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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경침례교회 주보
제 440 호 2026년 6월 21일 주보

부산성경침례교회주보

주보 목차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14
조도희 담임목사 | 로마서 3장 1절 - 8절
오전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맞이하려면
조도희 담임목사 | 마태복음 17장 1절-9절
오후설교
그리스도인 군사의 비밀 병기
조도희 담임목사 | 에베소서 6장 18절
수요설교
우리를 위한 속죄 염소, 예수 그리스도
조도희 담임목사 | 레위기 16장 5절-10절
오전성경공부

로마서 강해 14

조도희 담임목사
로마서 3장 1절 - 8절
본문 말씀
1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모든 면에서 많으니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들이 맡겨졌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어찌하겠느냐?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시키겠느냐? 4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 기록된 바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고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만일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내가 사람의 방식대로 말하노니) 응징하시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느냐? 7 만일 나의 거짓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더욱 풍성하여져서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하여 내가 죄인으로서 여전히 심판을 받으리요? 8 차라리 (우리가 비방을 받고 또 어떤 자들이 우리가 말하는 것으로 확증하는 것처럼) 악을 행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하자고 하지 아니하였겠느냐? 그런 자들의 정죄는 당연하니라.

3:1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모든 면에서 많으니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들이 맡겨졌음이니라.

만일 참된 유대인이란 오직 내면적 유대인이라면, 육체적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오직 마음의 할례만이 중요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외적인 할례를 명령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2).

성경은 순수한 말씀들이다(12:6).

성경은 빛을 주고 이해할 수 있는 명철을 준다(119:130).

성경은 진리이다(17:17).

성경은 생명을 준다(8:3).

성경은 당신을 죄로부터 지켜 줄 수 있다(119:9-11).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졌던 특권이었다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어찌하겠느냐?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시키겠느냐?

4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 기록된 바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고 함과 같으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들을 어떤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다(5:16-17; 4:28-29; 27:15-26; 5-12, 18-19).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사람도 여전히 자기 죄 가운데 잃어버린 상태라는 뜻인가?

믿음은 단지 믿음이라는 이유만으로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이 진실하다는 이유만으로 효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이 그것을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사실이다.

당신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결과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관해서 바울은 3절의 질문에 스스로 이렇게 답한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4).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3:4)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판단을 받으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즉 누군가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주만을 거역하여 내가 죄를 지었으며 주의 목전에서 이 악한 행실을 행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시고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리이다.(시편 51:4)

죄가 심판받고 있다.

, 주만을 거역하여 내가 죄를 지었으며 주의 목전에서 이 악한 행실을 행하였으니

그 다음 구절은 로마서 3:4와 일치한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시고

그러나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받는 분이 아니라 심판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 아래 다윗의 말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다.

주님께서 백보좌 심판에서 죄인들을 심판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을 정죄하려고 할 것이다.

네가 나의 심판을 무효화시키려느냐? 네가 나를 정죄함으로써 네가 의롭게 되려느냐?(40:8)

그때 주님께서는 기록된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들을 사용하여 그들에게 대답하실 것이다.

성경이 주님을 의롭게 하고 죄인을 정죄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성경책을 펼쳐 보이실 것이며, 그들의 입은 완전히 막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22:31)

그들은 교묘한 질문으로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지만, 주님은 성경으로 답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질문하셨을 때 그들은 대답할 수 없었다.

백보좌 심판에서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제 율법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 줄 우리가 아노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가 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3:19)

백보좌 심판에서 각 죄인은 심판석 앞으로 끌려 나와 자기 변론을 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에게 공정한 재판을 베푸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 심판석에 서게 된다면, 당신은 자신의 사건에 관하여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말이 끝난 뒤 주님께서는 책을 펴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고소에 답하시고, 당신의 모든 죄를 밝히시고, 당신의 형벌을 선고하실 것이다.

그 후 당신은 불못의 영원한 흑암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5 그러나 만일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내가 사람의 방식대로 말하노니) 응징하시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느냐?

7 만일 나의 거짓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더욱 풍성하여져서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하여 내가 죄인으로서 여전히 심판을 받으리요?

8 차라리 (우리가 비방을 받고 또 어떤 자들이 우리가 말하는 것으로 확증하는 것처럼) 악을 행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하자고 하지 아니하였겠느냐? 그런 자들의 정죄는 당연하니라.

만일 나의 잘못과 악함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 준다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것을 그냥 넘어가도록 허락하셔야 하지 않는가?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시는 것은 불공평한 일인가?

참된 그리스도인, 단순히 구원받은 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자기 죄를 정당화하거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사람도 죄를 짓도록 만드신 적이 없으시다(1:13-14).

또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18:23, 32).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다(벧후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죄와 지옥으로부터조차 자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우리는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만일 나의 거짓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더욱 풍성하여져서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하여 내가 죄인으로서 여전히 심판을 받으리요?(7)

하나님의 진리는 당신의 순종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보다 거짓말이나 악행을 통해서 더 풍성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심판하시고 응징하신다는 사실(5)은 당신이 대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8 차라리 (우리가 비방을 받고 또 어떤 자들이 우리가 말하는 것으로 확증하는 것처럼) 악을 행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하자고 하지 아니하였겠느냐? 그런 자들의 정죄는 당연하니라.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인은 구원을 받는 이유가 자신이 한 일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 때문이라고 믿는다.

에베소서 2:8-9가 말하듯이 그것은 당신이 얻어 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빌립보서 1:6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당신이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면허증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징계하시고 응징하신다(5).

다만 그를 지옥으로 보내지는 않으신다.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잃을 수 있다.

교제(fellowship)를 잃을 수 있다(요일 1:6-7).

간증(testimony)을 잃을 수 있다(고전 8:7-13; 19:14; 벧후 2:6-8).

섬김(service)을 잃을 수 있다(고전 9:27).

상급(rewards)을 잃을 수 있다(요이 8; 고전 3:15).

건강을 잃을 수 있다(고전 11:29-30).

심지어 육신의 생명까지 잃을 수 있다(고전 11:30; 고전 5:5).

그러나 결코 잃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이다.

오전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맞이하려면

조도희 담임목사
마태복음 17장 1절-9절
본문 말씀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떨어져 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어,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시니 그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의 옷은 빛처럼 희어지더라. 3 그런데, 보라,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서 주와 함께 이야기하더라. 4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원하시면 여기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나이다.”라고 하더라. 5 그가 아직 말하는 중인데,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 위를 덮더라. 보라, 구름 속에서 음성이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얼굴을 땅에 대고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을 만지시며 말씀하시기를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고 하시더라.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명제 : 성도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이다.

성도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고난의 사역과 영광의 사역으로 나뉜다. 베드로전서 1:1011은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다가올 영광을 미리 증거했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보여 주는 그리스도의 두 큰 국면이다. 첫째는 초림 때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이고, 둘째는 재림 때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그리스도이다. 마태복음 1621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밝히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이것은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그들은 메시아의 영광을 기대했지만, 주님은 먼저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마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시 동안 자신의 감추어진 영광을 드러내신다.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희어진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주님과 함께 말한다. 하늘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이것은 장차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사건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며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은 패배자가 아니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며,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왕이시다. 그러므로 변형산 사건은 낙심한 성도에게 위로를 준다. 지금은 잠깐의 고난이 있어도 영원한 영광이 온다. 지금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도 왕국의 날이 온다. 지금은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절해도, 장차 온 세상이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성도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맞이하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재림을 맞이하려면 영광중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1-3).

따로 떨어져 예수님과 홀로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떨어져 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어”(1) 주님께서는 세 제자를 따로데리고 가셨다. 군중으로부터, 소음으로부터, 일상의 분주함으로부터 그들을 분리시키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여 주셨다.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는 성도는 먼저 주님과 따로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세상의 방식, 세상의 염려, 육신의 분주함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으면 예언의 말씀을 통해 보아야 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따로 떼어 놓으시고, 그곳에서 깊은 계시와 확신을 주신다. 모세는 산에서 홀로 하나님을 만났다. 엘리야는 고요한 가운데 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요한은 팟모 섬에서 홀로 계시의 말씀을 받았다. 다니엘은 홀로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통하여 예언의 말씀을 받았다. 성도는 공적인 예배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말씀 앞에 앉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기도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만나야 한다(2). “그들 앞에서 변형되시니 그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의 옷은 빛처럼 희어지더라.” 이것은 외부에서 비춰진 빛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 있던 영광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주님은 변형산에서 새롭게 영광스러워지신 것이 아니다. 원래 가지고 계셨던 영광을 잠시 나타내신 것이다. 그분의 인성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가리고 있던 휘장과 같았다. 그러나 그 산에서 그 휘장이 잠시 걷혔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빛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통하여 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계속 바라봄으로 만나야 한다.

성경 공부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3). “그런데, 보라,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서 주와 함께 이야기하더라.” 이 두 사람은 구약 계시 전체의 대표적 증인으로 등장한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율법과 선지서들을 통하여 영광 중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이것은 율법과 선지서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 내시는 더 위대한 구속자이시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외친 선지자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아버지께로 완전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데, 보라,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서 주와 함께 이야기하더라.”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었을까? 누가복음 930, 31절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보라, 두 사람이 주와 대화하는데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난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는 주의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더라.” 하늘의 대화 주제는 갈보리였다. 변형산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율법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선지서들도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성경의 모든 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한다. “나는 길이요, ...” 그러므로 재림을 맞을 준비하는 성도는 성경을 시간이 날 때나 읽는 단순한 위로의 책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특히 오늘날은 성경을 전문적으로 읽어야 한다. 특히 구약인 율법과 선지서들 안에서 고난받으시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공부해야 한다.

 

성도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재림을 맞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4-5).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4). 4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원하시면 여기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나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나란히 놓으려 했다. 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이지만, 예수님은 증거의 대상이시다. 베드로의 또 다른 문제는 영광의 산 위에 머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주님은 산 위에 머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그리고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야 했다.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에게도 이 문제가 있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뜻보다 자기 생각을 앞세운다.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이대로 유지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주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앞세운다. 하나님의 계획보다 자기 감정과 체험을 붙들려 한다. 그러나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려면 재림과 무관한 개인적인 생각을 극복해야 한다. 베드로의 장막 제안처럼, 그럴듯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생각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 “그가 아직 말하는 중인데,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 위를 덮더라. 보라, 구름 속에서 음성이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5) 베드로가 아직 말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말을 끊으셨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선언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엘리야의 말을 들으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하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의 권위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재림을 맞을 준비하는 성도는 세상의 소리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자기 감정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앞세워야 한다. 주님께서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 들어야 한다. 회개를 명령하시면 들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면 들어야 한다. 깨어 있으라 하시면 들어야 한다. 다시 오리라 약속하시면 들어야 한다. 성숙한 성도는 자기 생각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앞세우는 사람이다. 참된 제자는 자신의 의견보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재림을 준비하는 삶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그 답을 알았다면,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

 

성도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재림을 맞이하려면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6-9).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6-7). “제자들이 듣고 얼굴을 땅에 대고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을 만지시며 말씀하시기를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고 하시더라.”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사람이 하나님의 위엄 앞에 서면 교만할 수 없다.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영광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본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그리스도께서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셨다.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에게도 두려움이 있다.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두려움이 있다. 믿음을 지키며 살다가 낙심할 때가 있다. 경건하게 살려고 할수록 지칠 때가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지만, 현실의 고난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때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위로이다.

주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를 버리지 않으신다. 가까이 오신다. 만지신다. 일으키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그러므로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는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구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 끝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손이 우리를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일으켜야 한다.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만을 신뢰해야 한다(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모세도 사라졌다. 엘리야도 사라졌다. 빛나는 구름도 사라졌다. 하늘의 음성도 멈추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셨다. 이것이 변형산 사건의 핵심이다.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성도의 신앙은 결국 여기로 와야 한다. 오직 예수이다. 구원을 위해서도 오직 예수. 죄 사함을 위해서도 오직 예수. 의롭다 하심을 위해서도 오직 예수. 고난 가운데서도 오직 예수. 두려움 가운데서도 오직 예수. 재림의 소망 가운데서도 오직 예수. 성도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체험과 감정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결심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해야 한다.

변형산의 밝은 체험은 항상 계속되지 않는다. 구름은 걷힌다. 감정은 식는다. 특별한 체험도 지나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아 계신다. 건강이 흔들려도 예수님은 계신다. 사람이 떠나도 예수님은 계신다. 재산이 사라져도 예수님은 계신다. 사역이 어려워져도 예수님은 계신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워져도 예수님은 계신다. 그러므로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신뢰해야 한다.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9). “그후 그들이 산에서 내려갈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당부하여,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그 광경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장면을 즉시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유는 분명하다. 변형산의 영광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지 않고서는 바르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영광은 그분의 고난과 분리되지 않는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는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또한 영광 없는 십자가도 성경의 완전한 그림이 아니다. 예수님은 고난받으신 구주이시며, 동시에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왕이시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패배자가 아니셨다. 그분은 자발적으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고, 승리 가운데 부활하셨으며,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다. 제자들은 갈보리를 경험하기 전에 변형산을 볼 필요가 있었다. 십자가의 충격을 견디기 전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필요가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경건하게 살다가 지칠 때, 성도는 변형산의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지금의 고난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 고난 뒤에는 영광이 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다. 모든 눈물 뒤에는 왕국이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낙심하지 않는다.

지금은 고난의 길을 걸어도, 주님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신다. 지금은 믿음으로 참고 기다려야 하지만, 장차 우리의 믿음은 눈앞의 현실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1719절은 단순히 제자들이 산 위에서 신비한 체험을 한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미리 보여 주는 계시이다. 주님은 고난받으실 분이지만, 동시에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분이다. 첫째,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셋째,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

 

오후설교

그리스도인 군사의 비밀 병기

조도희 담임목사
에베소서 6장 18절
본문 말씀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

에베소서에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의 전신갑옷에 대한 바울의 위대한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전투에 들어가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과 그분께서 주시는 전신갑옷을 통하여 우리는 능히 승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옷에 대한 설명을 17절에서 끝낸다. 그러나 바울은 갑옷이나 무기만으로는 용감한 전사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병사라도 참된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전투를 맞설 수 있는 내적인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그 병사가 아무리 훌륭한 훈련을 받았고 아무리 좋은 장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적의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인 군사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주님의 모든 전신갑옷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전쟁터로 나아갈 힘과 용기가 없다면 결국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18절 역시 하나님의 전신갑옷 목록에 포함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공격 무기이고, 다른 갑옷들이 우리의 방어를 위한 것이라면, 기도는 그리스도인 군사의 비밀 병기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만,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전투의 날에 굳게 서서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이 필수적인 요소가 없다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기도의 병기와 함께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단단히 갖추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군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도라는 비밀 병기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 비밀 병기의 정의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능력을 공급받는 기도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늘 아버지와 양방향의 대화를 나누는 영적인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하고, 또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교제의 시간이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통하는 특권이다.

기도의 특권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영적 사역이다. 기도는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그리고 정당한 목적을 위하여 행할 수 있는 영적 활동이다. 당신은 교회에서 기도할 수 있다. 가정에서 기도할 수 있다. 직장에서 기도할 수 있다. 병실에서 기도할 수 있다. 운전 중에도 기도할 수 있다. 기도는 특정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디에서든지 하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

기도의 능력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생각해 보자. 기도는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는 과정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갑옷을 입는 과정이다. 기도는 또한 하나님의 군대 안에서 전투를 위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의 포병 무기를 사용하고 목표를 향해 정확하게 조준하는 방법이다. 전신갑옷을 입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통하여 그 갑옷의 능력이 실제로 우리 삶 속에 적용된다.

기도는 세상에 주어진 가장 위대한 힘이다. 기도는 지금까지 이 땅에 주어진 가장 위대한 능력이며, 또한 성도에게 허락된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세상은 우리의 교회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우리의 성경을 빼앗아 갈 수도 있다. 우리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기도는 세상 어떤 권력도 빼앗을 수 없는 성도의 특권이다.

기도는 성도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인도한다. 기도할 때 성도는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할 때 성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왕들의 왕, 만왕의 왕이시며 주들의 주이신 만주의 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성도의 삶 가운데 가져온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서 역사하도록 하는 통로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다. 기도하는 성도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가장 예수님을 닮는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아 있는 순간은 바로 기도할 때이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사람이셨다. 그분은 새벽에 기도하셨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기도하셨으며, 시험을 앞두고 기도하셨고, 십자가를 앞두고도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성도는 가장 주님을 닮아 가는 성도이다.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습관이 아니다. 기도는 성도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비밀 무기인 것이다.

 

그리스도인 군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도라는 비밀 병기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 비밀 병기의 특징은 성령 안에서 지속적으로 드려지는 다양한 형태의 기도이다.

항상기도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루 종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7절에서 경고하신 것처럼 의미 없는 말들을 반복해서 늘어놓으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 517절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의 상태 속에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수화기의 송수신기가 항상 연결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하루의 어느 순간에도 즉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 가운데서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며 깨끗한 삶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이러한 친밀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는 전투가 시작된 후에야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으며, 이미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으며, 이미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기도하라. 참된 기도는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훌륭한 군인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무기를 활용한다.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 군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다양한 형태의 기도를 사용한다. 형식적인 기도가 있고 비형식적인 기도가 있다. 조용히 드리는 기도가 있고 소리 내어 드리는 기도가 있다. 공적인 기도가 있고 개인적인 기도가 있다. 즉흥적인 기도가 있고 신중하게 준비된 기도가 있다. 간구의 기도가 있고 중보의 기도가 있다. 죄를 고백하는 기도가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가 있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기도가 있고 감사의 기도가 있다. 찬송의 기도가 있고 질문하는 기도가 있다. 깊은 경배로 드리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위급한 상황 속에서 구조 신호탄처럼 하늘을 향해 급히 올려 보내는 기도도 있다. 이 모든 종류의 기도는 각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사용한다.

기도를 단지 무언가를 달라고 요청하는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성도는 기도의 풍성한 축복을 놓치고 있는 사람이다. 기도는 단순히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통로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단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는 수단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생활은 단순한 요구 목록을 넘어 더욱 풍성하고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

성령 안에서기도하라. 성경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가르친다. 로마서 826-27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라.” 우리의 기도 생활 역시 우리 삶의 다른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통제 아래 놓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어리석은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기도는 방해를 받게 되고 효과를 잃게 된다. 야고보서 41-3절은 많은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서 516-17절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보여 준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육신의 정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 길은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진리는 이것이다. 참되고 진실한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참된 기도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도를 시작하신다. 성령님께서 그 생각을 우리의 마음속에 넣어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님께서 주신 그 기도를 입술로 표현할 때, 그 기도는 다시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시작도 하늘이며, 그 끝도 하늘이다.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과정 역시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 있게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귀에 들리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군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도라는 비밀 병기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 비밀 병기의 사용은 깨어 있음과 인내와 중보를 요구하는 기도이다.

기도가 진정으로 효과를 발휘하기를 원한다면, 기도는 기분이 내킬 때만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도는 했다가 말았다가 하는 우연한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도는 지속적이어야 하고, 꾸준해야 하며,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몇 가지 행동 중심적인 표현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기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깨어 기도하라.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또한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을 경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성경에는 두 가지 대조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한쪽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들어 버린 제자들이 있다(마태복음 26:38-45). 다른 한쪽에는 느헤미야 시대의 백성들이 있다. 느헤미야 49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들 때문에 밤낮 그들에 대하여 파수꾼을 세웠더라.” 그들은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경계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깨어 살피기를 원하신다. 기도는 하지만 경계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공격을 당하게 된다. 기도는 하지만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은 쉽게 넘어지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깨어 기도하라.” 중요한 표현은 깨어 있으라도 아니고, “기도하라도 아니다. “깨어 기도하라이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26:41) 너희는 주의하여 깨어 기도하라.” 이는 너희가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라.(13:33)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벧전4:7) 기도와 영적 경계는 언제나 함께 가야 한다.

모든 인내로 기도하라. 우리는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한다. 이 말씀은 응답이 올 때까지 계속 기도하라는 뜻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77-8절에서 말씀하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이는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자는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기 때문이라.” 원어의 의미는 계속해서 구하고, 계속해서 찾고, 계속해서 두드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32:26) 그는 응답을 얻을 때까지 붙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응답이 오기 전에 포기해 버린다. 성령님께서 멈추라고 말씀하시기도 전에 포기한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기도 전에 낙심한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멈추라고 말씀하시거나,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누가복음 181절에서 그때 주께서는,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나의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는데이 기도를 가르치시기 위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초대교회 역시 이런 끈질긴 기도의 본을 보여 주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베드로를 구해 내셨다. 기도는 한 번 말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믿음으로 붙드는 것이다.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혼자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마귀와 싸우고, 시험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무는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군대에 속한 전우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넘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위한 기도는 사랑과 연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미워하기는 매우 어렵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향해 분노를 품고 있기는 어렵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위하여 중보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향한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완벽한 갑옷을 입고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전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했어도, 기도가 없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오직 기도만이 그리스도의 군사를 참된 전사로 세울 수 있다. 기도는 성도를 승리하게 하는 비밀 병기이다. 오늘 당신의 기도 생활은 어떠한가?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있는가? 당신은 깨어 기도하고 있는가? 당신은 응답을 받을 때까지 끈기 있게 기도하고 있는가? 당신은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도라는 비밀 병기를 사용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오늘 다시 무릎을 꿇으라.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라.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요설교

우리를 위한 속죄 염소, 예수 그리스도

조도희 담임목사
레위기 16장 5절-10절
본문 말씀
5 그는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숫염소 새끼 두 마리와 번제물로 숫양 한 마리를 취할지니라. 6 아론은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물로 자기 수송아지를 드려서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하여 속죄하고 7 염소 두 마리를 취하여 회중의 성막 문 주 앞에 두고 8 아론이 두 염소 위에 제비를 뽑되 한 제비는 주를 위하고 한 제비는 속죄염소를 위해 뽑을지니라. 9 아론은 주의 것으로 제비뽑힌 염소를 가져와서 속죄제물로 드리고 10 속죄염소로 제비가 뽑힌 염소는 주 앞에 산 채로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속죄염소는 광야로 보낼지니라.

본문에는 매년 시행되던 속죄일의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 속죄일은 유대인의 종교력 가운데 가장 높고 가장 거룩한 날이었다. 바로 이 날에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자비석 위에 피를 뿌림으로써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였다. 그날의 의식 가운데 또 하나 매우 중요한 부분은 바로 속죄 염소를 광야로 보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백성들의 죄가 제거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의식이었다. 두 마리의 염소 중 한 마리는 죽었고, 한 마리는 광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 두 염소가 보여 주는 모든 사역을 예수님께서는 홀로 이루셨다. 그분은 죽으셨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제거하셨다.

 

우리를 위한 속죄 염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5-8, 10).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신하도록 하나님께 선택되셨다. “아론이 두 염소 위에 제비를 뽑되 한 제비는 주를 위하고 한 제비는 속죄염소를 위해 뽑을지니라.”(8) 이 염소들은 특별한 품종의 염소가 아니었다. 그 염소들은 지극히 평범한 염소들이었다. 다른 제물들처럼 특별한 조건을 요구받지도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선택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우연히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 그는 실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미리 정해지셨으나 너희를 위하여 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셨으며”(벧전 1:19-20)

예수님께서도 외형적으로는 특별해 보이지 않으셨다. 이사야 53:2은 그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모양도 우아함도 없으시니 우리가 볼 때에 그를 흠모할 아름다움도 없음이라.”

또한 마태복음 13:54-55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특별함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평범해 보이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죄인을 대신하는 대리자가 되셨다. “속죄염소로 제비가 뽑힌 염소는 주 앞에 산 채로 두었다가”(10) 이 두 염소는 주님 앞에 세워졌고,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었다. 속죄 염소는 백성을 대표하였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표가 되셨다.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그분이 받으셨다(53:5-6).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거룩하게 구별되신 분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셨다. 그분은 순결하시고 죄가 없으셨으며 완전하신 분이셨다. 성경은 그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는 죄를 짓지도 아니하셨고” (벧전 2:22),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 (고후 5:21),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 (4:15),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요일 3:5) 예수님만이 죄인을 위한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한 마리는 주님의 몫으로 정해져 속죄제물로 드려졌다. “한 제비는 주를 위하고”(8) 그 염소는 죽임을 당함으로써 백성들의 죄를 위한 속죄를 상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분의 죽음은 충분하고 완전한 희생이었다.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이니라.”(요한일서 2:2)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자신을 드리심으로 죄를 제거하셨다. 그분의 피는 온 세상의 죄 값을 지불하기에 충분하다.

다른 한 마리는 살아 남겨졌다. “속죄염소로 제비가 뽑힌 염소는 주 앞에 산 채로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속죄염소는 광야로 보낼지니라.”(10) 이 염소는 백성들을 대신하는 대리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백성들의 죄가 제거되는 것을 상징하였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그 염소의 머리 위에 고백하였고, 그 염소는 광야로 보내졌다. 그것은 죄가 백성에게서 멀리 옮겨졌음을 보여 주는 그림이었다.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지만, 그분께서 실제로 나의 대속자가 되시는 것은 믿음으로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구약의 구원도 오늘날의 구원과 동일하게 믿음을 통한 구원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사도행전 16:31)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더라.”(히브리서 2:9),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이사야 53:5),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베드로전서 2:24)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거절하고 놓쳐 버리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내가 달려야 할 그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대신 달리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의 짐을 지셨으며,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셨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기쁨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그분께서 내 짐을 가져가셨네!”, “그분께서 내 죄를 짊어지셨네!”, “그분께서 나의 속죄 염소가 되셨네!”

 

우리를 위한 속죄 염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대신하시고 우리의 죄값을 완전히 치르셨다(9).

아론은 주의 것으로 제비뽑힌 염소를 가져와서 속죄제물로 드리고

죄의 삯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그 염소는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 과정은 결코 아름답거나 평화로운 의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 흘림과 죽음을 수반하는 잔혹한 과정이었다. 희생 제물이 드려지는 과정을 생각해 보라. 짐승은 피를 흘려야 했고, 생명을 내놓아야 했다. 이것은 갈보리에서 드려질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미리 보여 주는 그림이었다. 구약의 제단은 땅 위에 세워져 있었고, 갈보리의 십자가는 수직으로 세워졌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죄 없는 희생물이 죄인을 위해 죽는 것이었다. 이사야 52:14은 주님의 고난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의 용모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상하였도다.”

시편 22편에서도 그분의 고난이 예언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22:6), “내 기력이 질그릇 조각같이 말랐으며 내 혀는 잇틀에 붙었나이다.” (22:15), “내가 내 모든 뼈들을 셀 수 있으니 그들이 나를 보며 쳐다보나이다.” (22:17) 갈보리의 십자가는 결코 낭만적인 장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를 위한 무서운 심판의 현장이었다.

자신의 피로 속죄를 이루셨다. 그 염소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필요하다. 성경은 말한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6:23) 또한,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9:22) 죄는 반드시 죽음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흘려져야 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에 감사하라. 요한계시록 1:5은 말한다.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씻기시고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피 없는 종교를 원한다. 십자가 없는 종교를 원한다. 회개 없는 구원을 원한다. 죄에 대한 심판 없는 복음을 원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죽임을 당했던 모든 염소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반복되었던 모든 희생 제사는 갈보리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모든 제단은 십자가를 가리켰다. 모든 희생 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가리켰다. 모든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하였다. 마침내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오늘 당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당신 자신의 죄값으로 받아들였는가? 그분께서 죽으신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 당신에게 효력을 가지려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를 위한 속죄 염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대신하시고, 우리의 죄값을 완전히 치르셨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영원히 제거하셨다.

그가 성소와 회중의 성막과 제단에 화해하게 하는 것을 마치고 나서, 살아 있는 염소를 가져올지니 아론은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악과 그들의 죄들 가운데 있는 모든 죄과를 고백하고 그 죄들을 그 염소의 머리에 얹어서 적합한 사람의 손을 통해 광야로 보낼 것이요 그 염소가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지고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이르면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아줄지니라.”(20-22)

두 마리의 염소가 있어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홀로 이루신 일을 충분히 보여 줄 수 있었다. 첫 번째 염소는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보여 준다. 두 번째 염소는 십자가 사역의 결과를 보여 준다. 곧 믿음으로 예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죄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전가 받으셨다(21). “아론은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대제사장은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였다. 모든 종류의 죄가 포함된다. 이 모든 죄가 고백되었고, 이 모든 죄가 염소 위에 전가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모든 형태를 처리하시기 위해 오셨다. 고린도후서 5:21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마태복음 27:45-46의 어두운 시간들 가운데 어느 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인간의 모든 죄를 자기 아들 위에 두셨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죄 그 자체로 간주되셨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그분을 심판하셨다.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셨다. “그 염소의 머리에 얹어서 적합한 사람의 손을 통해 광야로 보낼 것이요 그 염소가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지고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이르면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아줄지니라.” 속죄 염소의 사역은 상징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죄를 제거할 능력은 없었다. 구약 성도들을 구원한 것은 염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를 영원히 제거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그분께서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죄인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면, 그의 죄는 단지 값이 지불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죄는 영원히 제거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수 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기도 가운데 담대히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더 이상 영원한 정죄 아래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죄의 짐을 제거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당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 그분께 나아오기만 한다면, 그분은 반드시 당신의 죄의 짐을 가져가실 것이다. 오늘 당신은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허락하겠는가? 주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그분께 나아가 그분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11:28) 그분께 당신의 죄의 짐을 맡기라. 그리고 죄의 짐을 벗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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