 동영상 설교
오후설교

만나가 주는 교훈

조도희 담임목사
출애굽기 16장 1절-6절
본문 말씀
1 그들이 엘림을 떠나 그들의 여정을 시작하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이 엘림과 시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오니,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떠난 후 둘째 달 십오일이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하며 불평하였는데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기 솥 옆에 앉아 있던 때와 빵을 배불리 먹던 때에 이집트 땅에서 주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너희가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이 온 무리를 굶어 죽게 하는도다.” 하더라. 4 그때에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로부터 빵을 비처럼 내리리니, 백성들은 나가서 매일 일정한 양을 거둘 것이요, 이로써 나는 그들이 나의 법도대로 행하는지 행하지 않는지 시험하리라.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가져오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는 것의 두 배가 되게 할지니라.” 하시니라. 6 모세와 아론이 모든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저녁이면 너희가 주께서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셨음을 알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장 오랫동안 경험한 기적은 홍해를 건넌 사건이 아니었다. 가장 오래 지속된 기적은 매일 아침 내린 만나였다. 홍해는 한 번 갈라졌지만, 만나는 40년 동안 계속 내렸다. 이스라엘은 매일 눈을 뜰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은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함이 되었고, 익숙함은 불평으로 변했으며, 불평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훗날 모세를 통해 그 만나를 다시 기억하게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35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오늘 우리는 광야의 만나가 어떻게 생명의 빵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만나가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날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만나가 주는 첫 번째 교훈,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백성에게도 은혜의 만나를 공급하신다(16:1-6).

  광야는 사람의 실체를 드러낸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나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홍해를 건넜다. 마라의 쓴 물이 단물이 되었다. 엘림의 열두 샘도 경험했다. 그런데 먹을 것이 떨어지자 곧바로 원망하기 시작한다. “이집트 땅에서 주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사람은 환경이 어려워지면 하나님의 은혜보다 현실을 먼저 본다.

  하나님은 심판보다 공급을 선택하셨다. 이스라엘은 받을 만한 것이 심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하늘에서 양식을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격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주어진다.

  만나는 날마다 내려왔다. 오늘 먹을 것은 오늘 주셨다. 내일 것은 내일 주셨다. 믿음은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도 원망이 먼저 나오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만나가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날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만나가 주는 두 번째 교훈,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익숙해질 때 쉽게 불평하게 된다.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가 욕심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울며 말하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리요? 우리가 이집트에서 거저먹었던 생선과 오이와 멜론과 부추와 양파와 마늘을 기억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혼이 말라 버리고 우리의 눈 앞에는 만나밖에 아무것도 없구나.” 하더라. 만나는 마치 고수풀씨 같고 그 색깔은 마치 델리엄 색깔과 같은 것이라.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들에 갈거나 절구에 찧고 철판들에 굽고 과자들을 만들었으니, 그 맛이 마치 신선한 기름의 맛과 같더라. 이슬이 밤에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그 위에 내렸더라.”(11:4-9).

  시간이 흘렀다. 만나는 여전히 내려온다. 그러나 백성은 달라졌다. 기적도 반복되면 당연하게 여긴다. 처음에는 놀라웠다. 이제는 지겨웠다. “이제는 우리의 혼이 말라 버리고 우리의 눈 앞에는 만나밖에 아무것도 없구나.”(6) 은혜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감사가 사라진 것이다.

  세상은 항상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한다. 그들은 이집트의 생선을 기억했다. 그러나 노예 생활은 기억하지 않았다. 죄는 언제나 즐거움만 기억하게 한다.

  영적 권태는 가장 위험한 상태이다. 교회도 익숙하다. 기도도 익숙하다. 성경도 익숙하다. 예수님의 이름도 익숙하다. 익숙함은 감사의 적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줄어든 것이 아니다. 내 감각이 무디어진 것이다.

 

  만나가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날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만나가 주는 세 번째 교훈, 하나님의 백성은 광야의 만나를 기억하며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들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며 주께서 너희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주 너의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셨던 모든 길을 너는 기억하라. 이는 너를 겸손하게 하시고 시험하사 네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지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려 하심이니라. 주께서는 너를 겸손하게 하시고 너를 배고프게 하셨으며 너도 모르고 네 조상도 모르는 만나로 너를 먹이셨으니, 이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주께서는 광야에서 네 조상이 알지 못하는 만나로 너를 먹이셨으니, 이는 주께서 너를 겸손하게 하시고 시험하시어 종국에 가서는 네게 선을 행하려 하심이며 또 네가 네 마음에 말하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이 내게 이 재물을 가져왔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8:1-3, 16-17).

  40년이 지난 후이다. 모세는 카나안을 앞둔 백성에게 만나를 다시 이야기한다. 왜일까? 기억은 믿음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너는 기억하라”(2) 성경은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말한다. 기억하지 않으면 교만해진다.

  만나는 하나님의 교육이었다. “이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3) 배고픔은 실패가 아니었다. 훈련이었다.

  광야는 하나님의 학교였다. 만나는 겸손을 가르쳤다. 순종을 가르쳤다. 의존을 가르쳤다. 믿음을 가르쳤다. 광야를 지나온 사람만 은혜를 안다.

 

  만나가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날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만나가 주는 네 번째 교훈, 참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주께서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빵을 주시어 먹게 하셨도다.’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라고 하니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세가 하늘에서 그 빵을 내려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참된 빵을 내려 너희에게 주시나니

이는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분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시니라. 그러자 그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이 빵을 우리에게 항상 주소서.”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 또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그 생명의 빵이라.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으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그것을 먹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또 내가 줄 이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나의 살이라.”고 하시니라.”(6:31-35, 48-51)

  예수님은 만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군중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모세가 하늘에서 그 빵을 내려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라”(32) 진짜 만나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지금 진짜 만나가 너희 앞에 서 있다.

  만나는 예수님의 그림자였다. 만나는 하루를 살렸다. 예수님은 영원을 살리신다. 만나는 육신을 살렸다. 예수님은 영을 살리신다. 만나를 먹을 광야 세대는 만나를 먹었어도 모두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시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이고 의지하는 것이다. 매일 그리스도를 삶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다.

 

  광야의 만나를 다시 생각해 보자. 출애굽기에서는 원망하는 백성에게도 은혜가 내려왔다. 민수기에서는 은혜가 익숙해질 때 감사가 사라졌다. 신명기에서는 그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그 만나가 누구를 가리켰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였다. 이스라엘은 만나를 먹고도 다시 배고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광야의 만나를 먹은 사람은 육신의 생명을 이어 갔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신다.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상의 양식으로 만족하려 하는가?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오신 참된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육신은 음식으로 살아가지만, 우리의 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먹고,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만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위대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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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영적 거장의 마지막 시험이다.

조도희 담임목사
사무엘하 24장 1절-25절
본문 말씀
1 이스라엘에 대한 주의 분노가 다시 발하였으니, 주께서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움직이시어 그들을 향하여 말하게 하시기를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계수하라.”고 말하게 하신지라, 2 이에 왕이 그와 함께한 군대 대장 요압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이제 가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통과하며 백성을 계수하여 나로 백성의 수를 알게 하라.” 하니 3 요압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 백성이 얼마가 되든지 주 왕의 하나님께서 일백 배나 그들을 더하시기를 원하며, 또 내 주 왕의 눈이 그것을 보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는 이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나 4 왕의 말이 요압과 군대 대장들보다 우세한지라, 요압과 군대 대장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하려고 왕의 면전에서 나가니라.

  밧세바와 간음을 범했던 다윗이 이제 노인이 되었다. 그의 삶에서 중년의 정욕은 다른 죄들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신앙생활이 더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육신을 어느 정도 다스리게 되고 죄를 초월하여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꿈에 불과하다. 오늘 유혹하는 죄들이 나이가 들어서는 더 이상 큰 유혹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리를 대신하여 또 다른 수많은 죄들이 여러분을 넘어뜨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영적 거장인 다윗이 인생 마지막에 직면했던 문제는 교만이었다. 교만은 영적 거장의 마지막 시험이다.

 

  교만은 영적 거장의 마지막 시험이다. 그 교만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신뢰하게 한다(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음을 매우 분명하게 말해 준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도 그들을 치도록 움직이셨다고 기록한다. 역대상 21장은 이 사건을 기록한 평행 본문이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일어나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대상21:1) , 이 사건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징계를 수행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사용하여 다윗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셨다. 어떤 이유였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셨고, 사탄이 다윗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리고 다윗은 분노에 휩싸인 채 백성의 수를 세는 죄를 범하였다.

  다윗은 자기 휘하에 얼마나 많은 군사가 있는지 확인한 뒤, 그 숫자를 보며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다윗이 교만한 마음으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교만은 언제나 죄의 뿌리이다. 교만은 결코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인도하지 않는다. 교만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뜨릴 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도 무너뜨린다.

  요압은 왕의 명령을 듣고 다윗에게 이렇게 반대한다. “왕께서 왜 이런 일을 하시려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실제보다 백 배나 강한 백성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백성이니,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계속 주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충고였다. 그러나 왕의 명령은 장군의 충고보다 우선했다. 결국 다윗의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고, 다윗은 선한 충고를 거스른 채 죄를 범하였다.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의 선한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에 빠진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외면한 채 자기 길을 고집한다. 그러한 행동의 결과는 결국 재앙일 수밖에 없다.

 

  교만은 영적 거장의 마지막 시험이다. 그 교만은 반드시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게 한다(5-16).

  교만은 양심의 책망의 고통을 치르게 한다. “백성의 수를 센 후 다윗이 마음에 가책을 받은지라, 그가 주께 말하기를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크게 죄를 지었나이다. 오 주여, 이제 내가 간구하오니, 주의 종의 죄악을 제하여 주소서. 내가 매우 어리석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10) 요압이 인구조사의 결과를 보고하자 다윗은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죄에 대한 책망이 그의 마음을 깊이 찔렀던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가장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성령의 책망(죄의 깨달음)이다. 죄를 생각하는 순간이든, 행동으로 옮긴 직후이든, 곧바로 성령께서 내 마음을 책망하신다. 이러한 책망은 방황하는 자녀를 다시 집으로 불러들이시는 하나님의 첫 번째 단계이다(히브리서 12:5-11). 책망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장 큰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교만은 악을 선택해야 하는 고통을 준다. 다음 날 선견자 갓이 다윗을 찾아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메시지를 전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자신이 받을 징계를 직접 선택하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이 7년 동안 기근을 겪는 것, 3개월 동안 원수들에게 패배하는 것, 3일 동안 전염병이 나라를 덮치는 것 가운데 다윗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이스라엘 백성은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죄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갈라디아서 6:7-8).

  징계가 가져온 고통이 따른다. “그리하여 주께서 아침부터 정해진 때까지 이스라엘에 전염병을 보내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백성들 칠만 명이 죽으니라. 천사가 그의 손을 예루살렘으로 뻗쳐 멸망시키려 하였을 때, 주께서 그 재앙에서 스스로 돌이키시고, 백성을 멸한 그 천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것으로 충분하니, 이제 네 손을 멈추라.” 하시니 주의 천사가 여부스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었더라.”(15-16). 불과 사흘 만에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7만 가정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겼다. 나라 전체가 충격과 애통함에 휩싸였다. 한 사람의 교만한 죄 때문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결코 다 알 수 없다.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죄에는 언제나 결과가 따른다.

어떤 경우에는 죄를 지은 당사자만 그 결과를 감당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주변 사람들까지 함께 고통을 겪는다.

 

  교만은 영적 거장의 마지막 시험이다. 그 교만은 회개로만 치유될 수 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사도행전 13:22)이라 불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죄를 자백하는 그의 태도에 있다.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주께 고하여 말하기를 보소서, 내가 죄를 지었고 내가 악하게 행했나이다.”(17) 다윗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아주 큰 죄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했다.

  이것은 오늘 우리 모두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교훈이다. 그렇다. 우리도 죄를 짓는다. 때로는 매우 큰 죄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 우리의 본성은 그 죄를 감추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려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모든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렸다. “그러나 이 양들이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청하오니,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더라.”(17)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교만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군사의 숫자에 관심이 없다. 지난 승리들을 자랑하려는 마음도 없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죄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를 보게 되었고,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실패했을 때 바로 그 자리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정직하게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죄에 대해 정직해질 때, 더 이상 변명하지 않게 된다. 더 이상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게 된다. 더 이상 죄를 숨기려 하지 않게 된다. 죄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며, 그 죄를 처리해야 할 사람도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정직해질 때 우리는 죄를 버리게 되고, 죄가 우리 삶에 가져온 결과까지도 겸손히 받아들이며 해결하려 하게 된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축복하시고, 용서하시며, 회복시키신다.

  죄를 범한 후 다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려면 언제나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18-25).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어떤 타작마당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다윗이 그곳에 이르자 타작마당의 주인은 그 땅과 소를 모두 왕에게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는 참된 예배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결코 값싼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타작마당과 소를 값을 치르고 산 후 제단을 쌓아 희생 제사를 드렸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셨고, 재앙은 그치게 되었다.

  믿음은 마치 타작마당과 같다. 타작마당이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듯이, 참된 믿음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것들을 걸러낸다. 믿음을 순종으로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나 아무런 희생도 요구하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다. 아무런 희생도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관계를 포기해야 하는 대가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된 습관을 버리는 희생일 수도 있다. 죄를 범한 후 다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려면 언제나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복을 누리는 삶은 결코 값싼 삶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 하나님을 향하여 적당히 타협하면서도 그분의 복은 기대할 수 없다.

 

  오늘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시 지금 해결하지 못한 죄의 문제가 있는가? 주님 앞에 나아가, 예수님과의 동행을 가로막고 있는 죄나 영적인 문제를 정직하게 해결해야 할 필요는 없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이 교회 가운데 계속 역사하시고 복을 부어 주시도록, 여러분은 기꺼이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경험하라. 그분은 상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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